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 회: 경영의 대가 17권 -->
나는 운디네와 감각을 공유하였다. 상급 정령의 광활한 감각으로 세상을 보니 템플 오브 나이트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파악되었다.
뮤트 공작가 병사들은 꾸역꾸역 밀려오는 혼트 제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혼트 제국군은 단순한 인해전술을 쓰는 게 아니었다. 모든 공성병기를 동원하고 땅굴을 파거나 성벽을 기어오르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아주 효율적인 공성(攻城)을 하고 있었다.
캠벨 자작이 얼마나 고충을 겪고 있을지 짐작이 간다. 잘 훈련되고 동작이 기민한 적군처럼 지휘관을 섬뜩하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템플 오브 나이트라는 험준한 요새를 끼고 방어하고 있긴 했지만 적의 숫자가 워낙 많은 탓에 뮤트 공작가의 병사들은 쉴 틈 없이 싸우며 혹사당하고 있었다. 뮤트 공작이 키워낸 군대답게 투지는 여전했으나, 곧 피로가 정신력을 좀먹기 시작할 것이다.
다행이 나는 그 피로를 덜어줄 능력이 있었다.
“운디네. 병사들의 피로를 회복시켜줘.”
-응.
운디네는 눈에 띠지 않게 성벽 각 구역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치유의 힘을 불어넣었다.
“응?”
“뭐지? 갑자기 기운이 솟는데.”
“이상한데. 어제부터 한 숨도 못 잤는데.”
병사들은 피로가 싹 풀리자 영문을 몰라 했지만, 눈앞에 적이 있어서 이내 의문을 떨쳐버리고 싸움에 전념했다.
그렇게 운디네가 성벽 전 구역을 돌고 나니 뮤트 공작가의 기세가 크게 올랐다. 피로가 풀린 탓에 힘이 나서 더욱 열심히 싸웠고, 덕분에 반대급부로 공격을 하던 혼트 제국군이 주춤했다.
적장 쥬르덴 후작도 이를 감지한 것일까?
혼트 제국군은 이내 공격을 중단하고 썰물처럼 후퇴했다. 템플 오브 나이트에서 쩌렁쩌렁한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참으로 묘한 경험이었다.
샐러맨더가 지지고 볶거나 노움이 한 판 뒤집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운디네로 하여금 피로만 풀어주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 정도의 도움이었는데도 혼트 제국군의 일시적인 후퇴로 이어지다니.
싸움에 있어서 기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다. 이래서 예로부터 장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것이었나 보다.
어쩌면 평소 과격하리만치 호쾌한 아버지의 생활 태도도 오랫동안 병사들을 이끌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지휘관을 따르면 절로 용기가 나니 말이다.
잠시 중단되었던 공격은 저녁 무렵에 또다시 시작되었다.
야간 전투임에도 혼트 제국군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훈련이 잘된 모습들이다.
나는 또다시 운디네로 하여금 병사들의 피로를 회복시켜주며 싸움을 도왔다.
그 덕분인지 밤 10시 무렵에 전투가 종결될 때까지 뮤트 공작가는 무사히 수성(守城)에 성공했다.
그날 자정 무렵에 캠벨 자작이 내 숙소를 방문했다.
잠시 방문 앞에서 내가 잠을 자고 있는지 기척을 살피려는 캠벨 자작.
그러나 이미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그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캠벨 자작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포도주 한 병을 개봉했다. 저택의 와인저장고를 정리하면서 몇 병 챙겼던 도수 낮은 백포도주였다.
“한 잔 하시오.”
유리잔 두 개를 꺼내놓고 기다린 나를 보며 캠벨 자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보다도 더 귀신같으시군요.”
“상급 정령사는 정령의 감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소. 감각만 따지면 오러 마스터보다 우월할 거요.”
캠벨 자작은 내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눈에 띠지 않게 도우려 했는데 티가 났소?”
