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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군세를 이끌고 진군 중인 라엘이 애를 먹기 시작한 건 레던 왕국령에 들어선 지 열흘이 지났을 무렵부터였다.
5만 규모의 혼트 제국군 기병대가 출진했다는 소식은 레던 왕실을 통해 미리 전해 들었다.
물론 그 정도로 겁을 먹을 라엘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주춤거리면 우리 오리엔 왕국의 체면 문제다. 상관하지 말고 전진해라.”
레던 왕국은 여러 전투에서 혼트 제국군을 상대로 분전을 펼쳤다고 들었다. 그런데 원군으로 나선 자신들이 겨우 적 기병 5만에게 굴복당한다면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5만 기병이 습격해온다면 그들을 상대로 첫 전과를 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을 당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트 제국군의 5만 기병이 후방에서 나타나 습격을 가한 것이다.
촤촤촤ㅤㅊㅘㄱ―
“아악!”
“적습이다!”
뒤에서 불쑥 들이닥친 5만 기병이 일제히 화살을 쏘자 오리엔 왕실군이 잇달아 쓰러졌다.
“뒤에서?”
라엘은 깜짝 놀랐다.
방심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방심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
라엘은 진군하면서 열심히 주변을 정찰했다. 접근하는 적을 사전에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상당히 넓은 범위를 순찰했기 때문에 예상 못한 적습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5만 기병은 일반 기병이 아니라 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족 전사들이었다.
라엘이 펼친 넓은 정찰 범위에 들어서지 않고 크게 우회한 뒤, 후방에서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엄청난 기동력을 지닌 유목민족이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진군하던 오리엔 왕실군은 이미 지나온 후방은 전방이나 좌우 측면 방면보다 정찰이 소홀했기 때문에 그 맹점을 공략 당했다.
“이쪽도 응사해라!”
라엘은 급히 궁병을 후방에 배치하여 적들에게 궁시를 했다. 대처가 빨랐기 때문에 혼트 제국군은 더는 공방을 벌이지 않고 후퇴했다.
‘직접 공격을 하지 않고 물러서는군.’
만약 5만 기병이 그대로 돌격해왔다면 오리엔 왕실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후방에서 돌격해오는 기병대의 공격에 맞설 만한 대형을 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들은 쉽사리 물러섰다.
돌격하면 그들 또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싸움에 있어서 아군의 피해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걸 피했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를 감수하지 않아도 우리를 타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이 건방진 놈들이.’
라엘은 부아가 치밀었다.
라엘 브리튼 자작.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이자 차기 후계자로 유력시 되고 있는 전도유망한 인재. 젊은 나이에 오러 엑스퍼트 상급에 이른 무위는 물론이고 정치 외교 전반에 걸쳐 두루 재능을 드러낸 천재.
그런 라엘이기에 상대에게 얕보인 적은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라엘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정찰범위를 더욱 넓히고 후방까지 주의 깊게 살피게 했다. 뿐만 아니라 기병대를 좌우익에 배치하여 어느 쪽에서 적이 출현하든 달려가 타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만반의 태세를 갖춰놓고 진군을 계속하니, 강화된 정찰만큼이나 진군속도가 늦춰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목표는 레던 왕실 측과 합류하는 것이다. 날파리처럼 귀찮게 하는 놈들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지.’
빠른 기동력을 무기로 괴롭히려 드는 적을 쳐부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도리어 적에게 말려드는 것이라고 라엘은 판단했다.
뒤쫓는다고 따라잡힐 놈들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유인작전으로 오리엔 왕실군을 함정에 빠뜨리려 할 터였다.
차라리 놈들이 습격해올 때만 적당히 응전하여 쫓아내면서 계속 갈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라엘은 흔들림 없이 진군을 계속했다.
혼트 제국군 기병대는 승냥이처럼 이쪽저쪽에서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며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를 노렸다.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오리엔 왕실군은 전투태세를 갖췄는데, 수시로 모습만 드러냈다가 사라지자 라엘은 이것 또한 도발의 일환에 속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계속 우릴 긴장시켜서 지치게 만들 속셈이구나.’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적장이 누구지? 카르스 황제가 선택한 인물 중에 5만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받은 자라면 예사내기가 아닐 텐데.’
