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8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콘돌 기병대는 잿더미로 화한 부락을 내버려둔 채 다시 길을 떠났다. 마치 한 순간 모든 걸 쓸고 지나간 태풍과도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을 무렵.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군대가 나타났다.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초토화된 부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빌어먹을 새끼들!”
“여긴 베른 부족의 부락 같은데?”
그들은 바로 자칼 남작이 이끄는 1만 5천여 명의 기병대였다. 콘돌 기병대를 뒤쫓아 간신히 이곳에 이른 것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유목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콘돌 기병대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터졌구나.”
자칼 남작은 이를 갈았다.
콘돌 기병대가 혼트 제국령으로 향할 때, 카이슨 후작은 보급로와 아군의 후방 교란의 위험성을 우려해 자칼 남작에게 추격을 명했었다. 하지만 자칼 남작이 그보다 더 우려하던 것이 바로 지금 벌어진 사태였다.
초원에 있는 가족들이 유린당하면, 혼트 황실의 깃발 아래에 전쟁을 나가 있는 전사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악! 어떤 놈들이야!”
“어머니! 어머니!”
몇몇 병사들이 멋대로 대열을 이탈하여 전부 불살라진 부락으로 뛰어들었다. 자칼 남작은 아차 싶었다.
‘우리 중에서도 베른 부족 출신이 있었구나!’
한두 사람을 시작으로 베른 부족 출신의 기병들이 너도나도 뛰쳐나가 폐허를 뒤졌다. 자신의 집이었던 천막의 잔해를 뒤져보고 나뒹구는 시체를 뒤집어보기도 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멈춰라!”
자칼 남작이 버럭 소리를 질러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베른 부족 출신은 전부 내 앞에 집합해라!”
그 명령에 수십여 명이 자칼 남작 앞에 모여들었다. 다들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들이었다.
자칼 남작이 그들에게 말했다.
“시체가 얼마 없는 걸 보니 놈들은 살상보다 파괴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너희 부족 사람들은 어디론가 그리 머지않은 곳에 피난을 떠나 있을 것이다. 너희 부족이 유사시 피난 가는 장소는 짐작이 갈 테지?”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의 시일을 줄 테니 너희 부족민을 찾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고 합류하라. 알겠나?”
“옛!”
병사들은 그제야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들의 심정을 생각해 자칼 남작이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자칼 남작은 전군에 소리쳤다.
“보았느냐? 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고 이곳에 왔는지!”
“옛!”
“베른 부족뿐만이 아니다! 놈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 모두의 가족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힘을 내어서 기필코 놈들을 따라잡아 응징해야 한다! 놈들은 대단히 빠르다. 힘들겠지만, 너희 가족을 위하여 힘을 내야 한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옛―!”
병사들의 대답이 우렁차게 울러 펴졌다.
“그럼 출발한다!”
자칼 남작은 군대를 출발시키는 한편, 다시 정찰망을 넓게 펼쳐서 콘돌 기병대를 발견할 시 효시로 신호하게 했다.
쫓고 쫓기는 사투가 다시 재개된 것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벌하여주십시오!”
니젤은 참담하게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그 자리에는 아버지 쥬르덴 후작은 물론이고, 황제의 그림자 할슈타인 후작과 회복하고 요양을 마친 륭겐 후작도 보였다.
중앙 상석에 앉은 카르스 황제는 분노도 실망도 없는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니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르스 황제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상세한 전투의 경위를 말해라.”
“예, 폐하…….”
패배의 쓰라린 기억을 되새기니 가슴이 쿡쿡 쑤셨다. 니젤은 이를 악물고 설명을 했다.
오리엔 왕실군을 견제하고 승부수를 띄워서 결판을 보려 하다가 중도에 카록 리간드가 나타나 패퇴하기까지.
설명 중간에 카르스 황제가 말을 끓었다.
“더 자세히.”
“아, 예!”
니젤은 이번에는 오리엔 왕실군을 크게 격파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궁시로 삼면을 동시 타격했다가 빠르게 일면을 집중 공격하여 적 중앙을 돌파하려 했군.”
“그렇습니다.”
