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 회: 경영의 대가 17권 -->
템플 오브 나이트.
그것은 뮤트 공작가의 성채를 일컫는 단어였다.
레던 왕국 최고의 기사라 불리는 뮤트 공작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그를 흠모한 수많은 무인이 모여들었고, 제자가 되어 수학한 뒤 뛰어난 무인이 되어서 배출되곤 했던 무(武)의 성지였다.
뿐만 아니라 뮤트 공작가가 오랫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혼트 제국군의 침공에 대비해온 요새였다. 때문에 레던 왕국 사람들에게 이 템플 오브 나이트는 나라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파제였다.
이 나라는 아직 괜찮다.
템플 오브 나이트가 건제한 한 레던 왕국은 안전하다.
템플 오브 나이트에는 그러한 신앙과도 같은 민중의 믿음이 어려 있었다.
그 같은 명성에 걸맞게 템플 오브 나이트는 혼트 제국군의 맹렬한 공세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륭겐 후작은 흑십자기사단의 수장답게 8만 대병력으로 거친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 노도 같은 공격 속에서도 템플 오브 나이트는 빈틈없는 방어력을 과시했다.
륭겐 후작의 지휘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템플 오브 나이트가 워낙에 철옹성이었다. 나라의 국경을 지킨다는 사명을 가진 가문이 기나긴 세월에 걸쳐 빈틈을 찾아내 보완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게다가 그 템플 오브 나이트를 지휘하는 사람은 역대 뮤트 공작가 가주를 통틀어도 최고의 카리스마를 보이는 크라일 뮤트 공작이었다.
그가 키운 백여 명의 제자들까지 뒷받침하고 있으니 템플 오브 나이트가 쉽사리 함락될 리가 만무했다.
“거 참 굉장하군.”
륭겐 후작이 투덜거렸다.
“정말 빌어먹게도 잘 지은 성채야. 성벽은 높지 해자는 깊지……. 확률 낮은 도박에 돈 꼴아 박는 기분이야. 생목숨을 시체로 만들어 저 해자에다가 처넣고 있잖아.”
“판돈이 압도적으로 많으면 도박이라 해도 질 수가 없는 법이오.”
그렇게 대꾸한 사람은 쥬르덴 후작이었다. 쥬르덴 후작의 옆에는 장남 니젤도 함께 있었다.
쥬르덴 후작은 레던 왕성에서 패전을 겪은 뒤 곧장 륭겐 후작과 합류했다. 카록 리간드가 난입해 엄청난 정령술로 혼란을 유발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레던 왕성에서 물러난 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병사들을 수습해서 간신히 4만이 조금 넘는 병력 규모로 회복했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였다. 카록 리간드의 정령술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크게 사기가 꺾인 것은 큰 문제였다. 이 때문에 쥬르덴 후작은 륭겐 후작과 합세해 사기를 회복시킬 요량이었다.
아군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유리한 전장에서는 패전으로 꺾였던 병사들의 마음이 안정된다. 그리고 무난하게 템플 오브 나이트를 점령하고 나면, 승리로 인하여 다시 사기가 살아날 터였다.
패장인 데다가 황제로부터 임무를 받은 전장도 아니었으므로 지휘권을 륭겐 후작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쥬르덴 후작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 허영 많은 성격도 아니었고, 륭겐 후작도 결코 어리석은 지휘관이 아니었기에 믿고 맡길 만했다.
오러 마스터라는 특별한 존재인 데다가 명성으로 보나 나이도 보나 륭겐 후작은 쥬르덴 후작보다 위였기에 어색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 지겹다! 탁 트인 평원에서 한 판 시원시원하게 싸워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니면 일기토로 승부를 보거나. 아, 이런 것도 괜찮겠군. 뮤트 공작과 그 제자들이 내가 이끄는 흑십자기사단과 한 판 붙어서 승부를 보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륭겐 후작은 지루함을 분출했다.