“적이 눈치 챌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오늘따라 병사들의 컨디션이 좋아보여서 혹시나 하다가 재상 각하의 능력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사흘 뒤를 대비해 힘을 비축해두셔야 할 텐데 무리하신 게 아닙니까?”
“설마. 한숨 자면 회복될 정도로만 정령친화력을 썼을 뿐이오.”
“다행이군요. 오늘처럼 싸운다면 무난하게 아군 전력을 보존한 채 사흘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다만?”
“쥬르덴 후작도 우리가 슬슬 후퇴할 기회를 보고 있을 거라고 계산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음, 확실히 그렇겠군. 폐하께서 레던 왕성에서 전격적인 철수를 단행했다는 소식은 혼트 제국군의 첩보망에도 잡혔을 거요. 거기에 맞춰서 뮤트 공작가도 후퇴하여 병력을 보존하려 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특히 쥬르덴 후작만한 인물이라면…….”
***
깊은 밤.
후퇴를 명령한 쥬르덴 후작은 가만히 템플 오브 나이트를 응시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성채이건만, 밤의 어둠이 내려앉으니 여전히 위압적인 실루엣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저 잘 지은 요새일 뿐이다.
하지만 뮤트 공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곳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 된다.
레던 왕국을 수호하는 장벽.
쥬르덴 후작은 그래서 더더욱 저곳을 공략하고 싶었다. 카르스 황제의 본대가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저곳을 함락시키고 싶었다.
황제가 걷는 위대한 원정길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지난 번 패배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다.
“아버님.”
상념에 잠겨 있던 쥬르덴 후작의 곁으로 니젤이 다가왔다.
“륭겐 후작의 상태는 어떠하더냐.”
“낯에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거동은 불편해보였습니다.”
“전투에 나설 정도로 회복되려면 아직 멀었군.”
“그건 뮤트 공작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쪽이 졌다는 것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 면에서는 손해를 좀 보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럴 테지.”
쥬르덴 후작은 템플 오브 나이트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이제 슬슬 힘이 빠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하더구나.”
“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대결에서 뮤트 공작이 승리한 것 때문에 적의 사기가 높아진 건가 싶습니다. 하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결국 템플 오브 나이트는 아군의 수중에 함락될 겁니다.”
뮤트 공작이 이미 템플 오브 나이트를 빠져나갔고, 대신 카록 리간드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니젤로서는 그 정도의 추측이 최선이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뮤트 공작가도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퇴를 할 것이냐, 최후까지 싸울 것이냐를 선택할 때가 됐을 테지.”
“뮤트 공작의 성정이라면 후자를 택할 수 있습니다.”
“으음…….”
쥬르덴 후작의 고민도 바로 그 점이었다.
레던 왕실이 레던 왕성에서 전격적인 철수를 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 타이밍이라면 뮤트 공작가도 이제 그만 슬슬 템플 오브 나이트를 포기하고 후퇴할 때가 됐다.
하지만 상대가 다름 아닌 뮤트 공작이다.
템플 오브 나이트의 높은 방어력을 무기삼아 끝까지 싸워서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만약 뮤트 공작이 최후까지 싸울 결심을 했다면, 지금처럼 계속 공격을 가하여 템플 오브 나이트를 점령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적이 후퇴를 결심했다면, 따로 별동대를 퇴로에 두어서 후퇴하는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방안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뮤트 공작과 그 제자들을 그냥 살려 보내면 전쟁 내내 아군의 골칫거리가 될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륭겐 후작 각하의 판단을 들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륭겐 후작에게?”
“예, 아버님. 직접 검을 맞대며 교감을 나눠봤으니 우리보다 뮤트 공작을 잘 이해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음, 그렇군.”
이곳에 있는 총 병력 중 3분의 2는 륭겐 후작의 군단이었다. 일단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고 하니 륭겐 후작의 판단을 들어보는 것이 옳았다.
쥬르덴 후작과 니젤은 륭겐 후작이 쉬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