“진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방의 병력까지 투입하자 빈 정면으로 돌입했고.”
“예, 무예가 뛰어난 부하 둘과 함께 적장 라엘 브리튼과 겨루던 중에 카록 리간드가 나타났습니다.”
“이길 수도 있었군?”
“예……. 라엘 브리튼의 무위가 예상 외로 강력했지만, 부하들과 점점 호흡이 맞고 있어서 승리를 기대해볼 만한 대결이었습니다.”
그리 답하면서도 니젤은 자기변호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가식을 카르스 황제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스 황제의 무감정한 눈길은 니젤을 떠나 오른쪽에 서 있던 쥬르덴 후작에게 향했다.
“쥬르덴 후작.”
“예, 폐하.”
“그대는 아들이 지휘한 전투를 어찌 생각하나?”
니젤은 흠칫 놀랐다.
설마 아버지에게 평가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쥬르덴 후작 역시 놀란 터라 잠시 고심하는 기색을 띠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옵서도 아시다시피 제 아들의 일이라 객관성이 유지될지 조심스럽습니다만, 최대한 충실히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사람이 뒤얽혀 무기를 섞은 대결은 어떤 상황이 나올지 모르므로 승패를 가늠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자면, 라엘 브리튼은 휘하의 기사와 마법사로 임시방편의 방어선을 펼쳤기 때문에 이는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궁병으로 근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카록 리간드 후작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아군이 유리한 형세였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카르스 황제는 의견을 더 요구했다.
쥬르덴 후작은 긴장을 느꼈다. 황제가 원하는 의견을 들려주어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순간, 뇌리로 무언가가 스쳤다.
왜 오리엔 왕실의 원군을 치러 보낸 5만 기병의 대장으로 아들 니젤을 기용했을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투 경위로 보았을 때, 수시로 병력의 움직임을 다변화시켜서 적을 혼란시킨 면에서는 지휘관의 기병지휘능력이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패전의 책임을 피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만.”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생각했다.”
황제의 눈길은 다시 니젤에게 돌아왔다.
“니젤 쥬르덴.”
“예? 예, 폐하!”
아버지의 평가에 감격했던 니젤은 황제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네 역량은 충분히 확인했다.”
“……?”
“너를 제 3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겠다. 이 전쟁을 끝낼 결전에서 네 실력을 뽐내라.”
“폐, 폐하?!”
니젤은 깜짝 놀랐다.
‘제 3관’의 지휘관이 대체 무슨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매우 중요한 전투에서 중용하겠다는 뜻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니젤은 머리를 한껏 숙이며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목숨 바쳐 이번 일을 설욕하고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돌아가 쉬도록.”
“예!”
니젤은 감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예를 갖춘 후 밖으로 사라졌다.
“마음에 드셨나보군요.”
할슈타인 후작이 말했다.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규모의 기병도 자유자재로 지휘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지. 용병술에 필요한 4인을 모두 구성했다.”
사실 카르스 황제는 오리엔 왕실 원군이 레던 왕실과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 이번 작전에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그저 니젤이 자신의 장기말로 어울리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3만에 가까운 병력 피해를 입었으니 꽤 비싼 대가를 치른 테스트였지만 성과는 있었다.
“어린 녀석이 제법이던데, 어쩌면 베잘리우스 대공 이후로 최강의 돌파력을 자랑하는 군대가 탄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뿌듯하겠군, 쥬르덴 후작.”
륭겐 후작이 끼어 들어서 활기차게 한 마디 했다.
쥬르덴 후작은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어쨌거나 패전의 책임이 있음에도 제 아들을 좋게 봐주신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오. 그런데 그것보다는 더 중요한 급보가 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문제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오.”
그 말에 륭겐 후작도 입을 다물곤 다시 카르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를 대신하여 할슈타인 후작이 말했다.
“카이슨 후작을 통해 온 보고에 따르면 일부 적이 아국 본토로 침공하여 초원지대에 거주 중인 유목민족 부락을 무차별로 습격하고 있다고 하오.”
“일부의 적이라……. 들어본 것 같은데.”
륭겐 후작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