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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484화 (484/529)

<-- 484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샐러맨더와 운디네가 음식과 술의 온기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났어도 식은 요리는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이만 연회장에서 퇴장해야 했다. 시스와 줄리아는 더 놀다가 알아서 오겠지.

나는 연회장을 떠났다.

정령의 감각으로 홀 내부를 살피니 다시 웅성웅성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파티가 시작된 모습이었다. 마치 내가 발언을 금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뭔가 자기 의견이 있거든 나한테 얘기를 해보란 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대부분 내 의견에 찬성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황제가 사라지더라도 그 휘하의 다섯 사람이 건재한데 누가 감히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겠나. 중요한 건 카르스 황제 본인이 아니라 그가 제위 직후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위하여 차근차근 구축해놓은 판도였다. 그 판이 깨지지 않는 한 전쟁은 피할 수가 없다.

결국은 대판 붙어서 피를 봐야 끝난다는, 뻔하고 한심한 사례를 또다시 역사서의 한 페이지에 기록해야 한다는 현실에 서글픔마저 느낀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남의 나라를 짓밟은 정복자가 그렇게도 존경스럽단 말인가? 전쟁은 싫다면서 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둔 옛 위인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이중적인 행태가 이제는 지겨웠다.

베잘리우스 대공의 위업에 매료된 나머지 그의 흉내를 내어서 포로를 화형 시키는 짓거리까지 따라하는 혼트 제국의 어리석음도 미웠다. 이 참에 그들이 옳지 못한 선택을 했음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카르스 황제라는 아주 강한 적대자를 넘어서야 하지만, 반드시 해낼 것이다.

“농담 아니고, 정말로 이번 전쟁만 넘기면 전부 그만두고 하야할 테다.”

옛말에 정말 똑똑한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지당하신 말씀이다.

세상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떠다니듯이 살던 전생의 상인 시절이 마음 편하다. 실패한 결혼생활만 아니면 정말 속편하게 잘 살았다고 할 만하지. 지금처럼 위중한 책임도 짊어질 필요 없었고. 내가 이래서 처음부터 왕실에 입관하기를 꺼렸던 거라고.

줄리아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마흔까지는 계속 일하라고 하는데, 좀 봐달란 말이야. 이 남편님 힘든 것 안 보이니? 재상이 뭐 좋은 거라고……. 차라리 아서 형님의 장인인 후디니 자작처럼 땅이 비옥한 영지에서 떵떵거리며 마음 편히 사는 게 제일인데.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을 쉬며 걷고 있을 때였다.

연회장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급히 나온 그는 누구를 찾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나를 발견하고는 내 쪽으로 달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정령의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이었다.

“재상 각하!”

쯧, 저 친구는 또 왜 날 찾는 거야. 아직도 나한테 할 말이 있나? 아무튼 부르니까 돌아봐야지.

“대공자 로펠?”

나는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이곳에 계셨군요.”

“배도 부르고 술도 많이 마셔서 산책을 하고 있었소.”

“말씀 편하게 낮춰주십시오. 예를 갖추시니 도리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럴까?”

“하하, 예, 재상 각하.”

“그런데 내게는 무슨 용무이지? 지금은 내가 피곤한데 혹시 말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면 내일 진지한 토론을 해보는 게 어떨까?”

“그게 아닙니다. 재상 각하께서 일장연설하신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고 제 어리석은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누구 하나 우리 앞에 봉착한 문제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말씀이 크게 저를 흔들었습니다. 미욱한 저를 깨우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아주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로펠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의외로 반성이 빠르군?”

내 물음에 로펠은 넉살도 좋게 씨익 웃었다.

“제가 가진 유일한 장점입니다. 워낙 반성이 빨라서 매를 맞은 일이 없었거든요.”

“그 정도면 정말 전광석화 같은 반성이군.”

“물론입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 저를 혼내려고 회초리를 준비하셨다가 제가 냉큼 달려와 용서를 비는 바람에 처벌할 타이밍을 잃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용서하시면서 ‘넌 크게 될 놈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하하하.”

“과연…….”

아카라스 백작령 인근에서 왜 대공자 로펠을 전도유망한 인재라고 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렇듯 자기반성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은 남의 말에도 잘 귀 기울일 줄을 아는 법이었다. 적어도 어리석은 통치자는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아카라스 백작은 일찌감치 로펠을 후계자로 확정지은 것이리라.

굳이 고집스럽게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순수한 로펠의 태도가 나는 퍽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맙다. 우리 악수나 하지.”

나는 손을 내밀었다.

“정말 영광입니다.”

로펠은 얼른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악수를 하면서 내가 말했다.

“나도 내 말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자네가 떠올렸던 발상과 비슷한 문제로 나도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왔으니까.”

“제 생각에 재상 각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무조건 옳았습니다.”

“물론 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지.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패망한 조국을 보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

“차라리 무슨 수단을 쓰든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는 해결하고 봐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그때는 떠오를지도 모르지.”

내 말에 로펠은 잠시 고민에 빠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말씀에도 일리는 있지만,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살이라면, 그래도 옳다고 믿는 길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세상이 요지경이라 그게 옳지 않은 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땐 ‘아 젠장’ 하고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요. 운명이 그런 걸 어쩔 수 없잖습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엔 네 말이 옳군. 방금 전까지 황제 암살을 주장한 사람답지 않은 의견이야.”

“하하, 그렇지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반성이 신속하다고요.”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로펠이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과연, 왜 연회에서 많은 영주들 무리에서 주인공이 되어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군. 앞으로도 왕실의 승리를 위해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이 전쟁은 모두가 당사자인 걸요.”

“배우는 것도 빠르군.”

“하하, 그런가요?”

그렇게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과 사이가 좋아지자 나로서는 다행이다 싶었다. 하마터면 기분 나쁜 인간이라고 여기고 불편한 사이로 끝났을 만남이 이렇게 좋은 인연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전쟁 시절에는 내 아내였고 지금은 아서 형님의 아내가 된 레이라 형수를 보면서 느꼈던 사실, 한 가지 모습만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없다는 교훈을 또다시 체감하게 된 기회였다.

로펠과 헤어지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 실프를 모두 불러놓고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서 가족들이 연회에서 돌아왔다.

“우리 왔어요.”

줄리아의 반가운 목소리.

시스는 잠든 지스를 안고 있었다.

“재미있게 놀다가 왔어?”

“네, 누가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즐거웠죠.”

“아하하, 그것 참 미안하게 됐네. 그래서 그냥 온 거야?”

“지스도 지렌 왕자도 실프가 없으니까 노는 게 재미없어졌는지 꾸벅꾸벅 졸던데요. 그리고 남편이 심각하게 영주들에게 성토하고 돌아가 버렸는데 저희가 무슨 재미로 남아서 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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