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 회: 경영의 대가 18권 -->
“그나저나 생각보다 대원들이 잘 버텨주는군. 평소 훈련하던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야.”
패트릭의 말에 발락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더 빠를 수밖에요.”
“이유가 뭐지?”
“첫 번째 이유는 뒤에서 적이 쫓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니 다를 수밖에요.”
“두 번째도 있나?”
“초원으로 향하고 있잖습니까.”
“아…….”
패트릭은 말끝을 흐렸다.
유목민족인 그들에게 초원은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것도 혼트 황실과 적대하면서까지 끝까지 지켜왔던, 카르스 황제에게 유목민족들이 복속된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런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으니 전시임에도 다들 들떴던 것이다.
“그래서 기운을 낸 것이군.”
“이번이 초원을 보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는 않다.”
패트릭은 확신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의외라는 듯 놀라는 발락에게 패트릭이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평화가 올 거야. 주군이시라면 반드시 평화를 만들어내실 테니까. 그때가 되면 휴가라도 내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걸세. 아니면 카록 상단의 상행에 호위로 동행할 수도 있고.”
“평화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으시는군요.”
“물론. 주군께서 그리 만드실 테니까.”
카록 리간드에 대한 패트릭의 믿음은 신앙에 가까워보였다.
“평화라…….”
발락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우리 바람의 일족에게 ‘평화’라는 말은 참으로 어색한 단어입니다. 그 단어 자체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상상 속의 개념일 뿐인지 모르겠군요. 이건 혼트 제국과 레던 왕국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난 오리엔 왕국 출신이지만.”
“살아있는데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요?”
“있다.”
“단호하게 대답하시는군요. 대장님의 삶은 평화로웠습니까?”
“……그렇지는 않지. 하지만 평화는 반드시 있을 거야. 그런 이상을 포기하면 안 돼.”
“대장님은 밝고 긍정적인 분이시군요. 정의롭고 이상적이고 공명정대하고…… 하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
부족함을 지적하는 발락의 말은 의외였다. 놀란 패트릭에게 발락이 말했다.
“저는 대장님을 아주 존경합니다. 대장님께서 우리들에게 위대한 미래를 가져다주시리라 믿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주제 넘는 충고를 해드리는 점, 불쾌하셔도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다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대장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저도 대원들도 초원에서 살아가던 시절에는 지나가던 행상을 약탈하고 농가마을을 습격했었습니다. 저희가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자네나 대원들이 좋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태도는 분명 나쁜 것이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대장님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는 언젠가 대장님이 그것을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으니 나쁜 게 아니라는 소린가?”
“그런 천박한 뜻이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는데, 말로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냥 가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렵군.”
패트릭은 머리를 긁적였다.
발락은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바람의 일족 사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전해지는 삶의 철학이다. 초원에서 태어나 바람의 일족으로서 살아온 사람만이 가슴에 품고 있는 정서를 그가 한 번만 듣고 바로 이해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도 대장님께는 불편한 선택의 기로일 수 있겠군요.”
발락의 말에 패트릭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대장님은 초원에 도착하면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그야 혼트 제국군의 보급로를 공격해야지. 혼트 제국의 각지에서 차출된 군수물자가 초원지대를 통과하여 바덴 강으로 향하지. 바덴 강에서는 화물선에 선적하여 레던 왕국으로 보내진다고 했다.”
“그게 우리의 당초 목적이긴 합니다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책략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들어보고 싶군.”
“이건 어쩌면 이 전쟁의 승패가 걸린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패트릭은 눈빛을 번뜩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열쇠라니. 그런 걸 콘돌 기병대가 쥘 수 있다고?
“참고로 어제 저녁식사를 하다가 아들 발터가 낸 생각입니다.”
“자네 아들은 참 영민하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발락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우리들 바람의 일족은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과 이사벨라 여왕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하지만 혼트 황실은 싫어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인가?”
패트릭은 어쭙잖게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그냥 발락의 말을 요구했다.
