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483화 (483/529)

<-- 483 회: 경영의 대가 19권 -->

권좌(權座)가 주는 압박감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빛내는가 하면, 때때로 자리가 사람을 멋대로 휘두르기도 한다.

“혼트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치안유지에 실패해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고, 정치적으로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혼트 황실에 억눌린 귀족들의 불만이 잠재되어 있지요. 그런 와중에 수십만이나 되는 대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습니다. 백성, 유목민족, 귀족 등 불만을 품고 있는 모든 계층이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이곳 레던 왕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바로 그런 시대상황에서 등장하였습니다. 탁월한 처세와 군사능력을 가졌으며, 스스로를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 일컫는 황제가 타이밍 좋게 나타나준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유년기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 자아(自我)를 비관한 카르스 황제는 만백성이 바라 마지않는 황제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후디니 자작가의 1층 홀 연회장은 어느새 나의 연설장처럼 되어버렸다.

“저는 여러 차례 카르스 황제를 만나보았습니다.”

나는 잠시 카르스 황제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의 이면에 짙은 어둠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텅 빈 도화지에 자신의 것이 아닌 낙서를 가득 채워놓은 듯한 공허함이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닙니다. 혼트 제국의 모든 탐욕과 야망과 한을 짊어진 대변자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그 한 사람이라고 초점을 둔다면 그건 잘못된 관점입니다.”

“음, 하기야 혼트 제국 상황 상 전쟁은…….”

“먹고 살기는 힘든데 강한 군대는 있으니 약탈 나온 거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

듣고 있던 영주들도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이런 대의명분을 떠나,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황제는 제 정령술에 대하여 많은 대비를 해놓았습니다. 암살을 시도한다고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 만약 암살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지를 논의해보도록 하지요.”

내가 계속 말했다.

“카르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 혼트 제국군은 필연코 후퇴할 것입니다. 일단 이 전쟁에서 우리는 레던 왕국을 지키는데 성공하겠지요. 그 뒤에 후사가 없는 카르스 황제의 후계(後繼)를 놓고 다툼이 벌어질 테지요. 다른 황족들은 카르스 황제의 즉위 때 몰살당했으니 혼란은 더욱 클 테고요. 결국 너도나도 황위를 탐내며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끝내 혼트 제국 전체가 전란에 빠져 쇠락한다, 라고 여러분은 상상하셨겠지요?”

몇몇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혼트 황실이 멸족하였을 때 발호할 혼트 제국의 군벌들을 면면히 살펴보겠습니다. 충성의 대상을 잃은 혼트 제국 정규군은 각자 소속된 상관을 따르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유력 군벌은 필연 현재 카르스 황제에게 선택받은 다섯 명의 군단 사령관, 롬펠 대공, 륭겐 후작, 할슈타인 후작, 카이슨 후작, 쥬르덴 후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군벌로는 단연 롬펠 대공이지요. 롬펠 대공가의 강력한 세력은 물론 혼트 제국군의 정신적 지주라는 절대적인 인망까지 겸비한 살아 있는 전설이지요.”

설명이 이어진다.

“그에 필적한 군벌인 흑십자기사단의 수장 륭겐 후작조차도 개인적으로는 롬펠 대공과 사제지간(師弟之間)이므로 필시 롬펠 대공과 뜻을 함께할 겁니다. 그럼 롬펠 대공과 륭겐 후작 연합에 대항할 만한 군벌이 있는지 살펴볼 차례로군요?”

“으음…….”

“확실히 옳은 말씀이야.”

“그 두 사람의 연합이라…….”

몇몇 영주들이 신음을 했다.

내 설명이 이어졌다.

“조금만 생각해보셔도 아시다시피 딱히 대항마가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굳이 꼽자면, 무도한 두 역적 안타레스 가문과 린델 가문이 카이슨 후작이나 쥬르덴 후작, 할슈타인 후작 셋 중 한 사람과 손잡았을 경우입니다. 두 가문의 풍부한 재력이 군벌과 연대되면 큰 힘을 발휘할 테니까요.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성격상 두 가문과 합종하여 일을 꾸밀 리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롬펠 대공과 뜻을 모아 국내의 혼란을 일찍 종식시키기 위해 새 황제를 선출할 겁니다.”

이어지는 내 설명은 간단했다.

카르스 황제의 선택을 받았던 다섯 군벌에 의해 선출된 새 황제로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위에 오른 직후에 새 황제에게 부여되는 최우선 과제란 선황의 복수 및 유지를 이어받는 것이 되리라.

그들의 역량과 추진력을 감안했을 때, 혼란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다시 재개되기까지는 5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선황의 복수라는 명분을 전면에 세운 그들은 우리 레던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덤벼올 겁니다. 그럼 제가 또 묻겠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맞서 싸울 태세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까요? 오히려 쉽게 전쟁의 위기를 넘기는 바람에 위기의식을 잃고 태만해져 있지는 않을까요? 그때 다시 침략을 당해 위기가 닥친다면 여러분은 이번엔 황제를 시해한 저를 혼트 제국에 넘겨주고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하실 생각입니까?”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섞인 말에 몇몇 영주들이 얼굴을 붉혔다.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양국 사이에 존재합니다. 카르스 황제는 그것을 모두 짊어지고 나선 상징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고, 전쟁은 일어났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해야지요. 어느 때보다도 준비가 잘 된, 모두의 뜻이 하나가 된 바로 지금 해야지요!”

나는 바깥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에서! 여기서 황제를 꺾어야 합니다. 잘못된 방법을 택했음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어야합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양국은 전쟁을 딛고 화해로 갈 수 있습니다. 암살은 그럴 기회조차 없애는 하책으로 미래를 위한 비전이 아닙니다. 일국의 군주를 암살한 나라로 영원히 기억될 텐데요. 그렇게 기록된 역사는 다시는 잊히지 않을 텐데요. 그 누가 자기 조국의 군주를 암살한 적국과 화해·공존을 원할까요?”

나는 돌연 검지를 들어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을 가리켰다.

“로펠 대공자, 당신도!”

내 호명에 로펠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밖에도 수많은 영주를 가리켰다.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지목될 때마다 영주들은 내 기백에 놀라 화들짝 한다.

“모두가 당사자입니다. 이 자리에 제 3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우리 앞에 봉착한 문제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말을 마치면서 나는 오른쪽, 왼쪽, 정면을 향해 한 차례씩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렇게 나의 일장 연설은 끝이 났다.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지친 나는 풀썩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연회를 재개해야겠군요. 요리도 술도 전혀 식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즐겨주십시오.”

짝짝!

손뼉을 몇 번 치자 연회장에 다시금 바람이 휘몰아쳤다. 실프가 바람을 일으켜 테이블과 의자를 전부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이만 연회장에서 퇴장해야 했다. 시스와 줄리아는 더 놀다가 알아서 오겠지.

나는 연회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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