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 회: 경영의 대가 19권 -->
괴물.
롬펠 대공을 일컫는 별명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괴물이었다.
바스크도 릭도 롬펠 대공 앞에서 위축되었다.
바스크는 이러한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겼다. 투지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스크였지만, 그는 싸우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볼 정도의 연륜이 있었다.
바스크가 릭에게 말했다.
“릭. 오늘은 이만 물러서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우리가 놀라서 위축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초장부터 기세 싸움에서 지고 들어간 승부가 좋게 끝날 리가 없지.”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베일 경의 말을 잊었느냐?”
“…….”
그 말에 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번 싸움의 책사인 영주대리 베일은 분명 두 사람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당부한 말이었다.
“제길.”
결국 릭도 뒤로 물러섰다.
이를 본 롬펠 대공이 배틀 액스를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더 안 할 건가? 이렇게 김이 새게 하면 다소 섭섭한데.”
“흥을 깨서 미안하게 됐군. 다음엔 끝장을 볼 수 있을 테니 염려 마시오.”
바스크가 대꾸했다.
릭도 입이 근질거렸지만, 말문을 열었다간 욱 하고 성질이 폭발할 것 같아서 참았다.
롬펠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굳이 잡지는 않겠네. 오늘만 날은 아니니.”
싸움에 굶주린 롬펠 대공이지만, 그렇다고 여유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기에 롬펠 대공은 기꺼이 그들을 돌아가게 놔두기로 하였다.
‘물러서려고 마음먹은 상대를 억지로 붙잡고 싸워봤자 흥이 날 리도 없고. 물러설 곳이 없어졌을 때, 양쪽 모두 필사의 각오로 임해야 제대로 피 터지는 싸움이 되는 법이지.’
상상만으로도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왔다.
바스크 쿤트와 릭 페르난도.
무려 둘씩이나 되는 오러 마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110년 인생 중 가장 짜릿한 승부가 될 것이다. 그 기대감에 자극에 많이 무뎌진 롬펠 대공조차도 설렘을 느꼈다.
바스크와 릭이 물러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롬펠 대공은 클클 웃었다.
“2대 1이라니. 나이가 들수록 욕심만 느니 문제로구나. 나는 언제쯤 만족할고.”
영원히 굶주리는 숙명을 타고난 짐승처럼, 롬펠 대공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결국 혼트 제국군은 목표한 지점의 주요 고지를 모두 점령했다. 리간드 영지 경비대의 긴밀한 작전에 의해 다소 피해를 입었으나, 어차피 감수해야 했을 피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시간에 첫 목표를 완수한 것은 큰 성과였다. 시간의 흐름은 곧 보급품의 소비로 이어지기 때문에 혼트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단축될수록 이득인 것이었다.
“결국 아군의 제 1 요새가 롬펠 대공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주요 인물이 한 자리에 모인 회의장에서 베일이 말문을 열었다. 롬펠 대공과 짧은 대결 후 물러선 바스크와 릭도 그 자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직접 눈으로 관측하고 제 1 요새의 주변 지리를 어느 정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만간 롬펠 대공 군단이 행동에 나설 겁니다.”
모르는 지형에서 적과 싸우려는 지휘관은 없다.
하물며 초행인 험한 산지에서 그곳의 지리에 익숙한 적을 공격해야 하는데, 지리 관측과 순찰도 없이 움직였다가는 자살행위였다.
롬펠 대공 군단이 리간드 영지군에 비해 압도적인 대군을 가졌음에도 호쾌하게 진격하지 못한 것은 바로한 점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경솔하게 총공격을 시도했다면, 적의 움직임과 주변지리를 손바닥처럼 꿰뚫어 보고 있는 베일의 책략에 걸려 전멸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롬펠 대공은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우위에도 불구하고 기본과 정석을 택했다.
첫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겠다는 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추진력.
‘롬펠 대공의 생각에서 나온 단순한 판단일까? 아니면 그의 곁에 따로 참모가 있는 것일까?’
후자라면 한층 골치가 아플 것이라고 베일은 생각했다.
“지리를 파악 당했다면 제 1 요새는 얼마 버티지 못하겠군.”
바스크의 말에 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제 1 요새를 포기하되 최대한 저항하며 시간을 벌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2 요새로 후퇴하면서 준비했던 세 번째 작전을 펼치겠습니다.”
