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8 회: 경영의 대가 19권 -->
투석기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저 목책처럼 말이다.
콰앙― 쿠지직!
한 번 더 바위가 강타하자 목책에서 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고함이 가득한 전장에서는 듣기 힘든 작은 소리였지만, 바우텔 자작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바우텔 자작은 목책이 얼마 안 가 파괴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패병과 중장보병 전투준비!”
바우텔 자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왕실특별군 소속의 방패병과 중장보병이 집결했다. 목책이 부서지면 그들이 뚫린 구멍을 매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콰지직!
투석기가 날린 바위가 다시 한 번 목책을 때렸다. 이제 목책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상태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롬펠 대공 군단 측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보였다. 창병들이 종렬대형으로 집결한 채, 목책이 부서지면 돌격을 감행할 태세를 마친 상태였다.
새로운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언덕 위의 투석기 2개가 다시금 바위를 발사했다.
위협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2개의 바위가 목책을 잇달아 강타했다.
뻐어억! 빠지직!
목책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기우뚱거렸다.
“어어?”
“쓰, 쓰러진다!”
“준비해!”
“이런 씨발! 좀만 더 버티지!”
양 진영에서 쓰러질 듯 말 듯한 목책을 보며 소란을 피웠다. 이윽고 목책은 굉음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목책을 이루고 있던 통나무들이 굴러 떨어짐과 동시에 양 진영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진격!”
“막아라!”
병사들의 함성.
리간드 영지군의 방패병들이 빠르게 무너진 목책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방패를 서로 겹쳐서 스크럼을 짠 모습은 그것으로 하나의 목책이 된 듯했다.
그러나 창날을 매섭게 치켜세운 채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롬펠 대공 군단 창병들의 기세도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양측이 충돌했다.
퍼퍼퍽! 쾅! 파팍!
창과 방패가 충돌했다.
창은 방패를 꿰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치열한 자리싸움의 시작이었다.
“밀어붙여!”
“틈새를 만들어내라!”
롬펠 대공 군단의 창병은 일제히 창날을 세워서 밀어붙였다. 빈틈없이 촘촘한 벽을 만든 리간드 영지군 방패병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꿋꿋이 포지션을 유지했다. 대규모의 인원이 투입된 힘겨루기에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푸욱!
“크억!”
방패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창이 리간드 영지군의 방패병 한 명을 찔렀다. 방패병은 고꾸라져 피 흘리다가 죽었다. 그러자 뒤에 대기해 있던 방패병이 전우의 빈틈을 채웠다. 다른 방패병들은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죽은 전우의 시체를 끌어냈다.
하지만 전투는 점차 리간드 영지군의 열세로 드러났다.
방패병들은 무너진 목책의 틈새를 잘 막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혼트 제국군 돌격병들이 제 1 요새의 전 구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분투를 벌이고 있었던 리간드 영지군이었지만, 목책 한 곳이 무너지자 분위기가 술렁이더니 한순간에 혼트 제국군의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것.
사실 롬펠 대공 군단의 총공세를 이만큼 버틴 것은 리간드 영지군의 조직력과 투지 덕분이었다. 정신적으로 흔들리니 전투력도 덩달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가.”
바우텔 자작은 신음했다.
롬펠 대공 군단은 한 번 기세를 잡자 더욱 치열하게 공격해오고 있었다.
놈들도 험한 산지에서 요새를 공략한다고 소모한 병력과 체력이 적지 않을 텐데, 오히려 싸움의 끝이 보이자 더 강하게 몰아붙이는 걸 보니 정말 명성대로 정예구나 싶었다.
바우텔 자작은 하는 수 없이 퇴각신호를 내렸다.
“후퇴해라!”
삐이익―
삐익―
퇴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졌다. 제 1 요새에서 리간드 영지군이 후퇴를 개시했다.
리간드 영지군이 물러난 목책은 롬펠 대공 군단 돌격병들이 점령했고, 이내 요새 안에 혼트 제국군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문을 열어라!”
제 1 요새로 진입한 돌격병은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성문부터 열어서 아군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돌격병들의 최우선 강령이었다.
문마저 활짝 열리자 롬펠 대공 군단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졌다.
