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8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좋다. 내가 라엘 브리튼 자작을 아주 중대한 손님처럼 대하겠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저는 당장이라도 오리엔 왕실 원군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내 말에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그렇게 결론은 내려졌다. 나는 책략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도 오리엔 왕실의 원군을 도우러 가기로 했다.
생각해봐라.
일국의 재상이며, 대정령사로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진 내가 직접 날아가 라엘 브리튼 자작을 마중 나온다.
라엘에게 국가 군주 급의 대우를 해주어서 오리엔 국왕의 오해를 사게 만드는 일은 이걸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전생 시절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참고가 될 만한 부분이 많았다.
전생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오리엔 국왕이 죽고서 브리튼 공작가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어 독주체제를 이루어 오리엔 왕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가문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브리튼 공작가의 성세를 이룬 것은 멋대로 국정을 종횡하려 하지 않고 충신으로서 오리엔 국왕을 떠받든 브리튼 공작의 태도였다.
어떠한 야심도 없이 충성스럽게 왕명을 수행한 브리튼 공작의 인품이 의심 많은 오리엔 국왕의 신뢰를 이끈 것이다. 그로 인하여 브리튼 공작가는 엄청난 대가문이 되었고 말이다.
뭐, 그 시절에 ‘오리엔의 마지막 장벽’이라 불렸던 제론이 제대로 권력에 욕심을 냈더라면 얘기가 달라졌을 테지만, 저 녀석은 전생 때나 지금이나 일관적으로 의욕이 없다.
카르스 황제를 막아냈다는 업적을 세워놓고도 그냥 일찍 은퇴해 정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괘씸한 소리로 날 약 올렸던 복수를 해야겠군. 뭐? 세렌스 공주를 셋째 부인으로? 저 자식을 그냥!
에릭 국왕의 집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어스 핸드로 제론의 다리를 걸었다.
“으악!”
제론은 우당탕 요란을 떨며 넘어졌다.
“하하하. 조심하라, 군사부상서.”
오러 엑스퍼트인 에릭 국왕은 제론이 왜 넘어졌는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유쾌하게 웃었다.
제론도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날 노려보았다. 뭘 봐? 나는 모른 척 그곳을 빠져나가버렸다.
***
가족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 오리엔 왕실 원군을 도우러 간다는 말을 꺼냈다. 역시나 아내들이 불만을 표했다. 시스는 걱정하는 얼굴이었고, 줄리아는 왜 또 나 혼자 싸우러 가는 거냐고 성화였다.
뮤트 공작령에서 싸웠던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다고 아내들을 납득시키고, 대충 떠날 채비를 마쳤다.
뭐, 사실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다.
그냥 가방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육포와 건량, 모포와 책 한 권을 챙겼을 뿐이었다. 운디네가 있기 때문에 갈아입을 옷가지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상당히 오랜 기간 같은 옷만 입은 것 같네. 예전에 카르스 황제한테 선물 받은 레드 미스릴 코트 역시 지금도 여전히 입고 있고. 온도 조절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사시사철 입을 수 있거든. 그 때문인지 이제 이 코트는 내 상징과도 같아졌다.
얼마 전에는 붉은색 계열 코트가 유행했었는데 귀족들이 나를 따라했다는 소문이었다. 훗, 역시 내가 워낙 잘생겼다 보니 다들 따라하고 싶어 하는…….
……아무튼 채비를 마친 뒤에 에릭 국왕에게 보고를 하고 길을 떠났다.
실프의 힘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가도 되지만, 장거리 비행이다 보니 나는 그보다 더 쾌적하게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그란 흙집을 한 채 지었다. 안에 침상과 흔들의자를 놓으니 그럭저럭 아담한 집이 되었다.
챙겨온 모포를 흙으로 만든 침상 위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책을 펼쳤다.
“출발하자.”
흙집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날기 시작했다.
흙집을 띄우느라 소비된 정령친화력은 한숨 자면 회복될 정도였기에 부담이 없었다.
시간을 때우려고 가져온 책은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의 전쟁을 분석한 군사서적이었다. 저자가 지나치게 개입해 자신의 윤리관을 피력하고 있어서 좀 짜증나긴 했지만, 베잘리우스 대공의 전략·전술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카르스 황제의 심중을 알기 위해서는 황제가 본받고자 하는 베잘리우스 대공에 대해 보다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시간 때우기인데 어떤가? 도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일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가볍게 읽어보면서 베잘리우스 대공의 대략적인 행보를 파악했다.
카르스 황제와 베잘리우스 대공의 공통점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전쟁에 활용한다는 점과 장기적인 비전이 현실적이라는 점이었다.
큰 전략의 테두리도 비슷했다. 바덴 강을 장악하여 군수물자보급의 중심지로 삼고 대륙 패권 장악에 나서는 방향성. 카르스 황제는 분명 바덴 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야 비로소 오리엔 왕국 본토로 진격할 터였다.
분화된 적 세력이 서로 협조하지 못하게 공작한 후에 각각 격파해나가려 하는 의도 또한 비슷했다. 베잘리우스 대공은 당시 오리엔 제국이 수도 귀족 세력과 레던 지방 귀족 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당시 혼트 왕국은 국력이 나약했으므로 오리엔 제국은 방심하여 서로 힘을 합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카르스 황제는 분열책에 실패했다. 레던 왕실, 육제후, 오리엔 왕실을 분열시킨 후에 하나씩 치고자 했으나, 우리는 혼트 제국군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을 맺고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다만 카르스 황제 또한 완전한 실패라고 보기 어려운 것은, 육제후 중 린델 백작가와 안타레스 백작가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점이었다. 재력이 막강한 두 가문의 협력으로 혼트 제국군은 원활한 전쟁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리엔 왕실도 우리를 전력으로 도우려 하지는 않고 있고 말이다.
“흐음……, 그렇다면 카르스 황제는 오리엔 왕실이 경각심을 느끼고 전력으로 우리를 돕게 하지 않을 건데…….”
현재 전쟁은 혼트 제국군의 우세였으나, 우리의 저항도 예상보다 강했기에 쉽게 패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엔 국왕이 작심하고 전력을 다해 참전한다면 혼트 제국군은 밀리게 된다.
비록 베잘리우스 대공은 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싸워서 늘 이겼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지 베잘리우스 대공이 자신의 역량을 과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카르스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한, 일부러 불리한 여건에서 싸우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한 말이다.
“이상하게 이 부분이 걸리네.”
나는 문득 무언가 실마리를 얻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힌트를 본 것 같은데, 그 힌트가 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 답답해!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 봐도 생각이 구체화되지 않고 애매한 느낌만 가슴에 맴돌았다. 아주 좋은 꿈을 꿨는데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듯한 그런 답답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 대목에서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일까? 며칠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제론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지 아마?
전 영토가 혼트 제국군의 공격권에 놓여 있다.
황제가 취할 전략이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너무 편해진다.
이 대목에서 난 뭔가가 떠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