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 회: 경영의 대가 18권 -->
“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고?”
“별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사전의 예측에 벗어난 사건은 한 가지밖에 없지요.”
“그게 뭔데?”
“재상 각하께서 뮤트 공작가 분들을 예상보다 더 많이 살리셨다는 것이지요. 폐하께서도 방금 전에 보고를 받으시고는 기뻐하십니다.”
“공을 치하 받을 기분이 아니야.”
“이해합니다. 불가피한 일이지만 어쨌든 패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전략상 승전이나 다름없으니 너무 침울해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는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셨습니다.”
“승전이나 다름없다, 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카르스 황제도 그렇게 생각할까? 예상보다 뮤트 공작령 공략이 지체되어서 전략상 손해를 입었다고?”
“…….”
제론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우리로서는 전략적으로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카르스 황제의 입장에서도 결국은 예상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정도겠지. 황제의 정복 전쟁은 아무 지장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거야.”
“……동의합니다. 레던 왕성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고, 뮤트 공작령에서도 선방을 했지만, 아직 카르스 황제에게 타격을 줄 만한 일은 하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상대는 대륙을 정복하겠다고 진심으로 마음먹은 자인데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요.”
“나도 알아. 다만…….”
문득 가슴이 메었다.
스승, 사제들, 병사들,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 라우렐 남작.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 걸까. 별달리 면식은 없었지만, 라우렐 남작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쉽게 짐작되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그런 남자였겠지. 그리고 아직 젊었다. 더 오래 살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우렐 남작은 죽었고 병사들은 통곡을 하였다.
벌판에 나뒹구는 수많은 병사의 시체들…….
우리들도, 카르스 황제도 이리 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예정된 범위 안에서 까마득히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우리가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 많은 목숨이 덧없이 죽어나가도 예정된 일이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있단 말이냐!
그저 평범한 상인이었던 나는 다시 삶을 반복하면서 이 나라에서 가장 칭송받는 인간이 되었다. 죽임당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처럼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학살한 혼트 제국군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겠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문득 제론이 말했다.
“감상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재상 각하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제론은 단호하게 말했다.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정신병자입니다. 우리도 미치지 않으면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피 뭍은 손을 보며 후회와 반성을 하는 일은 전쟁이 끝나고 하면 됩니다.”
난 제론을 쳐다보았다.
제론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
“지랄 같은 세상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악인이 악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악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선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그와 똑같은 악랄한 수단을 가진 사람만이 악인을 이깁니다.”
제론은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캠벨 자작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악랄한 수단을 가진 사람…….
그 표현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캠벨 자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예를 갖췄다.
에릭 국왕은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재상. 정말 훌륭한 활약이었어.”
기분이 무척 우울하지만 에릭 국왕의 면전에서 그런 감정을 표현할 필요는 없지.
나는 내색하지 않고 겸양을 했다.
“저뿐만이 아니라 뮤트 공작가 모두의 분투로 거둔 성과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폐하.”
“암, 물론이고말고.”
그제야 에릭 국왕은 캠벨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뮤트 공작가의 수석기사 캠벨 자작인가?”
“예, 폐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대도 수고가 많았다. 이 공로는 차후에 치하할 것이다.”
“폐하, 저는 대패하여 병사를 잃은 패장이옵니다. 공적을 치하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제 사제 라우렐 남작이옵니다. 부디 죽은 사제의 넋을 기려주시옵소서.”
“그 일에 대해서도 보고를 받았다. 최선을 다해 병사를 살려온 지휘관을 처벌할 수야 있겠느냐. 하지만 라우렐 남작에 대해서는 추후에 충분히 그 공적을 기릴 테니 염려 말아라. 흠, 그건 그렇고 스승의 상태가 궁금하겠군?”
“예.”
“뮤트 공작은 무사하다. 현재 휴식을 취하며 힘을 회복 중에 있으니 이만 물러가 스승을 찾아가보도록 하라.”
“폐하의 성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캠벨 자작이 스승 뮤트 공작을 만나러 물러난 후, 난 남아서 에릭 국왕과 루이, 제론 등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에릭 국왕은 템플 오브 나이트 전투의 상세한 경위를 듣고 싶어 했고,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빠짐없이 설명했다.
니젤 쥬르덴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은 패전도 내가 들은 바대로 전했다.
이 자리에는 에릭 국왕의 호위로 특별 임명된 존 스페이도 함께 있었는데, 존은 니젤이 활약한 이야기를 듣고 눈을 빛냈다. 라이벌이 만 단위 병력의 큰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니젤 쥬르덴이라. 확실히 존 스페이와 겨뤘다던 그 젊은 적장이로군.”
“예, 폐하.”
에릭 국왕도 니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기야, 쥬르덴 후작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뮤트 공작가의 군대를 후퇴시킬 수 있었는데 완벽한 마무리에 훼방을 놓았군.”
뮤트 공작가의 군대는 상당히 훈련을 잘 받은 정예였다. 그 병사를 온전히 살려올 수 있었더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니젤은 과감한 총공격으로 뮤트 공작가 군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살아 후퇴한 병력은 6천여 가량. 그래도 뮤트 공작과 그 제자들 다수가 살아남았으니 나름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전생 때는 그 아까운 인재들이 전부 몰살당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재상의 활약으로 저들도 큰 피해를 봤으니 손실보다 더 큰 이득을 보았다고 봐야겠지. 레던 왕성 전투 때도 그렇고 재상 그대의 정령술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군. 10만 대군을 상대로 템플 오브 나이트를 홀로 막다니, 하하하. 그대는 점점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가는군.”
“과찬이십니다.”
하나도 안 기쁘다.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기분을 감추고 애써 웃으며 에릭 국왕의 칭찬에 화답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 챘는지 제론이 나서서 화제를 돌린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어찌 되었건 결국 륭겐 후작과 쥬르덴 후작은 레던 왕국의 정문에 해당하는 뮤트 공작령을 장악했고, 카르스 황제가 본군을 이끌고 입성하였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진군을 개시할 겁니다.”
“알고 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지.”
주인공인 카르스 황제가 마침내 레던 왕국에 당도했다.
내가 황도 티베리우스에서 성문을 모두 파괴하는 등의 방해도 놓고 템플 오브 나이트에서 오랫동안 저항하며 시간을 끄는 등 수많은 저항을 했다.
레던 왕성 전투에서 쥬르덴 후작 군단을 패퇴시키기까지 했으니 현재까지 전쟁은 우리의 페이스였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카르스 황제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전체적인 전쟁 국면의 밑그림이 크게 달라진다.
제3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자면, 결국 우리 레던 왕국은 왕실이 레던 왕성을 포기하고 이곳까지 후퇴했으며, 철벽처럼 버티던 뮤트 공작령도 점령당했다. 그리고 황제는 가신들이 준비해놓은 길을 밟으며 유유히 들어왔다.
……라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