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 회: 경영의 대가 16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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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던 왕성이 백성을 모두 피난시키고 임전태세를 완료했을 때, 쥬르덴 후작의 본대가 나타났다.
숫자는 무려 7만.
징집병이 아닌, 오랫동안 훈련 받고 실전을 겪은 정예 병력의 숫자가 7만이었다.
쥬르덴 후작의 군단은 레던 왕성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성준비에 착수했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만히 노는 법 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상대해야 할 군 지휘관으로서는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명성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과연 정예들이로군.”
레던 왕성의 성루에서 이를 지켜보던 에릭 국왕이 신음을 하며 중얼거렸다.
“혼트 제국군이 다 정예가 아니라 지휘관이 훌륭한 것이지요. 쥬르덴 후작은 이름난 명장이니 오늘을 위해 군단을 잘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제론의 말에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쥬르덴 후작의 명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카르스 황제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니 오죽 뛰어날까.
“폐하, 놈들이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기습을 가해 흔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주장하고 나선 것은 로열나이츠의 단장인 그라함 백작. 오러 엑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자랑하는 레던 왕국의 손꼽히는 무인이었다.
“저희 로열나이츠라면 빠르게 돌격해 놈들의 진지를 짓밟고 혼란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오랫동안 오러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해 정체되었고, 최근 쿤트 가문에서 오러 마스터가 잇달아 출현해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여전히 왕실 내에서는 최강의 무인인 그라함 백작이었다. 이번 기회에 아직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증명할 참이었다.
“단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놈들이 우리가 겁먹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니 한 번쯤 쓴맛을 보여주어서 경계하게 만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부단장인 랜달 스페이 백작도 옳다구나 찬동했다. 성격이 화통한 그는 가만히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싸우는 편을 더 선호했다.
“하지만 상대는 쥬르덴 후작이 아니냐. 그 점에 대한 대비를 안 했을 리가 없을 텐데.”
에릭 국왕은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은 군사부상서인 제론에게로 집중되었다. 제론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딱히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할 테지만, 시도해서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라함 백작과 랜달 스페이 백작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째서 그러하느냐?”
에릭 국왕의 물음에 제론이 답했다.
“적군은 제대로 된 싸움은 아니었지만 뮤트 공작가와 교전도 치렀고 산을 넘어 이곳까지 쉬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적이 많이 지쳐 있을 때 쉴 틈을 주지 않고 가볍게 견제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으음…….”
“물론 쥬르덴 후작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할 테니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할 테지만 말입니다.”
“적의 용병술에 휘말려 발을 빼지 못하고 붙잡힐 염려는 없느냐?”
“다행히 리간드 후작가 저택에 아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기습을 가한 뒤 저택 쪽으로 물러나 남문으로 퇴각하면 적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물론 리간드 후작가 저택 측에서 아군의 움직임에 맞춰 화살을 쏴서 적을 견제해준다고 가정했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 저택을 지키는 지휘관이 누구라고 했던가?”
“제 아들 녀석입니다, 폐하.”
랜달 스페이 백작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 아들 존은 비록 어리지만 영특하니 분명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것입니다.”
“으음, 다름 아닌 그대의 아들이라니 영 불안해지는군.”
“폐, 폐하!”
에릭 국왕은 하하 웃었다.
“알았다. 로열나이츠는 즉시 출진하여서 놈들에게 우리의 투지를 보여주어라.”
“예, 폐하!”
“놈들의 기세를 꺾어놓고 오겠습니다!”
그라함 백작과 랜달 스페이 백작은 명령을 받들어 출진 준비를 하러 떠났다.
잠시 후, 로열나이츠 전원이 말을 타고 레던 왕성을 나섰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레던 왕실의 최강 무인 집단 로열나이츠.
이를 본 혼트 제국군의 진영에서도 어수선해졌다.
“아버님, 놈들이 나왔습니다! 로열나이츠입니다.”
“나도 봤다.”
“우리 군단의 기사들도 결코 놈들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제게 맡겨주시면 놈들과 한 판 붙어보겠습니다.”
