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 회: 경영의 대가 17권 -->
전투에 있어 기동력이 얼마나 승패를 크게 좌우하는지는 지난 전쟁사를 훑어봐도 알 수 있었다.
싸워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의 사례만 보아도 안다.
베잘리우스 대공은 보병으로 정면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동시에 좌우익에 배치한 기병으로 측면이나 후면을 쳐서 적 진영을 붕괴시키는 전통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나아가 기병으로 양 측면과 후면을 동시에 쳐서 결과적으로 포위 섬멸하는 등 변화무쌍한 용병을 펼쳤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목민족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덕에 기병 전력에서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전 사례를 돌이켜보면 현재의 형세가 얼마나 불리한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뮤트 공작가 측이 유리한 면도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캠벨 자작과 사형제들.
뮤트 공작에게 사사 받은 제자 백여 명이 모두 포함된 까닭에 정면에서 맞붙는다면 오히려 막강한 돌파력으로 적을 쳐부술 수 있었다.
캠벨 자작은 그 점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우리 사형제의 역할이 매우 크다. 우리가 기병 3천과 함께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아군의 활로를 뚫는다.”
“양 측면이나 후방에서 기습해오는 경우도 대응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궁병을 좌우익과 후미에 분산배치해서 적을 발견할 때마다 응사하도록 한다.”
캠벨 자작의 말을 곱씹어본 라우렐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최선의 수인 것 같습니다. 적도 정면대결보다는 치고 빠지는 유목민족 특유의 싸움법을 택할 테니까요.”
“아무튼 서두르자. 쥬르덴 후작의 본대가 우리 뒤를 따라잡기 전에 최대한 빨리 진군해야 한다.”
“예.”
캠벨 자작은 라우렐 남작을 비롯한 사제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진군을 명령했다.
의논했던 대로 기병대 3천이 캠벨 자작 사형제들과 함께 선두에 배치되고, 궁병은 좌우익과 후미에 배치된 진영을 유지한 채 뮤트 공작군은 이동을 개시했다.
정면에는 니젤 쥬르덴의 2만 기병대.
배후에는 템플 오브 나이트 공략을 완료하고 추격을 시작하려는 쥬르덴 후작의 10만 대군.
그리고 카록 리간드 또한 어딘가에서 그들을 뒤따라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
“보고합니다! 뮤트 공작군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정찰을 마치고 헐레벌떡 돌아온 백인장이 말에서 내려 니젤 앞으로 걸어왔다.
니젤이 물었다.
“병력규모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정확한 병력배치는?”
“기병을 선두에 세우고 좌우익과 후미에 궁병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적장 캠벨 자작을 비롯한 뮤트 공작 제자들도 정면에서 앞장서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흐음.”
니젤은 보고를 듣자마자 캠벨 자작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유목민족 특유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극히 경계하는 배치가 아닌가.
“뮤트 공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차가 있었나?”
“없었습니다.”
“쳇. 사전에 먼저 내빼버렸구나.”
뮤트 공작이 이미 오래 전에 전장을 이탈했음을 알아차린 니젤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륭겐 후작과 결투를 벌이느라 힘이 빠진 뮤트 공작을 사로잡는다면 실로 엄청난 전과를 거두는 셈이었다. 아쉽게도 하늘은 니젤에게 그런 찬스까지는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인정해. 내 주제에 뮤트 공작은 너무 과분하지.”
아쉬움은 깨끗이 잊고 눈앞에 있는 뮤트 공작군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양 진영 간의 거리는 약 16킬로미터. 보병의 기본적인 진군속도를 감안하면 몇 시간 안에 맞닥뜨릴 거리였다.
아니, 전원이 기병인 니젤의 군대가 적극적으로 달려든다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전투가 시작될 터였다.
하지만 니젤은 움직이지 않았다. 뮤트 공작군이 이쪽으로 다가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다만 분산 배치했던 10개의 천인대는 뮤트 공작군을 향하여 아주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두어 시간이 흐르자 뮤트 공작군이 가시거리로 접근하였다. 이를 확인한 니젤은 씨익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후퇴.”
지시를 따르는 천인장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기다리던 적이 눈앞에 두고 후퇴라니?
하지만 이어지는 니젤의 설명에 다들 납득할 수 있었다.
“적의 진군속도가 빠르다. 더 걷게 해줘라.”
“아!”
천인장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계속 일정 거리를 두고 물러서다가 긴 행군으로 적이 지쳐있을 때 싸우겠다는 의도였다.
니젤이 눈앞에서 보란 듯이 후퇴하자 뮤트 공작가 측은 당혹해했다.
“후퇴라고?”
놀란 캠벨 자작에게 라우렐 남작이 말했다.
“대사형, 우리가 지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오히려 여유롭게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적장은 정말로 뛰어나구나.”
캠벨 자작은 고민이 깊어졌다. 이미 어려운 상황인데 적장은 또다시 난제를 제시했다.
“병사들이 지친 상태에서 싸우면 불리해지는데, 그렇다고 진군속도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진군 페이스를 낮춰서 병사들의 체력소모를 줄여야합니다.”
“행군속도를 줄이면 쥬르덴 후작의 본대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대사형, 잊으셨습니까? 아직 재상 각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우리와 합류하지 않고 계시는 것은, 쥬르덴 후작의 추격을 막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재상 각하를 믿고 페이스를 늦춰야 합니다.”
“으음, 그도 그렇구나. 재상 각하께서 짊어지신 짐이 너무 무거운 게 아닌지 싶다.”
혼자서 10만 대군과 싸운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캠벨 자작으로서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아찔한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카록에게 빚진 기분이 들었다.
“대사형,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적을 이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진군 속도를 늦추겠다.”
이윽고 뮤트 공작군은 진군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움직였다.
니젤 군대 또한 그 페이스에 맞춰서 천천히 물러서며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언제든 싸움을 개시할 수 있는 대치거리를 유지한 채로 시간은 초초하게 흘렀다.
***
마침내 본격화된 전쟁.
레던 왕성 전투에 이어서 뮤트 공작령과 바덴 강 유역에서도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혼트 제국도 레던 왕국도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레던 왕국이야 전쟁에서 패하면 곧 멸망이니 당연했고, 혼트 황실 또한 이번 원정에 실패하면 지금껏 절대적이었던 황권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양측 모두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안타레스 백작과 린델 백작이었다. 레던 왕실에 등 돌리고 혼트 제국에 투신한 두 사람은 입지가 미묘한 탓에 누구보다도 전장의 판도를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그들은 정보망을 총동원하여서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전황(戰況)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레던 왕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뜻밖에도 쥬르덴 후작이 패하지를 않나, 뮤트 공작가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를 않나…… 레던 왕실도 레던 왕성을 포기하고 순조롭게 이동하고 있다고 하오.”
린델 백작이 불안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안타레스 백작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던 왕실이 예상보다 더 전쟁을 잘 치르고 있나보군. 제법일세.”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소!”
린델 백작이 역정을 냈다.
“엄청난 대군이니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니 뭐니 하더니,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디 하나 전황이 순조로운 곳이 없잖소! 이러다가 전쟁에서 혼트 제국군이 지기라도 하면 우리도 무사할 수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