“베잘리우스 대공과 이사벨라 여왕의 아들 시리우스는 어리석은 황제였습니다.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두 사람의 아들인 그는 부모 못잖은 위대한 군주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치안 안정과 황권 강화를 택했습니다. 치안과 황권 강화를 위해 우리들 바람의 일족에게 유목생활을 그만두고 제국의 백성으로 편입시키려 하였습니다. 족장들에게 영지를 수여하고 이주를 권장했지만, 사실상 우리에게서 초원지대를 빼앗는 행위였습니다.”
“…….”
“오랫동안 지켜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시리우스 황제는 제국의 안녕에 방해되는 야만적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베잘리우스 대공을 쫓아 대제국 건설에 앞장서준 우리에게 그런 대우를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반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오리엔 왕국과 레던 왕국이 독립했지.”
“맞습니다. 속국으로 전락했던 오리엔 제국과 레던 지방의 귀족들이 손을 잡고 잇달아 반역을 일으켰을 때, 우리들은 혼트 황실을 돕지 않았습니다. 시리우스 황제는 우리의 도움 없이 그들과 싸웠고, 패배했습니다. 오리엔 왕국과 레던 왕국이 건국되어 지금에 이르렀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대장님?”
“모르겠군.”
“혼트 제국군의 가장 큰 전력은 바람의 일족입니다. 카르스 황제가 베잘리우스 대공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의 전략적 기반은 바람의 일족 전사들로 구성된 기병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일족 전사들을 흔들면 황제도 흔들 수 있습니다.”
“…….”
혼트 제국군 기병으로서 참전한 바람의 일족 전사들을 흔든다.
패트릭은 그제야 발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차렸다. 불편한 선택의 기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말뜻도 말이다.
발락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가족이 이곳 초원지대에 있습니다, 대장님.”
패트릭의 얼굴이 굳었다.
***
콰아앙!
롬펠 대공과 바스크가 먼저 충돌했다.
“헉!”
바스크는 깜짝 놀랐다.
충돌 순간 자신의 온몸이 공중에 붕 떠서 뒤로 날아가는 진귀한 체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왼편에서 릭의 찌르기가 이어졌다. 롬펠 대공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리며 배틀 액스를 횡으로 휘둘렀다. 오러 액스와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할 듯했다.
그러나 충돌 직전, 릭이 롱 소드를 회수했다. 엄청난 파워의 롬펠 대공과 충돌해봐야 좋은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릭은 눈을 빛냈다.
‘보여주마!’
갈고 닦았던 스킬을 선보이기로 했다.
사뿐히 한 걸음 물러난 릭이 다시 뒷발을 디디며 움직였다.
파앗!
뒷발로 약간의 오러를 살짝 발출하며 내딛는 보폭.
릭은 그 반동으로 쏘아진 화살처럼 롬펠 대공의 등 뒤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찌르기!
카앙!
롬펠 대공은 황급히 뒤로 돌며 배틀 액스의 날을 옆으로 뉘어서 막았다.
밀려났던 바스크도 합세했다.
앞뒤에서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호오?”
제법이라는 듯이 한 마디 하고는, 롬펠 대공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방금 전의 릭과 똑같이 엄청난 스피드였다. 순간적으로 공격 목표를 잃은 릭과 바스크는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릭은 당혹해했다.
오러워크.
내딛는 발에 오러를 발출하여 추진력을 얻는 빠른 스텝으로, 릭이 롬펠 대공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연마한 스킬이었다. 아니, 사실은 아버지 바스크와의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서였지만.
핵심 포인트는 오러 낭비가 되지 않도록 아주 미세한 양만 발출하는 것.
그런데 롬펠 대공이 그것을 똑같이 재현해낸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릭에게 롬펠 대공이 말했다.
“내가 이걸 할 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럴 수가…….”
