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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485화 (485/529)

<-- 485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지스도 지렌 왕자도 실프가 없으니까 노는 게 재미없어졌는지 꾸벅꾸벅 졸던데요. 그리고 남편이 심각하게 영주들에게 성토하고 돌아가 버렸는데 저희가 무슨 재미로 남아서 놀겠어요?”

“에구, 그랬구나.”

나는 줄리아와 시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두 여자는 머리를 살짝 내 쪽으로 숙여서 쓰다듬기 좋게 했다. 아이처럼 내가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들.

으음, 내가 정령들 다루는 데 익숙해져서 습관적으로 애들 대하듯 하다 보니, 아내들도 점점 어리광이 많아지는 기분이다. 사실 그래서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함께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이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땠어? 이 남편님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줄리아가 옆에 매달려서 애교를 부렸다.

“여보는 어쩜 그렇게 말을 잘 해요?”

“흐흐, 아직 몰랐니? 내가 입 하나로 먹고 살잖니. 재상도 요걸로 됐고.”

“꺄하하, 그게 뭐예요.”

“그래서 내가 일찍 은퇴하려 하는 거야. 입으로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흥, 글쎄요. 제가 보기에 여보의 입은 한계가 없어서 괜찮은 것 같은데요? 게다가 어차피 귀찮은 일은 다 아랫사람한테 떠넘기면서. 콘체른 자작에게 은근슬쩍 이런저런 업무 넘기고 있는 걸 모를 줄 알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일찍 하야해야지. 루이에게 미안해서라도 빨리 자리를 양보하는 게 도리 아니겠어?”

“에잇, 됐어요. 계속 말 섞어봤자 또 그 말발에 휘말릴 뿐이지. 은퇴는 마흔 이후라고 제가 딱 못 박았으니 그리 아세요.”

“쳇…….”

나는 혀를 차며 실망했다.

하지만 그건 줄리아에게 보여주기 위한 표정일 뿐. 나는 이미 조기은퇴계획을 척척 실행하고 있었다.

현재 레던 왕실의 내부 상황을 보면 재상부의 업무 상당량을 재정부상서인 루이가 도맡아 처리하는 ‘재상 대행 체제’에 가까웠다.

전시 행정체계인 ‘기동행정’의 발안자가 루이라는 점을 이용해 나는 일부러 루이를 행정의 중심에 놓고 재상업무를 마구 떠넘긴 것이다.

어차피 얼마 전에 뮤트 공작가를 구원하러 갔던 것처럼 전쟁 중에는 내가 상급 정령사로서 활약할 일이 많다. 그러니 일반 탁상업무는 ‘임시’로 루이에게 맡긴다는 개념이었다.

흐흐흐, 물론 ‘임시’가 아니지.

앞으로 내가 마흔 살이 되어 은퇴할 때까지 계속 지금의 체계를 유지할 생각이거든. 감투만 아직 쓰고 있을 뿐 실질적인 재상은 루이라는 뜻이다. 난 편해서 좋고 루이도 원하던 대로 가장 비중 있는 국가업무를 하게 되어서 좋고 일석이조 아닌가.

이는 왕실에서 나를 터치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다. 간혹 나의 게으름을 문제 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대꾸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또 있다.

바로 내가 정령사라는 점.

원래 정령사라는 족속이 조직사회에 얽매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나 또한 그런 정령사치고는 꽤나 노력하고 있는 편이니 감안해달라는 것이다.

하기야, 정말로 나만큼 열심히 일하고 사회성 밝은 정령사도 없을 것이다. 나도 다른 정령사들처럼 조용한 곳에서 안빈낙도하고 싶단 말이다.

아무튼 루이가 내 업무를 대행하는 까닭에 재상부와 재정부의 업무 보고 체계가 혼선이 빚고 두 부서의 경계가 살짝 모호해진 감이 없지 않다.

뭐, 그딴 거 알게 뭐냐.

그런 것쯤은 업무 귀신인 루이가 정식으로 재상이 되면 하루 만에 정리해버릴 수 있는 정도의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후에 누가 루이의 뒤를 이어 재정부상서가 되든 지금의 루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갖진 못한다는 뜻이다.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나와 루이의 관계가 특별할 뿐이니까. 장담하는데, 내가 나가고 루이가 재상이 되면 왕실행정은 1개월 만에 칼 같은 정확함과 신속함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내가 이런 쪽으로는 참 모략을 잘 꾸미는 것 같아, 아하하.

