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487화 (487/529)

<-- 487 회: 경영의 대가 19권 -->

다음날 회의에서 루이는 어제 내게 말한 바 있었던 책략을 개진했다.

“혼트 제국과 우리의 전쟁을 관망하며 이득을 얻으려는 오리엔 왕실의 음모를 막을 수 있는 책략이 있습니다. 의도가 성공한다면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 될 겁니다.”

“그런 책략이 있나? 그렇다면 어서 말해보아라.”

크게 관심을 가진 에릭 국왕이 채근했다.

루이가 말했다.

“이는 권력에 예민한 오리엔 국왕의 성향을 자극하는 방법입니다.”

오리엔 국왕은 주요 귀족 세력을 전부 말살하고서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한 군주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쭉 지켜보면 얼마나 왕권 강화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다.

국사(國事)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브리튼 공작과 레이몬드 후작 두 사람의 최측근과 사적으로 상의한 후에 내리는 통치방식 또한 왕권강화의 한 일환이었다. 다른 대소신료가 반대가 자신의 의견을 따로 개진할 여지도 없이 원하는 판단을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폭군의 성향이 농후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오리엔 왕국이 잘 굴러가는 것은 그를 보좌하는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과 브리튼 공작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존재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리엔 왕실의 강력한 권위는 브리튼 공작가와의 긴밀한 연대(連帶)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파고들 점이 생깁니다.”

루이가 이어 설명했다.

“오리엔 왕실과 브리튼 공작가.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할까요?”

그 질문에 다들 쉽사리 대답을 못했다.

“흐음, 잘 모르겠군. 외교부상서,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릭 국왕이 헤이젤 듀론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외교부상서라는 지위 특성상 오리엔 왕국의 사정에 가장 밝은 인물이었다.

“폐하께서 쉽사리 대답을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단순하게 따진다면야 당연히 오리엔 왕실의 파워가 우위에 있습니다만, 사실 오리엔 왕실과 브리튼 공작가는 서로를 떼어놓고 힘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헤이젤 듀론 자작이 말했다.

“오리엔 국왕이 다져놓은 절대왕권은 이를 수족처럼 움직여준 브리튼 공작가의 충성에 기반을 둔 면이 많고, 브리튼 공작가 또한 왕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기에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긴밀한 공조가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기에, 최근에는 세렌스 공주를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 라엘 경에게 시집보낼 계획이라는 얘기도 생기고 있습니다.”

“호오, 세렌스 공주를 라엘 브리튼 자작과?”

“예. 보다 깊은 신뢰관계를 쌓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세렌스 공주는 대외활동을 좋아하지 않고, 얼마 전에 정령술을 익힌 뒤로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드물어져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습니다. 신뢰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되, 너무 큰 권력은 주지 않는 용도로 딱 적절한 혼담 소재지요.”

하하하.

나는 세렌스 공주에게 정령술을 가르쳐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와 계약한 바람의 정령은 세렌스 공주의 속마음을 멋대로 시끄럽게 떠벌리는 이상한 새였지?

정령사가 된 후로 그 재미있는 새와 노느라 외부활동이 더욱 뜸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의외였다.

전생 시절을 보면, 세렌스 공주는 이름 모를 귀족과 혼인했다. 아마도 너무 강력한 외척을 만들지 않겠다는 오리엔 국왕의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귀족가문 중의 귀족가문인 브리튼 공작가에 시집보내다니?

“아직 공론화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가 오리엔 왕국을 다녀와 보니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라엘 경이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귀환하면 포상의 개념으로 부마로 임명할 모양입니다.”

전생과 현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그것이 오리엔 국왕이 그리고 있는 그림의 크기가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전생 시절엔 카르스 황제가 대륙의 절반을 먹어치워 버린 시기였다. 이에 압도당한 오리엔 국왕은 외부팽창보다 내부결속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혼트 제국과 우리의 전쟁을 통해 어부지리를 노리려 하고 있다. 이 기회에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겠다는 야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그런 원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브리튼 공작가의 협조가 필수적이기에 세렌스 공주를 주어서 더 신뢰관계를 강화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루이의 책략은 바로 이것을 막는 데에 핵심이 있었다.