***
“계속 목적지로 진군하기로 결심을 굳혔나 본데. 현명한 선택을 한 걸 보니 제법 뚝심이 있는데?”
혼트 제국군의 5만 기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아주 젊은 청년이었다.
바로 니젤 쥬르덴.
쥬르덴 후작의 장남이었다.
지난번 평원에서 후퇴하는 뮤트 공작가 군대를 크게 격파한 공적을 세운 니젤은 카르스 황제의 눈에 드는 데 성공하였다.
오리엔 왕실의 원군이 레던 왕국령에 진입했다는 첩보가 알려지자, 황제는 륭겐 후작 군단과 쥬르덴 후작 군단에서 각각 3만, 2만의 기병대를 차출하였고, 그 지휘관으로는 니젤이 임명되었다. 지난번의 공적으로 황제는 니젤이 기병 지휘에 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적을 세웠고 쥬르덴 후작의 장남이라는 배경도 있다고는 하나, 20대 초반에 불과한 니젤이 5만이라는 큰 병력의 지휘관이 된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아주 좋은 기회다.’
니젤은 전율했다.
5만이라는 병력은 일개 군단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이번에 다시 공적을 세운다면 단숨에 아버지 쥬르덴 후작과 같은 군단 사령관급으로 승진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황제의 측근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으리라!
상대는 역시나 젊은 나이인 라엘 브리튼 자작.
무예에 재능이 있고 어린 나이부터 주목받은 점은 니젤과 비슷하지만, 사실 두 사람은 그 주목도와 비중이 달랐다.
사실상 오리엔 왕국의 2인자인 브리튼 공작의 아들이며, 아버지와 비슷한 만능천재로서 라엘은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오리엔 왕실 정치에도 많은 관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니젤 또한 쥬르덴 후작의 아들이긴 하나, 라엘과 비교했을 때 태생적으로 보다 유리한 출발선상에 섰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애당초 쥬르덴 후작이 황제의 측근으로 떠오른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니젤은 라엘에게 살짝 질투심이 들었다.
“좋은 먹잇감이다.”
니젤은 히죽 웃었다.
브리튼 공작가의 후계자로 서서히 굳혀지고 있는 라엘. 장차 오리엔 왕국의 정치계를 짊어질 것이라는 저 젊은 지휘관을 쓰러뜨린다면, 그 명성은 고스란히 니젤의 것이 된다.
오리엔 왕국의 미래를 쓰러뜨린 혼트 제국의 미래! 그쯤 되는 타이틀을 얻어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점을 감안하여서 황제가 니젤에게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발인 측근멤버에 새로운 젊은 인재를 수급하기 위하여 말이다.
‘기병대를 좌우익에 배치했군. 기병으로 빠르게 우리를 쫓아내 공격당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말이지. 그렇다면…….’
니젤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의 5만 기병은 오리엔 왕실군의 정찰망에 포착되었다. 이윽고 오리엔 왕실군의 좌우익 기병대가 대응하러 달려왔다.
“사격 준비!”
유목민족 전사들로 구성된 5만 기병은 일제히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걸어 당겼다.
“목표는 적 기병대다.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화살세례가 응전하러 나온 기병대에게 쏟아졌다. 기병대는 방패로 화살을 막았으나 얼마간의 병력소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공격한다. 접근은 허용하지 말고 돌팔매로 공격하라!”
니젤은 오리엔 왕실의 기병대를 유목민족 특유의 돌팔매 공격으로 괴롭혔다. 요리조리 얄밉게 피해 다니며 접근전은 하지 않고 멀리서 돌만 날리는 약아빠진 전술이었다.
하지만 오리엔 왕실군은 곧 기병대를 돌아오게 했다.
기병대를 쫓아 다가가니, 오리엔 왕실군은 이미 궁병을 전면에 배치시킨 상태였다.
“발사!”
라엘의 명령에 오리엔 왕실군의 궁병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가까이 접근했다가 기병 수십 명이 화살에 맞아 낙마하였다. 니젤은 재빨리 궁시범위 밖으로 물러섰다.
‘기병대를 먼저 보내 시간을 버는 사이에 궁병을 배치해 응사하는 전술이군.’
니젤은 라엘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전술의 파훼시킬 방법 또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