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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417화 (417/529)

<-- 417 회: 경영의 대가 17권 -->

“아주 아끼시는 와인도 몇 병 없어졌습니다만.”

“괘, 괜찮다고!”

“목소리가 떨리시는데…….”

“흐흠! 내, 내가 뭘? 우리 저택을 지켜주었는데 그깟 와인 몇 병이 몇 푼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내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도 상당수 없어졌습니다. 퀸즈 블러드라든지 쓰론 블루라든지…….”

“그만해! 그만 하라고! 난 괜찮다고 했잖아! 저,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나였다. 니벨 영감도 더는 와인의 피해에 대하여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착각인지 이 영감 얼굴이 조금 즐거워하는 것 같았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기도 했다.

안 되겠다.

전쟁 끝나면 내가 직접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만들던가 해야겠다.

노움으로 질 좋은 흙을 모으고 운디네로 치유의 힘이 담긴 물을 주면서 키우면 맛 좋은 포도로 끝내주는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라, 이거 좋은 플랜인데?

은퇴를 하고 나면 소일거리 삼아 와인을 만들면서 유유자적 여생을 사는 거지. 그렇게 만들어진 끝내주는 와인은 나 혼자 다 먹고. 제론이 한 병만 달라고 졸라대도 안 줄 거야. 흐흐흐.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어느새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평화로운 저택의 정경을 둘러보며 나는 생각했다.

가족들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해주고 싶다. 그러려면 이겨야 한다. 평화란 사치품이다. 크나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다.

저택 정리가 끝나고 시간이 남아서 나는 와인저장고를 내려갔다. 니벨 영감 말대로 정말 와인들이 많이도 없어졌다. 최상급 와인 중 쓰론 블루는 하나도 없었고 퀸즈 블러드만 달랑 한 병이 있었다. 젠장 할 놈들. 많이도 마셔댔구나!

퀸즈 블러드를 들고 나와 저택 앞뜰에 주저앉았다.

내리쬐는 햇볕과 정원 풍경을 감상하며 퀸즈 블러드를 마셨다. 달콤하게 넘어가고 깊은 풍미가 퍼지는 환상의 맛에 더더욱 와인이 아까워진다. 운디네의 힘까지 곁들여지자 세상에 다시없는 맛이 되었다.

니벨 영감이 다가와 물었다.

“간단한 디저트라도 가져다드립니까, 주인님?”

“아니, 됐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와인저장고에 있는 와인들 전부 왕실에 갖다줘버려.”

“전부 말입니까?”

니벨 영감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응. 어차피 저걸 다 싸들고 갈 수도 없고, 여기 놔둬봐야 혼트 제국군 손에 넘어갈 뿐이야. 왕실에 기증해서 병사들 주연(酒宴)이나 베풀라고 그래.”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니벨 영감은 하인들을 시켜서 와인저장고의 와인들을 짐마차에 실어 날랐다.

홀로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문득 다섯 명의 사내가 저택 동산을 오르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집중해보니, 다섯 사내는 바로 에반 테일러와 첩보조직 소속의 수하들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은밀히 움직이며 큰 공을 세운 에반이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 계셨군요.”

“여어, 에반! 들었어. 훌륭한 활약을 했던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공을 알아서 따라오는 법이지요.”

자만도 겸손도 아닌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역시 에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시더라. 포상으로 뭘 줘야 하나 싶다가 그냥 승작을 해주기로 하셨어. 이제 넌 테일러 자작이야.”

“카록 리간드 후작의 오른팔이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작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일단은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딱딱하게 반응하긴. 아무튼 지금 정세는 어때?”

“패퇴한 쥬르덴 후작은 병력을 수습해서 륭겐 후작과 합류했습니다. 뮤트 공작가 측에서 잘 막고 있기는 하지만, 두 군단이 합쳐진 대병력의 공세를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음, 뮤트 공작 전하께서 얼마나 더 버티실 것 같아?”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흠잡을 데 없이 잘 싸우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왕실이 레던 왕성에서 철수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뮤트 공작 전하께서 무사하시면 좋겠군.”

전쟁을 치르려면 뮤트 공작처럼 카리스마 있는 지휘관이 많이 필요했다.

오러 마스터로서의 뛰어난 무력. 오랫동안 쌓아온 인망과 명성.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귀족이라는 지위. 왕실에 대한 충성심까지.

뮤트 공작이 에릭 국왕을 보좌해준다면, 각 영지에서 군대를 끌고 온 귀족들을 훌륭하게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왕실파 귀족이든 육제후파 귀족이든 뮤트 공작에게 한 수 접어주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바덴 강 쪽은?”

“카이슨 후작 군단과 롬펠 대공 군단이 진격을 해 와서 란즈헬 백작 역시 바덴 강의 다른 세 제후와 연합했습니다. 전력상 혼트 제국 측이 유리하지만, 주군의 아버님과 둘째 형님이 북쪽 방면에서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릭 형님, 그리고 내 영지를 대리통치하는 베일의 연합군이 리간드 영지에 주둔 중이었다.

산지로 둘러싸인 영지의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서 북진하는 혼트 제국군을 가로막겠다는 의도인데, 카이슨 후작이나 롬펠 대공 둘 중 한 사람과 충돌할 공산이 컸다.