오리엔 국왕을 살짝 흔들어 타이밍을 놓치게 만드는 것. 예전에 에릭 국왕의 왕위계승내전 때 너무 뒤늦게 개입하는 바람에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말했잖은가.

오리엔 국왕 그 아저씨는 타이밍을 그리 잘 잡는 사람이 아니라고.

“전에는 재상을 빼앗기 위해 세렌스 공주를 써먹으려 하더니, 참 생각이 수시로 바뀌는 사람이로군.”

에릭 국왕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 큰일 날 뻔했지.

하마터면 꼼짝 없이 오리엔 왕실의 데릴사위가 될 뻔했으니 말이다. 라엘 브리튼 자작과 혼인시킨다니, 이제 그녀의 혼사 문제에 내 이름은 언급될 일이 없겠군.

루이가 말했다.

“외교부상서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오리엔 왕실과 브리튼 공작가의 신뢰가 건재할 때, 오리엔 왕국은 적극적으로 대외행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브리튼 공작가는 왕권을 위협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오리엔 왕실 또한 브리튼 공작가를 견제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지요. 서로를 견제하는 모양새가 되는 순간, 공조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살짝 흠집만 내도 오리엔 왕국은 거기에 정신 팔려 국외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되겠군.”

듣고 있던 제론이 핵심을 짚었다.

거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제론 녀석은 한 마디 더 했다.

“재상 각하께서 세렌스 공주를 다시 꼬셔보심은 어떠십니까? 대정령사로서 신비적인 명성을 쌓으신 지금이라면 세렌스 공주를 세 번째 부인으로 요구해 라엘 경과의 혼담을 파토 낼 수 있겠는데요.”

저, 저 새끼가?!

날 놀린 후에 비열하게 히죽 웃는 제론을 보며, 나는 울컥하여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릭 국왕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핫! 재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군사부상서의 제안이.”

“폐하……. 저 역시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외부의 일에 신경 쓸 수가 없게 되므로…….”

루이를 제외한 모두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 혼담이 오가면 대노한 두 아내에게 시달리느라 제대로 일을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 간단한 일입니다.”

루이의 말에 분위기가 다시 진지해졌다.

“원군을 이끌고 온 라엘 브리튼 자작에게 국왕 급의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오리엔 국왕이 직접 온 것처럼 환대하라는 뜻이냐?”

에릭 국왕이 물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재상 각하께서 직접 가셔서 원군이 무사히 올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국왕 폐하께서 직접 나가 영접(迎接)합니다. 환영 연회를 열어서 라엘 브리튼 자작을 국왕 폐하와 동석에 앉게 합니다. 양국 간의 중요한 문제를 마치 국왕 간의 회담처럼 그와 상의합니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오리엔 국왕의 귀에도 들어가겠지요.”

“그렇군! 브리튼 공작의 삼남에 불과한 자가 오리엔 왕국의 대표자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알면, 오리엔 국왕에게 브리튼 공작가에 대한 경계심이 생기겠군. 정말 멋진 책략이다!”

에릭 국왕은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루이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효과가 오래 갈 책략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가 있으니 브리튼 공작은 곧 오리엔 국왕의 오해를 풀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장 전쟁 직후에 예정했던 세렌스 공주와 라엘 경의 혼담만 취소되어도 이 책략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혼담이 깨지면, 그것은 오리엔 왕실과 브리튼 공작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뚜렷한 징후가 된다.

사소한 문제로 끝난다 해도 외부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오리엔 국왕은 대륙 패권보다 우선적으로 브리튼 공작가와의 문제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왕권에 집착하는 오리엔 국왕에게 적이 되면 가장 무서운 존재가 브리튼 공작가이기 때문이다.

“다시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한 후에는, 이미 전쟁은 끝나고 우리는 전후 수습을 다 마친 뒤가 되겠군.”

“예, 폐하.”

에릭 국왕은 빙그레 웃었다.

“좋다. 내가 라엘 브리튼 자작을 아주 중대한 손님처럼 대하겠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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