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6 회: 경영의 대가 17권 -->
-크헤헤! 뜨거운 선물!
샐러맨더는 사악하게 웃으며 반 이상 파묻힌 흑십자기사단의 머리 위로 거대한 불덩어리를 던져주었다. 표현 그대로 뜨거운 선물이었다.
“아, 안 돼!”
“어서 막아줘!”
흑십자기사단이 통구이가 될 위기 앞에서 기겁을 해댔다.
“구, 구해야 돼!”
“하는 수 없다! 흑십자기사단을 구해!”
나를 사로잡으려 했던 마법사들은 날 포기하고 흑십자기사단을 구해야 했다.
콰르릉!
마법사 몇 명이 실드를 펼쳐서 불덩어리를 막아냈다. 다른 마법사들은 파묻힌 흑십자기사단을 꺼내주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운디네, 샐러맨더, 실프, 전부 이리 와!”
정령들은 군말 없이 나에게 뛰어들었다.
운디네는 내 체액에 깃들었다. 샐러맨더는 내 체온에 깃들었다. 실프는 내 호흡을 따라 폐에 스며들었다.
정령속박마법에 당하기 전에 내 몸속에 숨겨버린 것이다.
“노움, 가자!”
-응!
나는 노움과 함께 땅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내 몸이 땅속으로 저항 없이 쑤욱 가라앉았다. 샐러맨더가 두더지라고 놀리는 나의 특기, 땅속에 숨기다.
정령의 감각으로 지상의 상황을 쭉 살폈다.
마법사들은 흑십자기사단을 땅속에서 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혼트 제국군은 성벽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부순 성문으로 진입하려던 병사들은 흙벽을 부수기 위해 충차를 동원했지만 여의치 않은 분위기였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봤지만 역시나 어마어마한 대군을 나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기란 무리였다.
다행히 내가 시간을 끈 동안 캠벨 자작은 전 병력을 비밀통로로 무사히 대피시켰다. 하지만 많은 병력을 이끌고 비밀통로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속도는 매우 느렸다. 추격을 당하면 금방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이미 2만 기병이 산길로 빠져나가 퇴로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고, 템플 오브 나이트마저 10만 대군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공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가만?”
템플 오브 나이트의 성벽에 잔뜩 밀집되어 있는 혼트 제국군의 대병력을 보니 불쑥 욕심이 생겼다.
상급 정령술의 강대한 파괴력을 보여주면 놈들의 추격의지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다.
예전에 린델 백작령에서 깽판 부릴 때처럼 지진을 일으켜 성벽을 무너뜨려버리면 어떨까? 혼트 제국군을 성벽 잔해로 깔아뭉개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수만 명을 일격에 몰살시킬 수도 있으리라.
단, 템플 오브 나이트의 성벽은 굳건하기가 린델 백작령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규모도 클뿐더러, 수십 년간 공들여 보강한 방어물이니 무너뜨리려면 아주 많은 정령친화력의 소모가 요구된다.
이미 흑십자기사단과 치열하게 대결을 했고 마법사들과도 끊임없이 드잡이를 하는 통에 이미 많은 정령친화력을 소모한 나였다.
여기서 성벽까지 무너뜨리고 나면 여력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아, 이거 갈등되네.”
나는 머리를 싸쥐었다.
캠벨 자작 일행을 적의 추격으로부터 무사히 후퇴시키려면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 하지만…….
혼트 제국군의 수만 병력을 너끈히 몰살시킬 절호의 찬스를 그냥 지나치기도 아깝지 않은가!
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갈등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때 문득 쥬르덴 후작의 지난 전적(戰績)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지난 유목민족 반란 때 휘하 병력을 거의 괴멸 당하다시피 했다. 적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그리고 황제를 대신한 방패막이로 나서면서 말이다.
그렇게 혼트 제국군의 현 지휘관들 중 가장 많은 병력을 잃은 인물이지만, 일등공신으로 인정받았으며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것은 그가 병력을 잃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중요한 건 병력이 아니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는 큰 틀에서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래.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기서 적군을 다수 사살한다고 해서 전쟁 판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 자리에 있는 10만을 전부 몰살시킬 수 있다면 모를까, 흑십자기사단도 있고 마법사들도 있으니 내가 온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2,3만 수준에 그칠 것이다.