아마도 상대는 롬펠 대공이겠지.

아버지와 릭 형님 등 오러 마스터가 둘이나 있으니 마땅히 혼트 제국군도 괴물 롬펠 대공을 내세워야 마땅하니까. 게다가 그 괴물 같은 노인네는 아버지와 릭 형님의 목숨을 장담 못한다고 겁을 주기까지 했다. 물론 아버지와 릭 형님도 겁먹기는커녕 투지가 충만했지만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남쪽의 전장은 롬펠 대공 대 쿤트 일족, 그리고 카이슨 후작 대 바덴 강의 네 제후라는 구도가 그려진다.

그리고 북쪽은 륭겐 후작과 쥬르덴 후작을 뮤트 공작이 힘겹게 막는 틈에 우리 왕실이 레던 왕성에서 물러나 영주들을 규합시키려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국면을 보면 당연히 레던 왕국이 밀리는 형세였다. 병력이 워낙 압도적인 데다가 각 군단의 사령관들도 하나같이 유능한 지휘관이니까.

게다가 아직 카르스 황제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제가 출현하면 전장의 판도가 크게 뒤흔들릴 터였다.

이런 불리한 형세를 극복하려면 오리엔 왕국의 원군이 빨리 와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영주들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에릭 국왕을 잘 따라주어야 한다.

하나로 단결되지 않으면 오합지졸이 된다는 걸 누군들 모를까. 하지만 그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한데 모이면 꼭 분란이 벌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었다.

특히 귀족들은 워낙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허영이 강해서 쓸데없이 에릭 국왕의 통제를 방해할 우려가 있었다. 에릭 국왕의 명령에 귀족들이 한 마디씩 딴죽을 걸면 그게 바로 분란이다.

그래서 뮤트 공작은 템플 오브 나이트에서 죽으면 안 된다. 말 많은 귀족들로 하여금 얌전히 왕명에 따르도록 만들어줄 사람이다.

템플 오브 나이트에 비밀통로를 파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꼭 살아 돌아와 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했었지.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뮤트 공작.

누구보다도 완고하고 책임감이 강한 무인이 과연 적을 앞에 두고 달아나는 선택을 할 것이란 말인가?

불리할 땐 후퇴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과연 뮤트 공작의 머릿속에도 도망이라는 두 글자가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내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에반이 말했다.

“그럼 전 다시 제 일을 하러 가겠습니다.”

“무슨 일?”

“린델 백작가와 안타레스 백작가가 국내에 심어둔 상인들을 적발해 처치하는 일입니다.”

에반은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혼트 제국군의 전략기조는 레던 왕국 국내에 상인들을 심어두어서 군수물자를 확보케 하고, 군대로 침공해 현지에서 보급을 받는 방식입니다. 보급을 현지에서 곧바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진군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요.”

“그렇지. 실제로 레던 왕성을 칠 때 선보였고.”

“그러니 저는 그 전략의 단점을 들춰서 찔러야지요. 혼트 제국과 결탁한 상인세력만 격멸시키면 혼트 제국군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기간이 상당히 줄어들 겁니다.”

린델 백작, 그리고 안타레스 백작.

한때 육제후의 일원이었던 두 사람은 국내에 상인세력을 조종해 군수물자를 모으려고 상당한 재산을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반에 의해서 그 자금이 공중 분해될 판이다. 어쩌면 이번 전쟁의 최고 공신으로 에반이 유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계속 수고하도록 해.”

“예. 그럼 이만.”

에반은 수하들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

왕궁으로 돌아오니 세 여자와 두 아이가 반겼다.

그녀들은 여전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오싹했다. 하루 종일 수다만 떨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여자 셋이 모이면 시공간이 왜곡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들었어요. 와인저장고에 보관하던 술을 전부 왕실에 기부하셨던데요?”

줄리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다 내가 충신이기 때문이지. 마음껏 존경하렴.”

“와인저장고의 술들을 자기 혼자 다 먹을 것처럼 쩨쩨하게 굴더니 웬일이에요?”

“얘야, 내가 언제 쩨쩨하게 굴었니? 특별히 귀한 와인을 극히 소중하게 여겼을 뿐이지.”

“쓰론 블루였나? 그거 좀 마시자고 해도 아무 때나 먹는 게 아니라면서 극구 거절하시더니.”

“그, 그 얘긴 그만 하자.”

학생들과 용병들에게 약탈당한 귀한 와인들을 떠올리니 또 가슴이 쓰라렸다.

“아빠, 아빠정령!”

어느새 아장아장 다가온 지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졸랐다. 지렌 왕자도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하하, 그래그래. 아빠정령이랑 놀래?”

“응!”

나는 아빠정령을 소환했다.

나를 꼭 빼닮은 실프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지스와 지렌 왕자가 잡아끌자 못이기는 척 질질 끌려가는 실프.

이것 참…….

전쟁의 내가 저랬지.

낭비벽 심하고 불만 많은 아내와 싸가지 없는 아들이 무지 괴롭혀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전혀 즐겁지 않았거든. 그래서 일에 매달렸고, 늘 피로하고 무기력했다.

그런데 지금, 전생의 내가 두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실프를 통해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목한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실프에 얽힌 비밀을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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