하지만 그의 무료함과 달리 전투는 치열했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혼트 제국군 병사들이 사다리와 로프를 걸고 공성탑을 들이밀며 템플 오브 나이트를 공격했다. 빗발치는 화살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고,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칠 때마다 웅장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렇듯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곳에서도 륭겐 후작은 눈 하나 깜짝 하는 법 없이 소풍 나온 것처럼 평온했다. 이 정도의 자극으로는 륭겐 후작을 흥분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카록 리간드랑 싸우는 게 백번 낫겠네. 내가 질 테지만 적어도 지루하진 않잖아.”
시종일관 투덜거리기만 하는 나태한 지휘관의 모습이었으나, 쥬르덴 후작도 니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륭겐 후작의 두 눈이 맹수처럼 적을 주시하고 있음을.
빈틈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사나운 맹수의 눈빛이었다. 지금의 륭겐 후작은 피 맛이 보고 싶어 안달 난 굶주린 늑대였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좀 내보지 그래?”
륭겐 후작이 제안했지만 쥬르덴 후작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라고 지금의 상황에서 판도를 바꿀 비장의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니젤, 너는 어떠하냐?”
아버지의 물음에 니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적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공격하는 것밖에 없다는 거군.”
륭겐 후작은 혀를 차며 템플 오브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공격해야지! 공성탑으로 성벽을 넘고, 충차로 성문을 부수고, 투석기로 돌을 날리고, 노는 공병들은 땅굴을 파고! 12만이 넘는 쪽수로 계속 치고 또 쳐야지! 그래도 놈들이 지치지!”
부하 천인장들을 모두 소집한 륭겐 후작은 짤막하게 지시를 내렸다.
“무조건 공격이다! 재량껏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공격해라! 무슨 짓을 하든 자유다! 그저 저놈들을 죽여! 알아먹었냐?!”
“옛―!”
천인장들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천인장들이 임무 수행을 위해 각자의 천인대로 흩어지고, 륭겐 후작도 성큼성큼 지휘부 막사를 나섰다.
쫓아 나온 쥬르덴 후작이 물었다.
“어디로 가시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러.”
“……?”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쥬르덴 후작에게 륭겐 후작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 몸 역시 아주 좋은 공격 수단 중 하나지.”
륭겐 후작은 곧장 성벽으로 향하는 공성탑에 올랐다.
혼트 제국군의 표준 공성탑은 3층의 구조를 띠고 있다. 1층은 소나 말 등의 가축이 공성탑을 이끌고, 2층과 3층은 병사들이 탑승한다. 2층까지는 사다리로 올라야 하고, 2층과 3층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인 3층은 성벽에 내릴 수 있는 도개교가 설치되어 있다.
도개교가 내려지면 2층과 3층의 병사들이 일시에 성벽 위로 쏟아져나가는 구조였다.
공성탑 3층 가장 정면에 선 륭겐 후작의 존재는 함께 탑승한 병사들을 용기백배하게 만들어주었다.
누구보다도 용맹한 오러 마스터 사령관!
그의 뒤를 따르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마치 자신들이 위명을 떨치는 흑십자기사단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저 거칠고 사납고 딱히 특출한 지략도 없는 륭겐 후작이었지만, 그는 따르는 부하들에게 그런 힘을 부여하는 맹장이었다.
공성탑이 성벽에 접근하자 도개교가 내려졌다.
“간다!”
륭겐 후작이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성벽을 지키던 뮤트 공작가의 병사들은 륭겐 후작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십자가 모양을 띤 거대한 흑색 투 핸드 소드를 몰라볼 사람은 없었다.
“륭겐 후작!”
“륭겐 후작이다!”
병사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좋은 표정이다.”
륭겐 후작은 사납게 미소 지으며 투 핸드 소드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쿠아아앙―!
순식간에 오러 블레이드가 발출되며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단 일격에 즉사하였다. 시신이 산산조각이 나고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그 피를 온몸으로 흠뻑 맞으며, 륭겐 후작의 미소에 살기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