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 회: 경영의 대가 17권 -->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린 륭겐 후작은 침상에서 간신히 상체만 일으킨 채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대체 며칠을 굶을 거야? 뱃가죽이 등에 붙겠군! 아무리 먹어도 배고파.”
산더미처럼 쌓인 호밀 빵과 건더기가 한가득한 돼지고기 스튜를 쉬지 않고 먹어치우면서 포도주를 병째 들이키는 륭겐 후작. 그 터프한 식사에 니젤은 혀를 내둘렀다.
반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쥬르덴 후작은 륭겐 후작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식판을 깨끗이 비워버린 륭겐 후작은 그제야 자신을 찾아온 두 손님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어! 내가 맛이 간 동안 고생 많았겠군.”
“상세는 많이 좋아지셨소?”
“아아, 다행히 어디 잘리거나 부러진 데는 없다. 오러를 회복하는 데는 오래 걸릴 것 같지만. 오러 홀에 살짝 금이 갈 정도로 내상을 심하게 입어서 말이야. 부서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지.”
오러 홀에 금이 갔다는 말에 니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러 엑스퍼트의 무인인 니젤은 오러 홀에 금이 간 게 얼마나 무서운 중상인지 잘 알았다.
오러 마스터인 륭겐 후작이 아니었다면 즉사하거나 평생 쌓아온 무위를 송두리째 잃어버려서 처음부터 다시 오러를 쌓아야 하는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심각한 내상으로 들리는데 정말 괜찮은 것이오?”
“괜찮아, 괜찮아. 예전에도 한 번 이런 부상을 당해본 적이 있으니까. 어떤 괴물 노인네의 100번째 생일파티에 갔다가 말이지.”
그 괴물 노인네란 롬펠 대공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을 듣고 니젤은 예전에 들어보았던 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 후로 륭겐 후작이 한동안 롬펠 대공의 저택에서 지냈다고 들었는데 부상을 입어서 요양했던 모양이구나.’
기가 찬 일이었다.
뮤트 공작과 일전을 치른 륭겐 후작의 무위도 니젤로서는 눈부시고 존경스러웠다. 그런 천하의 륭겐 후작을 때려눕혀서 한동안 요양하게 만든 롬펠 대공은 대체 얼마나 괴물이란 말인가.
“그땐 완쾌될 때까지 한 달쯤 걸렸는데 이번에는 그때만큼 심각하지 않으니 더 빨리 나을 거야. 근데 말하고 나니 왠지 내가 동네북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군.”
륭겐 후작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패배의 아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것처럼 분하지는 않은 듯했다. 어쩌면 승패를 떠나 뮤트 공작과의 대결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 일전에서 많은 것을 얻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표정들을 보니 내 안부만 물으려고 찾아온 건 아닌 것 같군.”
륭겐 후작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상대의 동작 하나만 보고도 많은 것을 파악하는 오러 마스터답게 얼굴 표정을 정확하게 읽은 것이다.
“맞소.”
쥬르덴 후작은 순순히 시인하고는 진짜 용건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륭겐 후작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후퇴한다.”
“확신하시오?”
“그래. 뮤트 공작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반드시 후퇴할 거야. 싸워보니까 알겠더군.”
“그렇게 단언하시니 그 의견에 따라 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소. 예상되는 적의 퇴로에 별동대를 매복시켜서 타격을 입힐 생각인데 어찌 생각하시오?”
“그거 좋군. 내가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는 모든 지휘권을 맡길 테니 알아서 하도록 해.”
다행히도 륭겐 후작은 쾌히 지휘권을 쥬르덴 후작에게 맡겼다. 자기 휘하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중시 여기는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태도였다. 하지만 륭겐 후작은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다.
“고맙소.”
쥬르덴 후작은 몇 마디 더 륭겐 후작의 안부를 물어본 뒤에 니젤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니젤.”
“예, 아버님.”
“전에 우리가 통과했던 샛길을 기억하느냐?”
“예.”
레던 왕성을 치기 위하여 뮤트 공작가의 눈을 피해 산지에 난 샛길로 7만 대군을 통과시켰더랬다. 니젤이 기억 못할 리 없었다.
