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이곳까지 진격하면서 체력이 많이 빠진 혼트 제국군은 쌓인 피로만큼이나 악도 쌓여서 거칠게 덤벼들고 있었다. 산악지형이라는 이점을 철저히 이용하며 괴롭혀온 리간드 영지군에 대하여 분노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리간드 영지군 또한 상대방에게 유감이 많았다.
“서쪽의 거지새끼들!”
“쫄쫄 굶주리던 놈들이 뭐 주워 먹으려고 여기까지 와서는!”
“우리 영지를 반드시 지킬 거다!”
“강도떼에게 당할 까보냐!”
명백하게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노리고 온 혼트 제국군에 대하여 리간드 영지군은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난했다가 기껏 좋은 영주 만나 잘 살게 되었는데, 웬 거지같은 놈들이 떼거리로 약탈하러 왔으니 기분이 좋겠는가?
옛날부터 혼트 제국의 열악한 치안과 결여된 도덕성은 전 대륙에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 죽이고 돈 빼앗고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자랑스러워한다는 흉악한 종자들이었다.
그 명성 떨치는 최강의 무인 롬펠 대공마저도 리간드 영지군에게는 강도떼의 수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경우 리간드 영지를 수탈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덤벼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리간드 영지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제 1 요새 못지않게 공들여 설계된 제 2 요새는 계속되는 혼트 제국군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일대 격전.
롬펠 대공 군단을 지휘하는 말버린 자작은 적의 위태로운 부분을 귀신 같이 찾아내 집중공격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리처드 벅과 하딘이 지원하여 막아내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영주대리 베일이 직접 지휘했기 때문에 리간드 영지군의 움직임이 한층 더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기랄!”
말버린 자작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판정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은 이쪽이 총력전을 펼치리라는 걸 알고, 마찬가지로 사력을 다해 방어를 해왔다. 고비만 넘기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었다.
‘이래서 유능한 적장이 싫다.’
말버린 자작은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은 롬펠 대공이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장에서 만난 용맹한 적장은 존경하지만, 똑똑한 적장은 죽이고 싶다고 했었다.
지쳐 있는 병사들을 보며 말버린 자작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군 후퇴!”
롬펠 대공 군단이 썰물처럼 제 2 요새를 눈앞에 두고 후퇴했다.
제 2 요새의 리간드 영지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하하하! 놈들이 도망간다!”
“맛이 어떠냐! 개자식들아!”
“별거 아니네!”
요새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를 들이며 말버린 자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날 이후로 후퇴한 롬펠 대공 군단은 대대적인 휴식을 가졌다. 물론 휴식은 병사들의 몫일 뿐, 말버린 자작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이 산속까지 군량을 보급하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워낙 지형이 험하다 보니 짐마차가 다닐 길을 찾기 힘들었다.
‘제대로 된 보급로를 찾지 못하면 곤란하다.’
짐마차가 다닐 길을 찾아내지 못하면, 병사들이 식량을 실어 날라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병력 상당수를 전투에서 제외하고 보급계로 돌려야 하는 전력 손실이었다.
‘길이 있을 것이다.’
말버린 자작은 확신했다.
제 1 요새와 제 2 요새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제대로 된 보급루트가 없다면 어떻게 농사 짓기도 불가능한 이런 험지에 요새가 세워진단 말인가.
분명 보급로가 존재하고, 리간드 영지군이 의도적으로 은폐시켜놓았다고 말버린 자작은 판단했다.
‘베일 그 자라면 충분히 할 수작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으니까.’
귀족 출신이 아니고 정규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영주대리 베일이라는 자는 지휘 방식이 독특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창의적인 전술은 상대하는 말버린 자작도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승리하면 꼭 얼굴을 보고 싶은 작자로군. 하지만 네 수법에 순순히 넘어가주지 않는다.’
말버린 자작은 수색대를 따로 편성하여서 일대를 들쑤시고 다녔다. 말버린 자작 본인도 직접 이리저리 다니면서 보급루트를 찾아 헤맸다.
사흘이 지났을 때, 마침내 말버린 자작은 성과를 얻었다.
“하하, 영악한 놈.”
말버린 자작은 쓰러진 나무와 바위, 덤불로 숨겨져 있었던 길을 보면서 웃었다. 분명 제 1 요새를 불 지르고 후퇴하면서 이런 짓을 해놓은 게 분명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치밀하게 준비한 리간드 영지군의 전략이 놀라웠다.
그리고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 스스로에게 성취감이 들었다.
“좋다. 어디 실컷 보여줘 봐라. 너희가 준비한 것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나는 승리를 누리겠다.”