세 번째 작전이라는 말에 다들 눈빛이 변했다.
리간드 영지군은 이미 베일의 주도 하에 전시 상황을 가정하고 체계적인 작전을 구상하고 모의전도 지겹게 치르며 준비해왔다.
그중 세 번째 작전은 리간드 영지에 모인 인재들의 역량이 집중된 회심의 일격이었다. 잘만 하면 롬펠 대공 군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리간드 영지군의 핵심멤버들은 이 세 번째 작전에 거는 기대가 컸다.
“이번엔 전군을 투입하겠습니다. 각자 맡은 구역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해 최대한 저항하며, 각 구역끼리 연계하여서 교란을 벌여 적의 진격방향을 혼란시킵니다. 이에 대한 전군의 총괄지휘는 왕실특별군 부사령관이신 바우텔 자작님께서 수고해주십시오.”
“알겠네.”
바우텔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평생 왕실군 소속으로 녹봉을 먹으며 살아온 바우텔 자작은 다수 병력을 지휘하여 전황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경비대장 딘 경과 부대장 렉스 경은 경비대를 이끌며 바우텔 자작님의 보조를 부탁합니다.”
“알겠소.”
“맡겨주십시오.”
딘과 렉스가 대답했다.
베일은 이어서 남은 네 사람에게 말했다.
“쿤트 백작 각하, 페르난도 백작 각하, 그리고 리처드 경과 하딘 경. 네 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두 분 백작 각하는 단독으로 움직이시고, 리처드 경과 하딘 경은 오러 유저 급의 정예 무인 10명씩을 이끌며 활발하게 다니며 위태로운 구역을 도와주십시오.”
베일의 말이 이어졌다.
“작은 구멍 하나가 커다란 둑을 무너뜨리는 법입니다. 네 분은 제 1 요새에 작은 구멍이 뚫리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주십시오. 어느 한 구역이 특별하게 더 위태롭지 않고 고루 밸런스가 맞아야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때가 왔다고 생각될 때에 모두에게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그때는 지체 없이 제 2 요새까지 후퇴해주십시오.”
그렇게 회의는 끝났다.
본격적인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
베일은 자신의 산적생활의 경험을 살려서 리간드 영지의 산악지대에 총 세 개의 요새를 건축했다.
본래는 문어발처럼 마구잡이로 축조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상대를 괴롭히는 전략을 구상했지만, 천재 건축가 파오니 남작의 반대로 생각을 접어야 했다.
“그렇게 문어발처럼 요새를 축조하자니 시간도 인력도 부족해서 필연적으로 건축 퀄리티가 떨어질 걸세. 자네는 아마도 산적생활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는 모양인데, 산적 토벌대랑 혼트 제국군의 전투능력이 동일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
그 말에 베일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레던 왕성을 본 적이 없겠군. 왕성의 성벽은 그야말로 하늘까지 닿은 철벽과도 같지. 그런데 혼트 제국군이 그런 곳을 공격해 위기까지 몰아넣었었다고 하질 않나. 놈들이 요새 공략에 도가 텄다는 뜻이야.”
베일은 매우 유능한 전략가였지만, 건축에 관한 문제가 되자 천재 건축가인 파오니 남작에게 많은 부분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오니 남작의 의견은 이러했다.
“내가 그동안 쭉 리간드 영지를 직접 둘러보았다네. 하도 험한 데를 다니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내 계산으로는, 까마득한 대군이 밀려와도 어느 정도 방어가 될 만한 요새는 세 개까지 지을 수 있네.”
“무리해서라도 더 지을 수는 없겠습니까?”
“자금이야 카록 상단의 지원도 받으니 남아돈다지만 인력과 공사기간과 자재는 한정되어 있지. 내가 계산한 최대 숫자는 세 개 일세.”
“요새 세 개로는 시간을 끌기에 역부족인데 큰일이군요.”
심각하게 고민하는 베일에게 파오니 남작이 말했다.
“대신 요새를 축조할 때 다른 장치를 더 해놓을 수는 있네.”
“다른 장치라니요?”
파오니 남작은 히죽히죽 웃었다.
“언젠가 주군 양반이 말씀하셨지. 진정한 천재 건축가는 주어진 여건에 맞춰 최대한의 효율로 목적을 달성하는 건축물을 만들 줄 아는 건축가라고 말이지.”
세 번째 작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