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2 회: 경영의 대가 19권 -->
“여태껏 정령술로 수많은 이적을 행해오신 재상 각하의 업적을 떠올려보십시오. 수십만 대군에 둘러싸인 황제라 할지라도 능히 처치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4인의 영웅 일행이 마왕을 물리치는 민담처럼 쉽게 이야기하는군.
“대체 무슨 얘기 하는 겁니까? 저도 좀 들읍시다.”
제론이 옆에서 채근했다. 내가 로펠의 의견을 들려주자 제론은 혀를 찼다.
“생각하는 수준이 평민의 그것 같군요. 죽일 놈 하나 찾아서 저놈만 죽이면 이 세상의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볶아대는 군중심리 말이지요.”
“글쎄. 내 생각에 그보다는…….”
나는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더 큰 게 아닐까.”
나를 실컷 추켜세우며 나라면 가능하다고 칭찬하는 이면에는, 자기들은 전쟁이라는 진흙탕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다는 회피심리가 있다.
우리는 무서운 혼트 제국군과 싸우고 싶지 않다.
당신이 좀 알아서 해결해주면 안 되겠는가?
그들은 내게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승패를 알 수 없는 대 전쟁에서 군대와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카라스 대공자 로펠이라고 했던가.
젊고 풍채도 당당해 보이기에 전도유망한 인재인 줄 알았더니 실망이 크다. 결국은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사고관이 아카라스 영지라는 곳에 제한된 소인(小人)이었다. 게다가…….
“간사한 면도 있고 말이지.”
“예?”
“내 정령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 대공자 로펠도 알고 있을 테지.”
특히 귀족들 사이에서는 내 정령술에 대한 것이 꽤 상세하게 알려졌다. 내가 출근하면 왕궁에서 근무하는 모든 왕실 관리들이 입을 조심할 정도였다.
저 젊은 놈도 그걸 모를 리 없다.
“저놈은 내가 듣고 있는 걸 알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공식석상에서 낼 의견치고는 나를 등 떠미는 느낌이 강하니 이런 자리를 빌려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영주들의 여론을 얻어가며 말이다.
“만약 암살을 시도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제론이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시도할 만한 기회는 한두 차례 있었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있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지. 늘 할슈타인 후작이 곁에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 이사벨라 궁전 별궁에서 드잡이까지 했으니 지금은 더 경호가 강화됐겠지.”
나는 조금 뜸들이다가 설명을 이었다.
“저 친구 말대로 시도해본다면, 글쎄. 성공 확률은 반반이 아닐까? 그런데 제론 넌 어때? 성공할 수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문(愚問)이십니다. 저를 저 재수 없는 녀석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제론이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카르스 황제라는 상징은 우리에게도 기회입니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제론은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떠들게 그냥 놔둘 생각이십니까?”
“가만 놔둘 수야 없지. 연회도 이제 재미없는데 분위기가 망쳐버릴까?”
“좋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과 놀고 있는 실프에게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실프는 안고 있던 지렌 왕자와 지스를 각각 시에나 왕비와 시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날아올라 1층 홀 한복판에 착지했다.
돌연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에 밀려 음식과 술이 잔뜩 차려진 테이블과 의자들이 전부 양옆으로 옮겨졌다.
“꺄악!”
“뭐, 뭐야?!”
갑작스런 사태에 영주들이나 여자들이 기겁을 했다. 모든 테이블과 의자가 홀 양 사이드로 옮겨졌다. 실프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에 바닥에 음식이 떨어지거나 술이 흐르지는 않았다. 넘어지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그제야 눈치 빠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제대로 망치셨군요.”
옆에서 제론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 녀석, 그 와중에 자기가 마실 포도주 두 병을 챙겨놓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연회장의 중앙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리간드 후작 카록입니다. 즐거운 시간 중에 죄송합니다만, 잠시 제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
침묵이 감돌았다. 뭐, 사실 이곳에 내 행동에 제동을 걸 만한 사람은 없다. 에릭 국왕도 없고,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윗사람인 뮤트 공작은 아직 숙소에서 정양(靜養)을 취하고 있으니까.
“실은 한 가지 재미있는 의견이 연회장을 떠도는 것 같아서 이렇게 발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의견을 냈는데, 저와 뮤트 공작 전하, 그리고 제 부친이신 쿤트 백작과 둘째 형님 되시는 페르난도 백작, 이렇게 넷이서 황제를 암살하면 어떠냐는 의견이었습니다.”
“……!”
연회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대공자 로펠을 비롯한 영주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물었다.
“혹시 이 의견에 찬성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찬성하신다면 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대공자 로펠을 시작으로 몇몇 영주들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손 드는 사람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나는 쭉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손을 내려주세요. 그럼 저는 그에 따른 제 짧은 소견을 여러분께 밝힐 수밖에 없겠군요.”
사람들이 다시 손을 내렸다.
이해한다.
내가 그동안 벌여왔던 활약들, 그러니까 북부대로를 만들고, 저택을 하루아침에 뚝딱 건설한다든지, 사방팔방 날아다니며 레던 왕성 백성들을 위한 피난처를 만드는 등의 업적을 사람들은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내 정령술이면 해결될 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발상은 모든 원흉이 카르스 황제라고 여기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백성들을 선동한 것도, 대군을 일으킨 것도, 대륙정복을 꿈꾸는 것도 모두 카르스 황제이니 그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하겠다.
카르스 황제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이며, 누가 봐도 위험한 인물이니까. 모든 증오와 두려움이 그 한 사람에게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대륙 서부의 가난한 약소국 혼트 왕국은 대체 언제부터 대륙 정복을 꿈꾸는 군사국가가 되었을까요?”
“베잘리우스 이후부터요.”
한 나이든 영주가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크로센트 베잘리우스가 믿기 힘든 활약을 하고 나서입니다. 그와 이사벨라 여왕의 사후 오리엔 왕실의 독립과 우리 레던 왕국의 건국으로 혼트 제국은 쇠락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럼에도 혼트 제국은 여전히 대륙 정복의 꿈을 간직하고 있지요. 대체 왜일까요? 어째서 불가능한 꿈을 좇는 것일까요? 혼트 제국은 더 이상 이사벨라 여왕 시절이 아닌데 말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베잘리우스 대공은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륙 정복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시도했으면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프로파간다적인 믿음은 바로 거기서 출발합니다. 오리엔 제국 타도와 혼트 제국 존립이라는 대명제로 싸웠던 베잘리우스 대공의 분투는 본인도 모르게 대륙 정복의 길로 포장되었습니다.”
“…….”
“아까 이 전쟁을 벌인 모든 원흉이 카르스 황제냐고 했었지요. 하지만 통치라는 것은 그렇게 일방적이고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군주가 일방적으로 백성에게 명령하고 지배하는 듯이 보이지만, 현명한 통치자라면 알고 있을 겁니다. 지배계층의 저 아래에서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염원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압력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통치자란 바로 그런 위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