***

다음날.

부름을 받아서 에릭 국왕의 임시 집무실로 가보니 왕실의 핵심 멤버가 모여 있었다. 원군 파견을 촉구하기 위해 오리엔 왕국으로 갔었던 외교부상서 헤이젤 듀론 자작도 보였다.

헤이젤 듀론 자작이 돌아왔다는 뜻은, 즉 오리엔 왕실에서 파견한 원군에 대한 일로 불렀나보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에릭 국왕에게 인사를 했다. 나를 본 에릭 국왕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서 와라. 어제의 이야기는 들었다. 또 명연설로 많은 영주들을 감동시켰다지? 하하하.”

무슨 감동씩이나.

나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덕분에 당분간은 영주들을 통솔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겠더군. 싸움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겼으니까.”

이전까지 영주들의 태도는 사실 조금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전쟁의 승리보다는 이 전쟁에서 자기 영지의 군대를 최대한 잃지 않고 보존하는데 더 신경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손해를 안 보려 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하니, 에릭 국왕의 통솔도 따르는 둥 마는 둥 미적거리는 것이다.

충성스러운 왕실파 영주는 에릭 국왕을 잘 따르지만, 육제후파였던 이들은 은근히 반대의견을 내며 제동을 걸기 일쑤였고, 중립파도 자기 일이 아닌 양 제 3자 같은 태도로 방관해왔다.

그랬던 상황에서 어제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과 친분을 다진 것은 좋은 결과였다.

대표적인 중립가문인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표로 참전한 로펠이 내게 협조적이게 되었으니, 다른 중립 영주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나저나, 오리엔 왕실의 원군 문제입니까?”

나는 화제를 돌려서 묻자 에릭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이젤 듀론 자작을 응시했다.

헤이젤 듀론 자작이 입을 열었다.

“오리엔 왕실에 원군 파병을 촉구할 결과, 1차 원군으로 소집된 군대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 먼저 돌아왔습니다.”

“오리엔 왕국 방면의 국경에서 보고를 받았다. 오리엔 왕실의 원군이 국경을 넘어 진입했다더군. 그런데 이와 함께 혼트 제국군의 동태를 정탐하던 첩보망에서도 오늘 아침에 막 보고가 왔더군.”

“카르스 황제가 움직였습니까?”

내 물음에 에릭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5만여 명으로 이루어진 기병대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하였다.”

“기병대 5만…… 유목민족이군요.”

“그렇다. 오리엔 왕실의 원군을 공격할 모양이다. 퇴각시키거나 우리와 합류하기 전에 큰 피해를 입힐 생각이겠지.”

“아마 유목민족 특유의 기습전술을 사용할 테니, 오리엔 왕실 원군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적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군사부상서 제론이 말했다.

안 봐도 뻔하다. 빠른 기동력으로 거침없이 달리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괴롭힐 테지.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1차 원군이라고 했는데, 원군의 규모는 몇이고 지휘관은 누구입니까?”

“병력 규모는 7만이며 지휘관은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 라엘 경입니다. 전황을 주시하면서 2차 원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오리엔 왕실이 대답하였습니다.”

“전황을 주시한다? 상당히 장기간 주시하겠군.”

내 중얼거림에 듀론 자작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엔 왕실이 진심으로 혼트 제국군을 격파하고자 노력한다면, 병력규모는 못해도 20만은 넘어야 하고 지휘관은 오리엔 국왕이 가장 믿는 브리튼 공작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7만에 라엘 브리튼 자작이라…….

어쩌면 적절한 병력규모와 인선이라 볼 수 있다.

오리엔 왕실은 혼트 제국군과 우리가 피 터지게 싸워서 공멸하길 기다렸다가 어부지리를 취할 의도가 있어 보인다.

때문에 일단은 우리 레던 왕실이 쉽게 패배하지 않도록 7만 병력만 보냈다.

그리고 지휘관으로 임명된 라엘은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으로 잠재적으로는 이미 브리튼 공작의 후계자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여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 전황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판단을 오리엔 왕실에 전할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오리엔 왕실은 라엘을 통하여 계속 전국(全局)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되겠다 싶을 때 비로소 전력을 다해 진격해오리라.

어부지리를 위한 진격.

그것이 2차 원군의 정체다.

“이런 와중에도 음흉한 속내를 감추질 않는군요.”

허영과 야심이 많은 오리엔 국왕을 떠올리며 나는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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