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회: 경영의 대가 16권 -->
“혼트 제국 녀석들에게 식량이 없다면…….”
“그럼 우리가 이긴 거잖아!”
로이와 조이가 서로를 보며 환호하였다. 다른 일행들도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니 너희는 안전한 지역으로 피난을 가라. 북서쪽에 재정부상서의 본가인 콘체른 영지가 있는데 그곳이 괜찮겠군. 괜히 식량과 보급품을 가지고 얼씬거리다가 혼트 제국군에게 털리지 말도록.”
아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는 소식에 희희낙락하는 일행들. 그러나 오직 존만이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에반이 물었다.
“뭐지?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나?”
“그게 아니라……. 제 일행은 말씀하신 곳으로 피난을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전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비밀통로가 있는 왕립학교가 이미 혼트 제국군에게 장악된 상태라고 들었다. 싸움도 다 이긴 시점에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없을 텐데.”
“있습니다.”
존은 단언했다.
“……?”
“레던 왕성 공략이 불가능해진 혼트 제국군이 택할 차선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차선?”
그 말에 에반은 흠칫했다.
승산이 없어지면 당연히 후퇴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을 질질 끌어봐야 쥬르덴 후작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선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본 에반은 이윽고 무언가가 떠올랐다.
자신이 사전에 미리 염두에 두지 못했던 전장의 변수! 그 변수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애송이 존 스페이였다.
“리간드 후작가 저택, 왕립학교 학생들…… 빌어먹을.”
에반은 절로 욕이 나왔다.
지금 저택을 지키고 있는 왕립학교의 무과 학생들은 모두 귀족가문의 자제였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당초의 전략적 목표였던 레던 왕성 공략에 실패한 쥬르덴 후작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인질로 삼으려 들 가능성은 충분했다.
레던 왕성을 공격하던 7만 병력이 모두 저택에 집중된다면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는 비밀통로마저 발각되지 않았는가.
존은 쓰라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멋대로 나선 탓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나서지 않더라도 테일러 남작님의 공작으로 레던 왕성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한숨을 쉰 에반은 풀 죽은 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지는 않다. 결과야 어쨌든 너희들이 큰 공을 세운 것은 확실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저택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방책이 있으십니까?”
“글쎄. 지금으로서는 레던 왕성에 들어가 왕실에 이 사실을 알리는 수밖에.”
“레던 왕성도 혼트 제국군에게 포위된 상태입니다.”
“레던 왕성은 크다. 놈들이 모든 성벽을 다 둘러싸고 있지는 않고, 나는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났지. 적어도 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안전해.”
“그럼 그리 해 주십시오. 하지만 전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지?”
“지휘관이 되어서 아군과 전장을 버리고 도망치는 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돌아가 싸우겠습니다. 기필코 승리의 순간을 전우들과 함께 맞이하겠습니다.”
“허어…….”
에반은 감탄하여 존을 바라보았다.
올곧은 정신. 빛나는 재능. 그는 자신이 타고난 명장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반이 말했다.
“이번 싸움이 끝난다면 주인공은 바로 네가 되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비운의 주인공이 되지는 말도록.”
“…….”
“가봐, 네가 가야 할 곳으로. 뒷일은 내게 맡겨라.”
존은 씨익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그 뒤 일행은 에반을 따라 진로를 북서쪽으로 돌렸고, 존은 말에 올라 왕립학교를 향해 달렸다.
레던 왕성 싸움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
니젤은 군마를 탈취하고 왕립학교를 탈출한 인물이 존 스페이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기병대를 이끌고 뒤를 쫓으려고 하는 찰나, 급보를 받았다. 당장 돌아오라는 아버지 쥬르덴 후작의 명령이었다.
‘제길. 하필 이런 때에!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니젤은 하는 수 없이 추적을 포기했다. 대신 기병 500명은 왕립학교에 남겨놓아서 감시케 하고, 홀로 레던 왕성 앞에 있는 진지로 귀환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퇴각이요?!”
지금까지 전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니젤은 갑작스러운 퇴각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 쥬르덴 후작이 말했다.
“식량을 넘기기로 했던 상인들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예? 설마 배신입니까?”
“병사들을 보내 확인해봤는데, 배신은 아니고 습격을 받았더구나. 상단 관계자는 남김없이 죽었고 식량은 불타거나 없어졌다고 했다. 벌써 5개나 되는 상단이 똑같은 일을 당한 것으로 보아, 적이 아군의 전략을 눈치 챈 모양이다.”
“보급이 불가능하다면…… 확실히 후퇴밖에 답이 없겠군요.”
“그래. 레던 왕성을 포기하고 륭겐 후작의 군단과 합류하여 뮤트 공작령 공략을 도우는 수밖에 없다.”
“크윽…….”
니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카르스 황제가 내린 전략, 즉 뮤트 공작가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레던 왕성을 곧장 공략하는 작전은 더없이 탁월한 책략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황제 폐하의 귀신같은 지모를 당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 유명한 카록 리간드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레던 왕실에 그 책략을 알아챈 인물이 있었다니!
지금껏 쏟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이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되는데!’
비밀통로의 입구를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이고,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택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질 터였다. 적수인 존 스페이를 무릎 꿇릴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니.
적수를 만나 투지를 한창 불태웠던 젊은 니젤은 이렇게 허무한 결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식량이 없는 한 후퇴 외에는 답이 없음을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흘 뒤에 철군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철군 준비를 끝마치겠습니다.”
“네가 잘 싸웠다는 것을 안다.”
쥬르덴 후작은 실망한 니젤을 위로했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잘 했든, 잘 싸웠든 간에 전쟁을 겪다보면 예상 못한 변수가 발생하곤 한다. 세상사 다 그런 법이지.”
“예…….”
찜찜한 기분을 안고 니젤은 쥬르덴 후작의 막사를 나왔다. 멀리에 있는 리간드 후작가 저택을 바라보며 니젤은 갈증을 느꼈다.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는데!’
현재 저택에는 존 스페이도 없었다. 존 스페이가 없는 저택 수비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학생들 중 그 누구도 존 스페이 같은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들?”
그 순간, 니젤의 뇌리에 섬광처럼 한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라이벌 존 스페이가 우려했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학생들! 그래, 학생들이다!”
니젤은 환희에 차 소리 지르며 아버지 쥬르덴 후작에게 뛰어갔다.
“아버님! 지금 당장 저택을 공략해야 합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구나.”
“저택을 지키고 있는 무과 학생들은 모두 레던 왕국의 귀족가문 출신입니다! 그냥 소득 없이 물러나는 것보다는 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가치 있는 인질을 얻는 것이 유리합니다. 패전이 아니라 전공을 세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설명을 곱씹어본 쥬르덴 후작은 그게 옳다고 여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타당하다. 전군을 동원해 리간드 후작가 저택을 점령하도록 하겠다.”
“우리 군단의 모든 기사와 마법사를 동원하면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존 스페이. 학생들을 모아서 리간드 후작가를 지키기로 한 것은 네 결정이었겠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가 인질을 얻을 수 있게 되었구나. 과연 아버님 말씀대로 세상사는 알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