“기병 2만을 이끌고 그 샛길을 통과하여 적의 퇴로로 예상되는 지역을 지켜라. 후퇴하는 적이 보이거든 절대로 온전히 보내지 마라.”
“예!”
“적의 눈에 띠지 않도록 움직여야 한다.”
“야밤을 틈타 은밀히 떠나겠습니다.”
니젤의 대답에 쥬르덴 후작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혼트 제국군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말이야.
난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템플 오브 나이트 일대를 통째로 내 감시 하에 두고 있었다.
전장 전체를 살피면서 병사들의 체력을 회복시켜주고, 때때로 혼트 제국군이 열심히 파던 땅굴을 사고로 위장해 무너뜨리기도 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 게으름 부리면서 전쟁을 치를 수 있다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역시 난 딱 정령사 체질이야.
아무튼 나는 혼트 제국군의 움직임 하나하나도 정신을 조금 집중하면 파악할 수 있다.
하물며 2만 명이나 되는 혼트 제국군 기병이 야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야밤에 포도주를 홀짝거리다가 적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나는 냉큼 캠벨 자작을 깨워서 알려주었다.
캠벨 자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후퇴할 걸 알고 퇴로를 막고 있는 겁니다.”
“뮤트 공작 전하께서는 이미 멀리 피신하신 뒤이니 적에게 잡힐 염려는 없지만, 문제는 우리로구려.”
“그렇습니다. 기병만 2만이라니 추격을 뿌리치기는 힘들 듯합니다. 정면 돌파로 퇴로를 뚫는 수밖에 없겠군요.”
“끄응…….”
나는 골머리를 앓았다.
뮤트 공작가의 전체 병력은 2만이 약간 안 된다. 기병만 2만 명인 적을 돌파하고 달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캠벨 자작을 비롯해 뮤트 공작의 제자들이 많이 있지만, 상대방은 기병 특유의 빠른 기동력을 충분히 살려서 괴롭혀올 터.
적 지휘관이 유능한 인물이라면 굳이 정면대결을 택하지 않고 치고 빠지며 병력을 잡아먹는 길을 택할 것이다. 혼트 제국군의 기병 중에는 유목민족 전사의 비율이 상당히 높으므로 그런 식의 발 빠른 전술을 잘 구사하리라.
혼트 제국군이니 적 지휘관이 무능할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겠다.
카르스 황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쥬르덴 후작도 누구에게 어떤 임무를 맡겨도 좋을지를 판단하는 안목이 훌륭할 테니까. 존과 명승부를 펼쳤다던 쥬르덴 후작의 아들 녀석도 곁에 있을 테고.
아, 그렇군.
생각해보니 기병 2만을 이끄는 지휘관이 그 니젤 쥬르덴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기병 쪽 보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고, 친아들이니만큼 쥬르덴 후작의 신뢰도 높으니까.
그렇다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존 스페이에게 들은 니젤 쥬르덴은 젊은 나이에도 상당한 지휘관이었다. 과감성도 있고 판단력도 빠르다.
캠벨 자작이 빠른 기병 2만을 이끄는 니젤로부터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지 점점 걱정이 커져만 간다.
“추격을 뿌리칠 수 있도록 내가 돕겠소.”
“예? 하지만 재상 각하께서는 이미 저희가 후퇴할 때까지 템플 오브 나이트에서 시간을 버는 역할까지 맡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재상 각하의 정령술이 대단해도 그토록 부담이 더해진다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문제없다고 장담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잖소.”
“……그렇군요. 그래도 다행히 적 기병 2만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것은 큰 수확입니다. 후퇴하기 전에 미리 정찰대를 풀어서 적 기병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최적의 퇴로를 찾겠습니다.”
“조심하시오. 내 추측이지만 그 기병 2만을 이끄는 자는 아마 니젤 쥬르덴일 거요.”
“쥬르덴 후작의 아들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저희 사전에 방심 같은 건 없습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그나마 당황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캠벨 자작의 태도는 나를 안심시켰다.
본래 위기가 닥치면 대중은 본능적으로 침착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따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캠벨 자작은 리더로서의 자질이 충분했다.
뮤트 공작이 정말 제자들을 잘 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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