찾아낸 루트로 군수물자를 옮기면서 롬펠 대공 군단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술을 보급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휴식을 취한 지 8일이 지났을 때, 말버린 자작은 다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이제 놈들에게 지옥을 보여줄 차례다. 한 치도 물러서지 말고 공격한다. 우리의 발걸음이 멈출 자리는 바로 저 요새다!”
“옛―!”
“돌격!”
“와아아아아―!!”
말버린 자작의 독려를 받은 롬펠 대공 군단의 돌격병들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말버린 자작은 작심을 했는지 전투 현장에 가까이 나가서 직접 지휘했다. 그래서인지 롬펠 대공 군단의 공격이 얼마 전의 총력전보다 더 기세가 사나웠다.
한편, 이를 본 베일은 적의 기세를 죽이려면 말버린 자작을 물러서게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궁병부대는 적 지휘관을 조준해라.”
백여 명의 궁병이 일제히 말버린 자작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백여 발의 화살이 말버린 자작에게 쏟아지자 주변에 있던 롬펠 대공 군단의 병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자작님! 위험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아우성치는 병사들을 보며 말버린 자작은 코웃음을 쳤다.
“뭐가 그리 겁나느냐! 이깟 화살!”
그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말버린 자작은 지휘관이기 전에 롬펠 대공에게 사사 받은 오러 엑스퍼트의 무인이기도 했다.
파파파팟!
검에 실린 오러가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화살을 모조리 튕겨냈다.
“와아아아!”
“말버린 자작님이!”
병사들은 경탄했다.
말버린 자작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봤느냐? 적의 공격 따위 겁날 게 없다! 계속 공격해라!”
충분한 휴식으로 사기가 오른 롬펠 대공 군단은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목책을 기어 올라오는 돌격병들과 악전고투를 치르느라 리간드 영지군의 피해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전투가 재개된 지 사흘째에 접어들었을 때, 바우텔 자작이 말했다.
“이제 슬슬 물러설 때가 되지 않았나?”
“으음…….”
베일의 얼굴에는 고민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역시 후퇴할지 말지 갈등하고 있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바우텔 자작은 웃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냥 물러서자니 적에게 호쾌한 승리를 주기는 싫고, 계속 싸우자니 아군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고. 그게 갈등되겠지?”
베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냥 물러서 주기가 싫습니다.”
“전투 현장에 직접 나와서 지휘하는 적장의 모습에 자극을 받은 걸세. 그 때문에 적들이 사기가 올라 기세 좋게 덤비니,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겠지.”
“맞습니다.”
화살로 집중사격 했더니 그걸 모조리 쳐내며 도리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 말버린 자작.
베일은 그 때문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무언가 크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욕심!
“하지만 자네는 충분히 저들을 곤란하게 했네. 제 2 요새에서 충분히 오랜 시간 버텼고. 제 1 요새 함락까지 너무 진행이 빨라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다소 만회했으니, 놈들 역시 약이 바짝 오르지 않았겠는가.”
“자작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후퇴하지요.”
“잘 생각했네.”
그렇게 리간드 영지군은 제 2 요새를 버리고 후퇴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경비대 부대장 렉스가 찾아와 제안을 했다.
“후퇴할 때 불을 한 번 더 질러보면 안 될까요?”
“불을? 하지만 제 2 요새는 지난번과 달리 화계가 준비되지 않은…….”
베일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 영주대리의 반응에 렉스는 씨익 웃었다.
“한 번 크게 데인 놈들이니 작은 불만 봐도 기절초풍 하지 않겠습니까?”
렉스의 소소한 작전은 채택되었다.
시간이 경과하여 해질 무렵이 되었을 때, 리간드 영지군은 전격적인 후퇴를 개시하였다.
“됐다! 요새를 함락해라!”
말버린 자작이 기뻐 소리쳤다. 돌격병은 물론이고 창병과 궁병 등 전 병력이 요새로 진격했다. 승리가 눈앞이었다.
그런데 그때, 요새의 목책 여러 곳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고 말버린 자작은 깜짝 놀랐다.
“불?”
‘설마 이번에도?’
불안한 마음에 말버린 자작은 즉각 공격을 중단시켰다.
“정지! 공격을 멈추고 물러서라!”
롬펠 대공 군단이 잠시 물러난 덕분에 리간드 영지군은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다.
잠시 후에야 말버린 자작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약아빠진 적의 소소한 속임수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됐다. 달아나는 적들은 그냥 놔둬라. 요새를 점령하고 화재를 진압해라.”
“옛!”
제 2 요새는 그렇게 롬펠 대공 군단의 수중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