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 회: 경영의 대가 17권 -->
결국 책임자가 된 데릭은 다른 제자들 아홉을 선별했다.
뮤트 공작을 우선 피신시키는 일은 적이 잠든 한밤을 틈타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밤이 깊어지자 데릭은 즉각 움직였다. 일단은 뮤트 공작의 침소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소리 없이 침소 안으로 들어선 데릭이었지만, 뮤트 공작은 번쩍 눈을 떴다.
데릭은 한 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며 말했다.
“스승님, 저희들이 모여서 토의한 결과 우선은 스승님을 모시고 대피하기로 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예.”
데릭은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뮤트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내게 다른 모두를 남겨놓고 먼저 안전을 도모하라는 말이렷다?”
“스승님의 안전을 위해 모두가 희생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은 거동이 불편해지신 스승님께서 먼저 안전해지셔야 다른 사람도 안심하고 편히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결정입니다.”
“…….”
뮤트 공작은 침묵했다.
데릭이 계속 말했다.
“거절하신다면 감히 무례를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뮤트 공작은 데릭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릭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캠벨 자작이 데릭을 책임자로 선택한 것은 이만한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뮤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고집은 피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대제자 캠벨 자작의 뜻이 옳았다.
“알겠다. 가자.”
“예!”
안색이 밝아진 데릭은 뮤트 공작을 부축했다. 뮤트 공작은 부축을 거절했다.
“걸을 수는 있다.”
“말은 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건 무리군.”
“그러실 거라 생각해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무슨 수로 마차를 타고 탈출을 하겠다는 것이냐? 삼면이 포위된 상황이고, 적의 눈에 띠면 추격당할 것이다.”
“따라오시면 아십니다.”
두 사람은 1층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는 뮤트 공작이 탈 마차는 물론 1천 병사와 제자 9인이 집합한 상태였다.
식당 안으로 들어선 데릭은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아 바닥을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순간적으로 폭사된 오러가 바닥을 파괴했다. 그와 함께 바닥이 아래로 쑥 꺼져들었다.
쿠르릉―!
이윽고 나타난 것은 커다란 비밀통로였다.
뮤트 공작은 자신의 저택에 뜬금없이 나타난 비밀통로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이내 어찌된 연유인지를 파악했다.
“죽지 않았을 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살아남으시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왕실을 위한 길 아니겠습니까.”
뮤트 공작은 피식 웃었다.
“재상이 해놓은 짓이구나. 그래, 이게 있어서 탈출하자는 의견이 나온 거였어.”
데릭이 답했다.
“물러설 곳이 없다면 마땅히 필사의 각오로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살 수 있는데 굳이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네 말이 옳다. 가자.”
“예, 마차에 오르십시오.”
뮤트 공작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내리막길을 통해 비밀통로로 진입했다. 그 뒤를 제자 10인과 1천 병력이 뒤따랐다.
뮤트 공작은 마차 안에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생을 지켜왔던 뮤트 공작가 저택의 내부 풍경이 아련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서 뼈를 묻겠노라고 얼마나 긴 세월 다짐해왔던가.
그의 입에서 나직이 한탄이 흘러나왔다.
“인고로구나…….”
***
“또 어딜 가시려고요!”
“얘야, 넌 왜 내가 놀아도 뭐라고 그러고 일을 해도 불만이니?”
“누가 위험한 일 하래요?!”
줄리아가 쌍심지를 치켜떴다. 난 요즘 얘가 카르스 황제보다 더 무섭다. 황제는 내게 잔소리를 하지 않잖아?
난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 남편님을 좀 경외하려무나. 남들에게 위험한 일도 남편님에겐 하나도 위험하지가 않아요.”
“흥, 말은 잘해. 입만 살아서.”
“입만 살다니? 이 남편님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게 안 보이니?”
