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3 회: 경영의 대가 20권 -->
상체만 겨우 일으킨 채 돌아보니, 바로 콘돌 기병대의 대장 패트릭 콘돌이었다.
자칼 남작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자칼 남작은 끄응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패트릭이 이를 손짓으로 제지했다.
“그냥 앉아 있지.”
자칼 남작은 일어나기를 포기했고, 패트릭은 그에게 건량과 포도주를 주었다. 딱딱한 건량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목이 바짝 마른 터라 포도주를 보니 군침이 도는 자칼 남작이었다.
코르크를 따서 포도주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마른 목을 촉촉이 적시며 식도를 넘어오는 시원한 감촉에 자칼 남작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패트릭은 자칼 남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칼 남작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단검이 있었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낮에 버렸던 활과 화살도 있었다. 하지만 패트릭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는지 무방비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적장을 마주보고 편히 앉아 있었다.
‘하기야. 오러 마스터를 어찌 해볼 수가 있을 턱이 없지.’
비로소 패트릭 콘돌이 다르게 보였다.
일전에 자칼 남작이 콘돌 기병대의 습격으로부터 달아날 때에 마주쳤던 패트릭 콘돌과 지금의 패트릭 콘돌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전의와 열정에 차 있었다면, 지금은 강자로서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오러 마스터의 위엄이리라.
포도주를 마시며 목을 실컷 축인 자칼 남작은 패트릭에게 물었다.
“언제 오러 마스터가 된 거지?”
“오늘 전투가 벌어지기 몇 시간 전에.”
“……망할.”
“안 됐군.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처지가 많이 달라졌을 텐데.”
패트릭은 웃으면서 짐짓 놀리듯이 말했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자칼 남작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한들 소용도 없고, 그때 나는 이미 너희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
“운명이라……. 참 묘한 말이군. 그러고 보면 주군께서도 나를 영입하시면서 늘 말씀하셨지. 내가 오러 마스터가 될 운명이라고.”
“네 주군이라면 레던의 현자 말이군. 현자의 눈에는 그런 것도 보이나?”
“그럴 리가. 그저 나를 격려하셨을 뿐이겠지. 하지만 단순한 격려라기에는 무언가 확신하시는 듯했어. 마치 미래를 아시는 듯한 태도였어.”
패트릭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고, 그 탓에 대화는 거기서 잠시 멈췄다.
잠시 후, 자칼 남작이 물었다.
“나도 네게 내 운명을 묻고 싶군. 왜 날 죽이지 않았지? 나를 심문해서 알아내고자 하는 게 있었나?”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심문할 생각도 죽일 생각도 없다. 죽여도 되고 살려도 상관없다면 살려주는 쪽을 택했을 뿐이지.”
“왜지? 나 정도의 지휘관쯤은 다시 전장에서 만나도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하기야, 오러 마스터가 되었으니 무서울 게 없겠군.”
“내가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 해도, 당신이 다수 병력을 가진 적장이 되어 나타난다면 우습게 볼 수가 없겠지. 오늘 전투도 내가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허무하게 패할 일이 없었을 테고.”
패트릭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연거푸 패전을 하고 말았지. 나는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높게 평가하지만, 출세하기는 글렀다고 생각되거든. 아마도 당신이 연거푸 패전한 커리어를 만회하기 전에 이 전쟁이 끝나겠지?”
“고맙군. 출세가도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서. 그래서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으니까 그냥 살려줬다 이 말인가? 전쟁의 와중에 아량을 베풀 생각을 하다니. 오러 마스터가 되고 나니 여유가 넘치나 보군.”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패트릭이 말했다.
“패배를 직감했을 때 당신은 병사들을 후퇴시키고 홀로 남았지. 병사들을 싸우게 놔두고 혼자 도망치지 않았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훌륭한 선택이었어.”
“눈앞에 오러 마스터가 나타나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도리가 있나.”
“아무튼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유능하고 야심만만하고 책임감 있는 사내다.”
“…….”
“앞으로 나흘간 우리와 함께 한다. 그 뒤로는 마음대로 갈 길을 가라.”
나흘간 붙잡아두는 것은 자칼 남작이 후퇴한 혼트 제국군 병력을 수습하여서 다시 군사적 위협이 되지 못하게 차단하는 조치였다. 나흘만 붙잡아두면 바덴 강 유역으로 달아난 병사들을 수습하기가 불가능할 터였다.
“별 수 없지.”
자칼 남작은 수긍했다.
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자신은 패장일 뿐이었다.
새로운 오러 마스터의 출현이라는 어쩔 수 없는 변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연패(連敗)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책임 문제로 처벌을 받을 수 있고, 상황이 참작되어서 처벌을 면한다고 해도 이미 그토록 간절하게 욕망하였던 출셋길에서는 낙오되었다고 봐야 옳았다.
‘그러고서 이제는 적수였던 자에게 포로로 붙잡힌 신세라 이거지. 흐흐, 나란 놈의 인생도 참 불행하구나. 하필이면 패트릭 콘돌을 적으로 만나다니!’
처음 전장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보통 비범한 게 아니었던 콘돌 기병대의 대장.
그래도 간신히 카이슨 후작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서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것.
패트릭 콘돌은 후세에 길이 남을 영웅담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
패트릭 콘돌은 영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일화는 패트릭 콘돌을 대표하는 유명한 활약극이 되어 후세에 알려질 것이고, 자신은 그 활약에 희생된 첫 적수로서 역사에 남을 터…….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라서 자칼 남작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
양국의 운명을 결정 짓는 전쟁에서 탄생한 위대한 오러 마스터 패트릭 콘돌의 적수였노라고, 이 자칼은 그런 남자였다고 세상은 기억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도 그리 덧없지는 않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러 마스터를 적으로 만나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출세에 버금가는 행운이리라!
2장. 예상
우리는 오리엔 왕실 원군을 이끌고 온 지휘관 라엘을 아주 성대하게 맞이하는 중이었다.
원군을 맞이한 첫날에 승전을 축하할 겸 연회를 열었고, 그 파티에서 라엘은 에릭 국왕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마치 양국의 정상이 서로를 보는 위치처럼 만들었다.
에릭 국왕과 왕실의 고위 관리들은 물론이고 분위기를 파악한 귀족들도 라엘을 한껏 치켜세우고 떠받들어 라엘 본인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여기서 권력의 특성이 나온다.
권력은 별 게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느냐다.
레던 왕국에서 에릭 국왕과 왕실 고위 관리들, 그리고 주요 귀족에게 이만큼의 대접을 받으면 라엘 브리튼 자작은 좋든 싫든 입지가 확 오르는 것이다.
레던 왕국에서 이만큼이나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이더라, 하는 사실이 전해진다면 오리엔 왕국에서도 라엘이 갖는 입지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다.
하물며 이 라엘은 바로 브리튼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
오리엔 국왕의 머릿속이 슬슬 복잡해지겠지. 왕권 강화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지난 평생의 행보를 생각하면, 오리엔 국왕에게 브리튼 공작가는 가장 강력한 우군이자 역린(逆鱗)이었다. 만약 대립관계가 된다면 브리튼 공작가처럼 위협적인 세력이 없는 것이다.
에릭 국왕에게 귀빈 대접을 받는 라엘을 보며 오리엔 국왕은 나라의 미래에 대한 불길함을 느끼지 않을까? 자신이 죽고 나면 오리엔 왕국은 브리튼 공작가와 라엘의 판도로 넘어 가고 말 것이라는 미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