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 회: 경영의 대가 18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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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펠 대공은 정찰을 명했지만, 정찰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산맥에 올려 보낸 정찰병이 줄줄이 연락두절이 된 것이다.
“얄미운 짓을 하는구먼.”
적은 이쪽이 정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걸 훼방 놓고 있었다.
시원하게 한 판 붙어보자, 가 아니라 소소한 부분부터 철저하게 방해해서 싸움을 길게 질질 끌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미 유리한 지형에 자리를 잡아놓고 방어태세를 완비했으면서도, 한 번 올 테면 와보라는 배짱을 부리지 않는다.
롬펠 대공의 경험상 이런 적이 더 까다로웠다.
“묘하게 하는 짓이 산적 같은 놈들일세.”
롬펠 대공은 저도 모르게 예민한 직감으로 핵심을 짚었다.
적군의 모습이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서 토벌대를 온갖 잔 수작으로 괴롭히는 산적들의 행태와 비슷했다.
산속에 근거지를 여러 개 구축해놓고, 불리해지면 다른 근거지로 달아나 다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토벌대를 수고롭게 만드는 그런 전략적 형태가 리간드 영지군에게서 보였다.
‘자, 이놈들을 어떻게 요리해볼까?’
머리를 굴려보려던 롬펠 대공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로버트 이놈아! 이리 좀 와 봐라!”
“말버린 자작입니다. 제대로 좀 불러주십시오, 대공 전하.”
40대 후반의 날씬한 중년 사내가 다가와 부복했다.
로버트 말버린 자작.
그는 아주 어릴 적에 롬펠 대공에게 거두어진 인물로, 지금은 롬펠 대공가의 수석기사이자 이 전쟁에서 롬펠 대공의 부장(副將)으로 활동 중이었다.
본래는 농노의 자식에 불과했으나, 우연히 길을 지나던 롬펠 대공이 자질이 ‘아주 약간’ 있어 보인다며 거둬들였다.
롬펠 대공은 성격상 정식으로 제자를 두어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제자나 마찬가지로 간간히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륭겐 후작이다.
하지만 만약에 롬펠 대공에게 정식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을 한 명 꼽자면, 누구나 지목하는 인물이 바로 로버트 말버린 자작이었다.
어릴 적부터 롬펠 대공을 가까이서 섬기면서 무예를 익힌 끝에 오러 엑스퍼트 중급에까지 이르렀는데, ‘아주 약간’이라고 했던 롬펠 대공의 말대로 실력 향상은 거기서 멈췄다.
그 대신 롬펠 대공의 주변에 산적한 귀찮은 대소사(大小事)를 전담하여 사실상 롬펠 가문을 경영하는 집사 같은 인물이 되었다.
롬펠 대공이 대공이라는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이 전부 내팽개치고 멋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귀찮은 일들을 말버린 자작이 떠맡은 덕분이었다.
귀찮아서 가족도 만들지 않은 롬펠 대공이기에, 혹여나 롬펠 대공이 죽는다면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는 말버린 자작이 될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천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사실 롬펠 대공 또한 평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 주변 사람에게 태생을 트집 잡지 못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뒤 자르지 말고 자세히 좀 말씀해주시지요.”
“이 싸움 말이다.”
“정찰이 전부 차단된 것 때문에 부르셨군요.”
“그래 이놈아.”
“대공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적은 명백하게 이 싸움을 장기화시키고 싶어 합니다. 정찰부터 시작해 뭐든 사사건건 훼방을 놓아서 아군의 군사 활동에 제동을 걸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렇겠지.”
“장기전을 바라보고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놓은 적을 상대로 단기전을 생각하며 성급히 공격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싸움을 어느 정도 길게 보고 차근차근 공략해나가야 합니다.”
“흐음, 좀 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예. 돌무더기를 한꺼번에 잔뜩 쏟아 붓는다고 성벽이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나하나 쌓아나가야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고지(高地)를 점령하면 주변 지형 파악이나 정찰에 유리해집니다. 고지를 하나하나 공략해나가야지요.”
“놈들은 그때마다 족족이 방해하겠지.”