리간드 영지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질서 있게 요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점령했다!”
“이겼다!”
롬펠 대공 군단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오, 이겼군.”
롬펠 대공은 요새에서 들리는 아군의 떠들썩한 환호에 반응했다.
옆에서 말버린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점령해서 다행입니다. 자칫 이곳에서 발목이 붙잡혀 고생할 뻔했습니다.”
“그렇지. 워낙에 지형이 험해서 개고생 할 뻔했어. 저놈들은 참 요새를 절묘하게도 지어놓았단 말이야. 목조 요새 따위로 7만 대군을 고생시켰을 정도이니까.”
롬펠 대공은 말버린 자작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네 공이 컸다. 투석기를 투입한 전술 덕에 예상보다 빨리 승리를 거두었어.”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싸움은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 적군은 준비한 것을 전부 꺼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넌 용케도 확신하는구나.”
“첫째로, 놈들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한 채 적절한 타이밍에 후퇴했습니다. 이곳에서 싸울 만큼 싸우다가 후퇴한다는 작전계획이 사전에 준비되지 않고서는 저렇게 질서정연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습니다.”
“호오, 둘째는?”
“바스크 쿤트 백작과 릭 페르난도 백작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잖습니까.”
“오, 그렇군. 여기가 승부의 분기점이었으면 녀석들이 진즉에 나타나 나랑 승부를 냈을 테지. 얼마 전에 이미 가볍게 붙어봤지만 내게 겁먹고 숨을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역시 대공 전하께서는 대단하시군요.”
말버린 자작은 전율을 느꼈다.
……겁먹고 숨을 자들이 아니다.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롬펠 대공이 두 사람의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는 뜻이 된다. 무(武)의 이치를 전부 체득했다는 오러마스터를 상대로, 그것도 두 명과 싸워서 압도할 수가 있다니, 그게 인간에게 가능한 위업이란 말인가.
“아무튼 리간드 영지군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대응을 할 겁니다. 어쩌면 이 같은 요새가 여러 개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요새가 더 있다?”
“유능한 건축가가 있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요새를 지었으니, 시간상 한두 채쯤 더 지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잖습니까.”
“에잉, 폐하께서도 지금쯤 진격을 시작하셨을 텐데 시간 맞춰서 합류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
“급할 것 없습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차근차근 공략해나가면 됩니다. 아군은 현재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전투를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롬펠 대공 군단은 제 1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롬펠 대공과 말버린 자작 역시 요새 안으로 입성했다.
병사들로 하여금 요새를 모두 뒤져서 적이 남기고 간 군수물자가 있는지 확인케 하였다. 물론 잠시 후, 식량이나 무기 등 쓸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다는 보고를 듣고 말버린 자작은 혀를 차야 했다.
“지독한 놈들이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타는 냄새가 나는데?”
롬펠 대공이 꺼낸 말이었다.
“옛?”
말버린 자작이 놀라 되물었다. 그리고…….
콰르릉! 꽈앙!
화르르륵―
여기저기서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시뻘건 폭염이 요새를 사방에서 휩쌌다.
“으악!”
“부, 불이다!”
“놈들이 불을 질렀어!”
롬펠 대공 군단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화계라고?! 그럴 리가!”
말버린 자작이 비명을 질렀다.
화계를 쓸 수 있는 지형이었다면 진즉에 말버린 자작이 먼저 썼을 터였다.
온통 나무가 빽빽한 산악지형에서 공략하기 까다로운 요새를 만났는데 그 요새가 목조로 축조되어 있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화계를 떠올릴 법했다.
하지만 말버린 자작은 지형과 풍향을 모두 고려한 결과, 불을 놓을 경우 아군도 함께 피해를 번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양측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화계라면 병력이 많아 움직임이 제한적인 롬펠 대공 군단이 손해인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큰 산불이 일어날 경우 리간드 영지군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이놈들이 지금 같이 죽자는 거냐!”
말버린 자작은 분노했다.
“일단은 병사들을 후퇴시켜야겠군.”
“아, 예!”
말버린 자작은 즉시 요새에서 빠져나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적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불길은 빠르게 요새의 목책을 태우며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요새에 진입한 혼트 제국군이 불길에 포위된 듯한 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