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 회: 경영의 대가 17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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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뮤트 공작가에 온 지 사흘째가 된 날, 마침내 후퇴작전은 시작되었다.
깊은 밤, 마침 달빛도 밝지 않아 은밀히 행동하기에 적합한 시간이었다.
캠벨 자작의 지휘에 따라 뮤트 공작가의 2만여 병력이 비밀통로를 통해 후퇴를 개시했다. 물론 성벽 각 구역마다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두어서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짜임새 있는 후퇴가 이루어졌다.
여유 있는 크기로 만든 비밀통로였지만, 2만이나 되는 숫자가 이용하기에는 좁은 것이 사실.
덕분에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캠벨 자작의 통솔력과 잘 잡힌 뮤트 공작가 병사들의 군기 덕에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템플 오브 나이트의 성루 위에서 혼트 제국군을 주시했다.
우리가 템플 오브 나이트에서 후퇴를 완료할 때까지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쥬르덴 후작은 그렇게 녹록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가 후퇴할 거라는 사실도 예상하고 있다. 분명 이런 야밤에도 우리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을 터. 템플 오브 나이트의 성벽 위에 보이는 병사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걸 눈치 채면 당장에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내 진짜 활약은 그때부터다. 그때를 대비해 정령친화력도 완전히 회복된 상태다.
레던 왕성 때처럼 적이 방심해줬으면 좋겠지만, 쥬르덴 후작은 방심할 사람이 아니지. 이미 한 번 크게 데여봤으니, 정령술에 대한 대응력이 보다 좋아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2만 대군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신나게 뒤집어놓다가 불리해지면 달아나면 그만인데, 뮤트 공작가 사람들을 무사히 대피시켜야 한다는 책임이 있으니 어깨가 무거워진다.
앞으로도 전쟁 내내 이런 양상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자유롭게 활약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카르스 황제는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전략을 펼치리라.
“성벽 1구역 인원부터 철수 개시!”
“절대로 소리 내지 말고 소란 피우지 말고 움직여라.”
“고개 더 안 숙여?”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비밀통로로 철수를 개시했다. 병사들은 상체를 최대한 숙여서 성벽 뒤에 숨은 채 이동했다. 적에게 눈에 띠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고요한 밤이라 조금만 소리를 내도 크게 들린다. 때문에 병사들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혼트 제국군 측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나는 언제든지 싸울 태세를 갖췄다.
“저것 봐. 뭔가 움직이지 않아?”
“글쎄. 잘 안 보이는데.”
“잘 봐봐!”
“으음……. 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이럴 줄 알았지. 혼트 제국군 병사들도 이쪽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병사들은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혼트 제국군 진영 여기저기서 횃불이 켜지더니, 대규모 병력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후퇴를 지휘하던 캠벨 자작은 혼트 제국군의 움직임을 보고서 이를 악물었다.
“놈들이 눈치 챘군. 서둘러라! 적에게 들켰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그제야 병사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혼트 제국군 병사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공성탑과 충차를 앞세워서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노움.”
-응, 아빠!
땅속에서 배꼼이 얼굴을 내미는 귀염둥이 노움.
“재미있는 놀이 할까?”
-응! 할래!
“일단, 어스 핸드로 살짝 떠밀어서 저 공성탑부터 줄줄이 넘어뜨리자.”
-알았어!
흙이 뭉쳐서 커다란 손바닥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스 핸드 다섯 개가 공성탑들을 향해 날아갔다. 다섯 개의 공성탑이 어스 핸드에게 떠밀려서 우측으로 기우뚱거렸다.
“어어?”
“쓰, 쓰러진다!”
“대체 뭐야?!”
“이상한 손바닥 같은 게……!”
“아악! 일단 피해!”
쿠우웅! 콰앙!
공성탑들이 도미노처럼 일제히 쓰러지는 광경은 돈 주고도 구경할 수 없는 일대장관이었다. 육중한 공성탑에 깔려 수많은 혼트 제국군 병사가 죽음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혼트 제국군 한복판에서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옆으로 쓰러진 공성탑 다섯 개는 그 자체로 혼트 제국군의 공격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가 되었다.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는데 앞이 가로막혀서 나아갈 수 없자,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좋았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겨우 어스 핸드 다섯 개를 써서 저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긴 싸움을 대비해서 정령친화력을 많이 아껴야 하는 나로서는 최대효율의 공격을 해낸 셈이었다.
자, 이제 쥬르덴 후작이라면 레던 왕성 전투의 악몽이 떠올렸을 것이다. 뜬금없이 불의의 일격을 당했으니까.
그럼 정령술에 대응하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공격을 하자. 이번엔 좀 더 화끈하게!
“노움, 어스 스피어 100발. 되도록 십인장 이상의 장교를 노리자.”
-응!
“실프, 윈드 스피어 20발. 노움의 공격이 시작되면 그 소란을 틈타서 마법사들을 암살해.”
-내가 할 수 있을까…….
대답 좀 제대로 해라, 이 자식아!
100개나 되는 흙의 창이 하늘에 생성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거대한 흉기들이 일제히 혼트 제국군을 향해 낙하했다.
콰콰콰콰쾅―!! 콰콰쾅―!
어스 스피어 100발이 마치 신의 형벌처럼 혼트 제국군을 강타했다.
“끄아악!”
“사, 살려줘!”
“정령술이야! 카록 리간드라고!”
“레던 왕성에서도 이런 걸 본 적 있어!”
혼트 제국군 병사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템플 오브 나이트를 공격한 혼트 제국군은 성벽에 채 이르기도 전에 사상자가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십인장이나 백인장 등 장교들을 중점적으로 노렸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쓰러진 공성탑들과 합쳐서 혼란이 점점 가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란을 틈타서 나의 진짜 노림수가 시작되었다. 실프가 만들어낸 바람의 창 20개가 소리 없이 날아가 마법사들을 노린 것이다.
혼트 제국의 마법사들은 정령속박마법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처치해야 할 대상이었다.
콰악!
“크헉!”
콰직―!
“꺽!”
윈드 스피어가 사신처럼 전장을 은밀히 누비며 마법사의 목을 꿰뚫었다.
“실드!”
“우릴 먼저 노릴 거다! 실드!”
혼트 제국군 마법사들도 대응은 빨랐다.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경각심을 갖고 대비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레던 왕성 전투 때도 나에게 마법사들이 몰살당한 탓에 크게 피를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카록 리간드의 존재가 확인되면 최우선적으로 마법사 전력을 보존할 것’이란 지침이 내려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윈드 스피어 20발을 날려서 마법사를 6명이나 처치했으니 큰 소득이었다.
좋아, 계속 이런 방식으로 나가자.
인명살상보다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정령친화력을 최대한 아끼고, 실프로 마법사들을 견제하는 것이다.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공격이 가능한 실프의 바람 공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마법사들은 겁을 먹고 방어에 전념하게 될 터였다.
이제 이런 자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악마 같은 놈을 불러야겠군.
“샐러맨더.”
-왜 이제야 불렀냐!
소환되자마자 샐러맨더는 대뜸 화를 냈다. 자기보다 노움을 먼저 불러서 싸움을 시작한 것에 뿔이 난 모양이었다. 근데 네가 뿔이 나면 어쩔 건데?
“적군의 진지를 불태워.”
-크헤헤! 알겠다! 또 불새가 되어서 날갯짓을……!
“직접 나서지 마! 또 나대다가 정령속박마법에 꽁꽁 묶이고 싶냐?”
-……알았다!
샐러맨더는 자기가 직접 가는 대신 작은 불똥을 수십 개씩 만들어내어 혼트 제국군 진영으로 쏘아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