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505화 (505/529)

<-- 505 회: 경영의 대가 20권 -->

제론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카르스 황제는 대륙정복을 꿈꿨고 그 첫 발걸음으로 우리 레던 왕국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대흉년과 흑혈병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그로 인하여 혼트 제국은 강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도 전쟁을 장기간 치를 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지.”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만큼 카르스 황제는 대병력보다는 소수정예로 우리 레던 왕국을 깨부술 의도였던 것입니다. 보다 적은 병력으로도 크게 활약할 수 있고 전술적 활용도가 높은 소수정예, 바로 유목민족으로 구성된 기병입니다. 아마 바덴 강 통행세 협상 때부터 그 정도의 구상이 머릿속에 들어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은 우리 레던 왕실이 육제후와 대립할 적에 견제책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육제후의 두뇌 란즈헬 백작이 살아 있었을 때고, 내가 막 에릭 국왕에게 등용되어 왕실에 입관한 시기.

벌써 긴 세월이 지난 것 같은데, 그때 이미 카르스 황제의 머릿속에 여기까지의 시나리오가 구상되어 있었다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세가 변하여서 우리는 오리엔 왕실과 동맹을 맺었고, 대신 혼트 황실 역시 린델 백작가와 안타레스 백작가를 포섭하여서 전쟁에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적인 여력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전황입니다.”

“하지만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냐?”

“예. 결국 카르스 황제는 유목민족 출신으로 구성된 10만 규모의 기병으로 최종결판을 내려 할 것입니다. 유목민족의 기동력과 전술적 활용도로 대승을 거두겠다는 애당초의 구상 그대로의 싸움입니다.”

제론은 카르스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멋지게 잘 정리하였다.

이때 루이가 말했다.

“폐하, 일단은 황제가 그렇게 나올 경우를 가정하여서 대책을 구상해보심이 어떠십니까? 일단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야전에서 싸워야 하는지 끝까지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지부터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재정부상서의 말이 옳다.”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끼리 결정할 게 아니라, 영주들의 뜻도 미리 물어보는 게 좋겠구나. 만일 정말로 카르스 황제가 병력을 분산하여서 각지의 영지들을 습격할 계획이라면, 미리 우리가 예측한 바를 알려주고 뜻을 묻는 편이 영주들의 동요를 줄일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느냐.”

아!

나는 에릭 국왕의 말에 감탄했다.

그랬다.

자기 영지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은 결국 영주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영주들은 크게 당황하여서 우왕좌왕할 터. 하지만 미리 우리가 이 점을 예측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왕실에 대한 영주들의 신뢰도 더 커질 것이다.

이런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역시 에릭 국왕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오리엔 왕실 원군의 사령관 라엘과 영주들을 모두 불어 모았다. 이 자리에는 완쾌된 뮤트 공작도 참석하여서 무게감이 더하였다.

군사부상서인 제론이 나서서 설명한 뒤에, 에릭 국왕이 모두에게 물었다.

“아직은 확인되지 않은 예측일 뿐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바, 야전으로 카르스 황제와 결판을 지어야 할지 이곳에서 계속 방어를 해야 할지 그대들의 의견을 묻고 싶다.”

영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기 영지가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데 태연자약할 수 있는 영주는 없는 것이다.

혼트 제국군이 휩쓸고 지나가면 분명 살육과 약탈이 자행될 것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 그 피해를 복구하려면 아주 긴 세월이 소요될 터였다.

“양측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혼트 제국군이 정말로 병력을 분산하여서 전선을 늘리는 짓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의문을 제기한 것은 바로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가 초고속으로 반성했던 그 녀석 말이다.

에릭 국왕이 말했다.

“아카라스 대공자의 말도 옳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그런 사태를 가정하여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나가 싸워야 하는가, 이곳에서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하는가?”

다시 영주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느라 웅성웅성 어수선해졌다.

“그럼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나?”

“자네는 유목민족으로 구성된 기병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나보군. 숫자가 적더라도 10배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놈들일세.”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놈들이라던데, 아무래도 우리가 사지(死地)로 걸어 나가는 꼴이 아닐까?”

“자기 영지가 공격받았다고 생각을 해보고 판단을 내려야 하오. 그렇게 이 나라 전 영지가 약탈로 피폐해질 때까지 눈 뜨고 바라볼 수만은 없소.”

“내 생각에도 역시 해볼 만하다면 나가 싸워야 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기 때문에 영주들은 패닉상태에 빠지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기 영지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영주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은 것은 아무리 봐도 에릭 국왕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뮤트 공작이었다.

“신이 의견을 개진하여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 하시오, 뮤트 공작.”

“감사합니다.”

뮤트 공작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웅성거림이 뚝 멈췄다. 모든 영주들이 입을 다물고 주목했다. 뮤트 공작이 가진 카리스마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저희 뮤트 공작가의 영지는 이미 혼트 제국군에게 점령당하고 짓밟힌 터라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의견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첫마디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 나라의 방패막이 되어 희생된 뮤트 공작령. 그 공로를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가 모를까.

“전쟁을 오래 끌수록 좋지 않은 쪽은 혼트 제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혼트 제국군이 모든 영지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다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빨리 결판을 봐야 합니다. 황제를 쓰러뜨린다면 다른 영지들이 습격 받는 일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이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제가 만일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제 발로 찾아가서는 안 되는 법. 제 생각에는 병력 규모 15만 정도를 기준으로 적군의 숫자가 그 이상이면 싸우러 나가서는 안 되고, 그 이하면 결판을 봐도 좋다고 봅니다. 아군이 현재 조직력에서 크게 뒤져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오?”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뮤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제 제자들이 퇴각하다가 혼트 제국군 기병과 만나 야전에서 크게 패한 바 있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트 제국군 기병은 빠른 기동력과 자유로운 용병술을 구사하면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조직력이 뛰어나기에 그런 용병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혼트 제국군의 최대 강점이었다.

황실의 정규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유목민족 출신의 전사들로 구성된 기병대조차도 사전 훈련으로 조직력을 갖췄다.

강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서로 호흡이 척척 맞으니 어떻게 움직여도 혼란 없이 질서정연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각지의 영주들이 이끌고 온 군대들과 왕실군, 오리엔 왕실 원군 등 소속이 제각각이라 그런 조직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야전을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 또한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이곳 후디니 백작령에서 방어에 전념하며 싸운다면 각자 맡은 구역을 지키며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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