니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쥬르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아군이 지쳐 있을 때 로열나이츠와 대결해서 아까운 무인들을 희생하면 좋지 않다.”
“…….”
그 말이 옳았기 때문에 니젤은 더는 나서지 않았다.
이윽고 쥬르덴 후작의 지시가 내려졌다. 혼트 제국군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먼저 선두에 나온 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활시위에 걸어 당겼다. 로열나이츠가 질풍처럼 다가오자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쏴라!”
쉬쉬쉭― 파파팟!
화살들이 비처럼 로열나이츠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로열나이츠는 레던 왕실을 수호하는 최정예 기사단. 일제히 오러가 깃든 검으로 화살을 쳐내니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시 쥬르덴 후작이 지시를 내리자 혼트 제국군의 진형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변형되었다.
궁병은 뒤로 물러나고 장창병들이 가운데가 움푹 파여진 비스듬한 형태로 진형을 형성했다. 뮤트 공작과 교전을 벌일 때 선보였던 응용 사선진이었다. 정복전쟁에 대비하여 쥬르덴 후작이 훈련시켜온 진형으로, 강력한 무인을 앞세운 돌격력을 가진 적에게 쓰이는 전술이었다.
로열나이츠의 단장 그라함 백작 역시 이를 알아보았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대로 돌파를 시도했다가는 혼트 제국군이 양익(兩翼)을 전개하여 포위할 터였다. 비록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이며 개개인의 무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숫자는 적은 로열나이츠였다. 포위망에 갇힌 채 사방에서 들이대는 창을 막다보면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의도대로 쉽게 당해줄 그라함 백작이 아니었다. 로열나이츠는 방향을 선회하여서 적의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혼트 제국군 측에서 물러섰던 궁병들이 다시 활을 쏘았다. 화살들이 아군을 피해 정확히 로열나이츠를 노리며 쏟아졌다. 그들이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로열나이츠는 화살을 모두 쳐내며 질주, 혼트 제국군의 측면을 들이받았다.
콰지직! 콰콱! 서걱!
“크아악!”
“으윽!”
로열나이츠 기사들에게 베인 장창병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뒤에 있던 장창병이 죽은 전우의 빈자리를 메우며 긴 창을 들이댔다. 유독 긴 창을 가진 혼트 제국군의 장창병은 창 길이의 이점으로 적을 견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로열나이츠는 일반 병사들에게 쉽게 당해줄 무인들이 아니었다. 장창을 잘라버리고 병사들의 목을 베어 죽이기를 반복했다.
“말을 노려라!”
“말을 죽이면 된다!”
장창병들이 집요하게 로열나이츠 기사들이 탄 말을 노렸다. 기동력만 빼앗으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림없다!”
그라함 백작은 고함을 지르며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검에 맺혀 있던 오러가 덩어리를 이루며 쏘아져나갔다.
오러로 원거리 공격을 펼친 것이다.
비록 벽을 넘지 못해 장기간 정체기를 겪고 있긴 하나, 오러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라함 백작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선보일 수 있는 스킬이었다.
콰쾅―!
“끄아악!”
“살려줘!”
장창병들이 무더기로 죽었다.
교전이 계속되면서 혼트 제국군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7만이나 되는 대군이기 때문에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피해가 계속 누적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볼 쥬르덴 후작이 아니었다.
“니젤.”
“예, 아버님!”
“기병대 1, 2, 3, 4 천인대를 이끌고 본진을 우회해 퇴로를 차단해라.”
“예!”
니젤은 아버지 쥬르덴 후작의 의도를 즉각 알아챘다. 기병대 4천 병력을 이끌고 나선 니젤은 바람처럼 달려 아군의 본진을 반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아군 본진 병력에 가려져 로열나이츠가 기병대의 움직임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로열나이츠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니젤의 기병대가 퇴로를 차단한 후일 터였다.
쥬르덴 후작의 의도가 먹혀들어, 로열나이츠를 이끄는 그라함 백작은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