“예.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는 것이 모두 공성전 같을 겁니다.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합니다. 대신 이쪽은 병력이 압도적이잖습니까.”
“오냐, 알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롬펠 대공은 막사에서 걸어 나왔다. 말버린 자작도 따라 나왔다.
주위를 스윽 훑어보던 롬펠 대공이 우측 멀리에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저 산이다!”
말버린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고지를 점령하겠습니다.”
“녀석, 그것뿐만이 아니다.”
롬펠 대공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처음 가리켰던 높은 산 일대를 전부 포함시켰다.
“저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깡그리, 동시다발적으로 공략하자. 놈들에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는 법임을 가르쳐줘야지.”
“아……!”
말버린 자작은 살짝 전율했다.
늘 이런 식이다.
과격하고 무식한 방법인데도, 핵심은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
롬펠 대공 군단의 움직임이 극단적인 변화를 맞이하였다.
병력을 움직이기에 앞서 일단 정찰부터 하려던 것이 이전까지의 태도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태도가 달라졌다. 갑작스럽게 3만에 가까운 병력이 대거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가 롬펠 대공 본인 또한 스스로 움직였다.
가장 높은 고지의 공략은 롬펠 대공이 1만 병력을 이끌고 공략을 맡았고, 그 일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은 병력을 천인대나 백인대 규모로 분산해서 제각각 점령하게 했다.
리간드 영지군이 고지 점령을 저지하려 해도 소용없도록 무차별로 공세를 퍼붓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고지 100개를 일제히 공략하면, 그중 30개는 방해를 받아 실패해도 다른 70개 고지는 점령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다소 무식한 방법이나,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혼트 제국군이기에 펼칠 수 있는 아주 신속한 전투 전개였다.
지능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전략은 의외로 베일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요.”
회의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테이블에는 군사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특이한 군사지도였다.
영지의 모든 지형이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똑같았다. 이쯤 되면 지도가 아니라 명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군사지도는 과거 카록이 운디네를 시켜서 물감을 움직여 순식간에 만든 지도였던 것이다.
영지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출몰 지역을 표기하여 숲에서 활동하는 주민에게 주의를 주고, 용병들에게는 몬스터 사냥을 용이하게 하는 용도로 도입된 지도였다.
그러나 조선소 건립과 함께 영지민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더 이상 숲을 다니며 몬스터나 맹수를 만날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를 해결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선소에 취직해 좋은 급여를 받으며 안전하고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
게다가 조선소 건립 때문에 그 일대 지역을 개발하면서 몬스터를 몰아내고 도시를 건설 중이었다.
이제 조만간 그 도시가 리간드 영지의 중심지가 될 터였다. 이번 전쟁만 무사히 넘긴다면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도 더 이상 이 지도의 존재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에 영주대리 베일은 이것을 회수하여 군사지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너무나 상세해서 공개해놓기에는 영지안보에 문제될 소지가 있기도 했다.
문제의 군사지도는 빨간 못이 잔뜩 꽂혀 있었다.
빨간 못은 바로 롬펠 대공 군단을 뜻했다.
리간드 영지를 둘러싼 산맥의 일정 부분이 일제히 빨간 못으로 효기되어 있었다.
“아주 머릿수로 밀어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것이로군.”
리처드 벅이 군사지도의 빨간 못들을 보며 징그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바스크와 릭, 그리고 딘과 렉스가 이끄는 경비대는 여전히 산맥에 있었다. 그들은 적 정찰병을 사냥하다가 갑자기 대군이 들이닥치자 황급히 물러선 상황이었다.
“베일 경, 이게 위험한 상황입니까?”
하딘이 물었다.
베일이 답했다.
“아직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적군이 고지를 점령하는 건 어디까지나 정찰을 위해서지 우릴 타격하려는 목적은 아니니까요. 다만 정찰 단계에서 적의 행동을 지연시키려 했던 첫 번째 작전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혼트 제국군은 정찰을 위해 롬펠 대공과 3만 군대가 동원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3만 병력으로 여러 고지를 일제 공략을 시도하는 과감함까지.
최종목적이 최대한 시간을 벌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롬펠 대공 군단을 붙잡아두는 것인 리간드 영지군으로서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베일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