내 셔츠 가슴팍이 쑥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실프를 이용한 장난이었다. 뿔이 난 줄리아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줄리아에게 키스를 한 번 해주고는 시스에게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
“조심해.”
“그래그래. 우리 아들도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시스의 품에 안겨 있는 지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지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정령…….”
“그래그래, 아빠 다녀오면 정령이랑 실컷 놀자.”
“응!”
내가 뮤트 공작 일행을 구출할 즈음, 레던 왕실은 전격적인 후퇴를 개시할 것이다. 줄리아, 시스, 지스도 나 없이 왕실을 따라 피난을 가야 한다.
이번에도 함께 해주지 못해서 못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 지위에는 그에 걸맞은 의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래서 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거라고.
가족들과 작별을 나누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실프가 싱그러운 바람으로 나를 높이 띄워 올렸다.
나는 곧장 서쪽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급속도로 날아서 뮤트 공작령에 진입하자, 나는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통째로 감시했다.
분명 내가 뮤트 공작가에 만들어둔 비밀통로의 출구가 이 근처 어디였는데.
-아빠, 저기야.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노움이 북서쪽을 가리켰다.
“아, 그렇구나.”
노움이 가리킨 곳으로 향하니 정말로 비밀통로의 출구가 보였다. 활엽수와 넝쿨로 가려져 있었지만, 비밀통로를 만든 장본인인 나는 쉽게 알아보았다.
노움의 힘으로 땅을 움직여 활엽수와 넝쿨을 통째로 옆으로 옮겨버리고 비밀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어두컴컴해서 한치 앞도 안 보였지만, 정령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어서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편했다. 요즘은 정령이 없을 때 오히려 더 장님이 된 듯한 답답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니까. 정령중독인지도 모르겠어.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1.5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천여 명쯤 되는 인간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더 감각을 집중해보니 정확히 1011명. 한 명은 마차를 타고 있었다. 이 비밀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아 뮤트 공작가 측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실프의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날아가 보았다. 가까이 접근하자 상대측에서 먼저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
“누구냐!”
말을 타고 앞장서 있던 한 사내가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소리쳤다.
다른 자들도 일제히 무기를 들고 경계했다. 전투태세전환이 매우 빠른 것으로 보아 보통 정예가 아니었다.
“리간드 후작 카록이오. 뮤트 공작가의 분들이 맞으시오?”
“재상 각하이십니까?”
말을 탄 사내가 놀라 되묻자, 나는 대답대신 샐러맨더를 소환했다.
-크헤헤! 불렀냐?
순식간에 비밀통로 내부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샐러맨더는 어둠속에서 더욱 눈에 띠었다. 저런 미친 정령을 데리고 다니는 정령사는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테지.
“재상 각하가 맞으시군요! 저는 뮤트 공작 전하의 2제자 데릭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데릭이라 소개한 사내는 말에서 내려 정중히 인사했다.
“반갑소. 그런데 공작 전하께서는?”
“마차에 타 계십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감각을 집중해보니 마차 안에 탄 인물은 정말로 뮤트 공작이었다.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충만한 오러가 느껴지지 않아서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때마침 마차 문이 열리고 뮤트 공작이 내렸다.
“공작 전하!”
“오랜만이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다친 곳은 없네. 고갈된 오러를 회복하는 데는 오래 걸릴 것 같지만.”
“륭겐 후작과 겨뤄서 이기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다친 곳이 없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재상은 나도 모르게 이런 걸 만들어두었군. 신경을 써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인사는 이쯤 해두지. 난 들어가 쉬겠네.”
“그리하십시오.”
뮤트 공작은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는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빠른 회복을 위해 오러 브레싱에 전념하는 모양이었다.
“재상 각하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데릭이 물었다.
“폐하의 어명으로 뮤트 공작가를 지원하러 왔소. 공작 전하의 구출이 최우선 목표였는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오.”
“국왕 폐하께서도 저희를 염려해주고 계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이오. 그보다 어찌 된 상황인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