50만이 넘어가는 혼트 제국군의 총병력 중에서 그 정도 피해는 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캠벨 자작을 포함한 뮤트 공작의 제자들은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혼트 제국과 달리 우리 레던 왕국은 전쟁에 능한 인재들이 많지 않았다. 이 나라의 영주들 대부분은 평화에 익숙한 자들이기 때문에 뮤트 공작과 제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
일의 경중을 냉정하게 파악하자.
적을 많이 물리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처음 목적대로 뮤트 공작가 일행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일에 집중하자. 아직 갈 길이 멀어.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캠벨 자작 일행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캠벨 자작이 이끄는 뮤트 공작가 군대는 모두 비밀통로에 진입하여서 후퇴하고 있었다. 비밀통로를 가로질러 출구로 빠져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해보였다.
“노움!”
-응, 아빠.
노움이 폴짝 내 머리 위해 앉았다. 난 노움의 뺨을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비밀통로의 입구를 막아.”
-응!
노움이 힘을 발휘하자 비밀통로의 입구가 흙벽으로 가로막혔다. 흙벽을 계속 설치해서 2중 3중으로 틀어막아버렸다. 이렇게 해놓으면 추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우리도 슬슬 달아나자.”
나는 정령들과 함께 땅속을 이동하며 전장을 이탈했다.
***
콰아아앙!
흑십자기사단은 분풀이를 하듯 성문을 막고 있던 흙벽을 부숴버렸다.
흙벽이 파괴되자 혼트 제국군 병력이 기다렸다는 듯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템플 오브 나이트를 점령했다!”
“우리의 승리다!”
고생 끝에 승리를 얻은 병사들은 잔뜩 들떠서 소리쳤다.
뒤이어 템플 오브 나이트에 입성한 쥬르덴 후작이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적이 빠져나간 비밀통로를 찾아라.”
뮤트 공작가는 아주 은밀하게 이곳을 빠져나갔다. 비밀통로라도 있지 않으면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탈출할 수가 없었다. 분명 레던 왕성의 리간드 후작가 저택과 마찬가지로 카록 리간드가 비밀통로를 만들어놓았을 터였다.
혼트 제국군은 뮤트 공작가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수색했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병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저택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여기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식당에서 비밀통로의 입구가 있음이 밝혀졌다.
많은 병력이 지나간 흔적이 뚜렷한 걸로 보아, 뮤트 공작군이 탈출에 이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비밀통로 입구는 이미 카록 리간드가 또 장난질을 쳐놓고 난 뒤였다.
흙벽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공병들이 삽과 곡괭이로 부수려 해보았지만, 흙벽은 이번에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튼튼했다.
“저희가 부술까요?”
흑십자기사단이 쥬르덴 후작에게 다가와 물었다.
쥬르덴 후작은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쪽은 다른 기사들을 시켜도 되네. 그대들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마법사들과 함께 뒤편 산길로 나아가 적을 추격하게. 내 아들 니젤이 이끄는 기병대와 합류해서 뮤트 공작가를 치게. 카록 리간드가 훼방을 놓을 테니 그대들의 힘이 필요할 걸세.”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말을 잃어서…….”
기사에게 무기 다음으로 소중한 말을 전원이 잃었기 때문에 흑십자기사단은 상실감과 치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군마를 제공해주지.”
쥬르덴 후작은 기병대로부터 군마를 차출해 흑십자기사단에게 지급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에게도 군마가 지급되었다. 적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빠른 기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카록 리간드의 목을 들고 돌아와 설욕하겠습니다!”
“카록 리간드보다는 뮤트 공작과 그 제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처치하는 데 집중하게.”
“염려 마십시오!”
흑십자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그들은 니젤이 2만 기병대를 이끌고 통과했던 뒤편 산길로 향했다.
쥬르덴 후작은 다른 기사들로 하여금 오러로 흙벽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오러 엑스퍼트 급 이상의 기사들이 선두에 서서 흙벽을 부수며 비밀통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카록 리간드…….”
쥬르덴 후작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차려주었는데 넘어오지 않았군.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