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481화 (481/529)

<-- 481 회: 경영의 대가 19권 -->

나는 제론, 루이와 계속 어울려 대화를 나눴고, 간간이 다른 영주가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점점 대화에 참여하는 숫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연회에 별로 흥미가 없는 루이가 먼저 일어서자 이 대화의 장도 깨져버렸다.

“뭐, 저도 이런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하고 술에 집중하고 싶군요.”

그렇게 말한 제론도 본격적으로 술만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에 어울려주느라 나도 덩달아 퍼마시니, 우리의 주량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났다.

계속 마시다 보니 제론은 속이 불편해졌는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운디네의 치유의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나야 운디네가 몸속에 깃들어 있어서 계속 회복을 해주니 상관없다지만,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술을 뱃속에 들이 붓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술 마시다 요절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제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죽음이군요.”

“이봐, 너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술 말고도 재미있는 게 참 많단다.”

“그럴 리가요.”

제론은 피식 웃더니 다시 포도주를 병째 들이킨다. 나를 믿고 아까보다 더 많이 마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그냥 치유해주지 말고 만취하게 놔둘까. 취하면 곯아떨어지는 게 제론의 술버릇이니 가만 놔두면 아무도 없는 연회장에 홀로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는 추태가 발생할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론은 연회장을 스윽 둘러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요?”

“뭐가?”

“좋든 싫든 모든 걸 건 대결전을 앞두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국왕 폐하께선 왕실의 주인이자 나라의 주인으로서 누구보다도 필사적이시겠지요. 저 역시 왕실의 소속으로서 이 전쟁의 당사자 같은 마음입니다만, 저 영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우리처럼 필사적이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각자의 영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참전한 거랄까?”

“필사적으로 갈구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인데, 저들에게서 앞으로 얼마나 좋은 전략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지금 끼리끼리 모여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듣고 싶어? 무슨 얘기 하는지 난 다 들을 수 있는데.”

나는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이 연회장 내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연회장 구석에서 소곤소곤 귓속말을 한데도 모두 들을 수 있다.

“그 능력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피곤하면 감각 공유를 안 하면 그만이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재정부에서 루이가 휘하 관리들 갈구는 소리나, 네가 군사부에서 농땡이 피우는 거나 전부 알 수 있거든. 심심할 때 시간 때우는데 딱이야.”

“그것 참…… 변태 같군요.”

“시끄러. 집무실 서랍에 속옷이랑 양말 챙겨놓는 자식이. 술집에서 밤새다 출근하지 말고 좀 깔끔하게 살아라. 군사부 관리들이 너 냄새 난다고 수군거린다고.”

“크윽!”

제론은 대꾸를 못하고 이를 갈 뿐이었다.

나는 정령과 공유된 감각에 집중하여 연회장을 쭉 살폈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 한쪽에서 영주들이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무리의 주인공이 되어서 유창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쑥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누구지? 꽤 젊은데.”

“누구 말씀이십니까?”

“저기. 갈색의 짧은 머리칼에 체격도 좋고.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에이, 대충 이렇게 생겼어.”

나는 즉석에서 운디네를 시켜서 물로 이루어진 작은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작은 물 인형을 빤히 본 제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이로군요.”

“아카라스? 아, 그 북부에 있는 팔자 좋은 영지?”

“예.”

아카라스 백작가.

레던 왕국 북부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땅이 비옥해 곡물생산량이 풍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춰서 북부 지방의 잦은 몬스터 침공도 문제없이 막아낸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고,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강한 영주도 없었기에 왕실파도 육제후파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동네에서는 맹주격인 가문이랄까? 아무튼 더 큰 야심을 부리지 않는 한 어느 편에 들어가 고개를 조아릴 이유가 없는 팔자 좋은 가문이었다.

레던 왕국의 정계에 무관심한 탓에 재상인 나도 아카라스 백작가에 대해 들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대공자에다 아카라스 백작의 자식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나 일찍이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한 인물입니다.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영지는 잘 간수할 정도는 될 테지요.”

제론의 평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직접 군대를 끌고 참전한 걸 보면 어느 정도 군대를 지휘할 자신이 있나보군. 체내에 보유한 오러량을 보니 대략 오러 유저 상급 수준의 무예도 익혔고. 얼굴 표정이나 어조를 보면 척 봐도 부족한 것 없는 집안 자식이다 싶네. 칭찬만 받고 자란 티가 나.”

“그 참 재수 없군요.”

“그러게 말이야. 키도 크고 생긴 것도 준수하니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에 제론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 뭘 꼬나 봐? 불만 있어?

제론은 말을 말자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왕실에 세금은 꼬박꼬박 잘 내는 가문이니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것 없습니다. 원채 자기 영지 외부의 일에 관여하는 걸 꺼려합니다만.”

식량도 풍부하겠다, 자급자족하는데 문제없으니 괜스레 외부의 골치 아픈 문제에 끼고 싶지 않겠지. 그간 왕실과 육제후가 치열하게 대립한 양상을 돌이켜보면 그런 판단이 나올 만했다.

어쨌든, 나는 아카라스 백작가의 대공자 로펠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다.

“혼트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전략을 찾기 위해 왕실 분들이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사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요.”

호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도 한 번 알고 싶다.

로펠이 말했다.

“리간드 재상 각하와 뮤트 공작 전하, 그리고 쿤트 백작님과 페르난도 백작님. 이 네 분이 특공대가 되셔서 적진에 침투해 혼트 제국 황제를 암살하는 것이지요.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출귀몰한 대정령사가 계신데 불가능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듣고 보니 그렇군!”

“대정령사 리간드 후작이라면……!”

“쉽게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네. 수십만 대군이 둘러싸고 있는데다가 할슈타인 후작이 그림자처럼 황제를 호위하고 있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니까 네 사람이 다함께 가는 것이지!”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네 사람이 가는데 뭔들 불가능하겠는가?”

“으음, 확실히…….”

좋은 생각이라고 무릎을 치며 합세하는 영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무리의 주인공이 된 젊은 청년 로펠은 자신만만하게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부터 왕실이 쌓아온 그간의 업적을 떠올려보십시오. 재상 각하를 필두로 한 핵심 인물이 해낸 것들 아닙니까? 협력, 협력 하지만 결국은 소수의 천재가 해결하는 편이 일을 풀어나가는 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는 기가 차서 그것을 계속 듣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영주들의 행태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껏 내가 주도로 행해왔던 수많은 정책은 나와 루이, 제론 등 소수의 인재가 해낸 업적이다.

하지만 정책을 내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발안자는 소수일지도 모르나 그것을 실행에 옮겨 업무에 적용하는 것은 다수의 왕실 관리들이다. 왕실 관리들을 대거 숙청하고 개혁하여서 업무체계를 개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 배는 작은 조각배의 얘기다.

큰 배는 선장과 항해사가 있어야 하고 그 휘하에 많은 선원들이 손발이 되어 행동해주어야 원활한 항해가 가능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