“110살이나 먹었는데 살면서 이런 발상 한 번 안 해봤을까봐? 그래도 내가 40대 때 한 것을 그 나이에 성공하다니 칭찬해줘야겠군. 발출하는 오러량의 미세한 컨트롤이 힘들었을 텐데.”
“이런 빌어먹을 괴물 새끼!”
“크하하, 듣기 좋은 칭찬이다!”
롬펠 대공이 껄껄 웃을 때였다.
“시끄럽다!”
싸움 중에 무슨 잡담이냐는 듯, 바스크가 노호성을 지르며 롬펠 대공에게 돌진했다.
“와라!”
롬펠 대공은 바라던 바였다는 듯이 배틀 액스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그대로 충돌하면 분명 바스크의 손해였다. 롬펠 대공의 파워는 상식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바스크는 힘을 빼는 것을 선택했다.
충돌 순간,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롱 소드를 회수하고 다시 반대로 휘둘렀다. 공격의 방향을 수시로 전환하며 현란하게 수를 놓는 바스크의 롱 소드.
방향 전환이라면 무거운 배틀 액스보다 롱 소드가 유리했기 때문에 택한 공격 패턴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롬펠 대공.
한 손으로 배틀 액스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며 퍼붓는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무게 중심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안정적인 자세에서 말이다.
철벽같은 방어에 막힌 바스크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릭 역시 합세했다.
오러워크로 빠르게 쇄도하며 롬펠 대공의 이마를 향해 찌르기를 펼친 것.
롬펠 대공은 마찬가지로 오러워크를 펼쳐서 두 사람의 합공에서 빠져나갔다. 이는 바스크가 노렸던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바스크는 오러 블레이드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멀리서 휘두른 오러 블레이드가 롬펠 대공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러 블레이드가 롬펠 대공에게 날아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날려 보내 원거리 공격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바스크가 익힌 기술이었다. 릭의 오러워크에 대항하여 만든 필살기였다.
이를 보는 롬펠 대공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롬펠 대공도 오러 액스가 맺힌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오러 액스도 배틀 액스를 떠나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두 기운이 충돌하여 쩌렁쩌렁한 폭발음을 냈다.
주변의 굵직한 활엽수들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흔들렸다.
쏟아지는 나뭇잎들.
놀라 입을 쩌억 벌린 릭과 눈을 부릅뜬 바스크.
롬펠 대공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내가 50대 중후반 무렵에 했던 건데, 자네는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
“……정말로 괴물이구나.”
바스크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릭이 대꾸했다.
두 부자는 기가 막혀서 롬펠 대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의문. 자신들도 110살쯤 먹으면 저런 괴물이 될 수 있을까?
***
이제는 혼트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템플 오브 나이트.
아직 전투의 상흔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물의 복도를 세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려 퍼진다.
한 사람은 창백한 안색과 무표정한 얼굴을 가진 젊고 야윈 청년. 그리고 그 뒤를 장년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의 중년 사내는 그 두 사람과 살짝 떨어진 위치에서 묵묵히 뒤따르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어느 방의 닫힌 문 앞에 이르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흑십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세 사람을 보고 황급히 부복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가볍게 턱짓했다. 비키라는 뜻이었다. 흑십자기사단은 서둘러 좌우로 길을 비켰다.
할슈타인 후작이 문을 열었다.
황제는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
륭겐 후작은 침상에서 일어나 카르스 황제 앞에 부복했다.
카르스 황제는 가볍게 손짓했다.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일어서는 륭겐 후작에게 카르스 황제가 마침내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몸은 어떤가?”
“운신에는 지장 없습니다.”
“전투에는?”
“아직 지장이 있지요. 오러 홀의 균열이 완전히 아물지 않았으니까요.”
“얼마나 걸리지?”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회복에 집중하라. 내가 구상한 전술에는 그대도 필요하니까.”
“폐하께서 필요로 하시니 영광이군요. 그런데 폐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정말로 가능한 것입니까?”
륭겐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옛날, 그 베잘리우스 대공이 썼다던 그 전설상의 전술이 말입니다.”
―19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