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회: 경영의 대가 16권 -->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 짊어진 백성들의 피난행렬은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했다.
다만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은 징집되어서 피난행렬에 끼지 못했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적군을 상대로 성을 지켜야 하니 징집으로 전력을 보충하는 것은 당연했다.
병사들은 성문에 배치되어서 백성들의 피난행렬을 감독하는 한편, 징집을 피해 달아나려는 징집대상자를 적발했다.
“징집대상자는 떠날 수 없소. 징집에 응하시오.”
“흐흑, 제가 없으면 아내와 자식들은 어떡합니까?!”
“죽고 싶지 않아, 엉엉!”
징집을 피하려다가 적발된 남자 무리가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통곡을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을 혀를 차기도 했고 동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니 지탄 받아 마땅하나,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이해 못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부 소동을 제외하면 피난은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에릭 국왕 치하의 왕실의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레던 왕성을 떠나는 귀족들의 마차도 종종 눈에 띠었다. 레던 왕성에 거주하던 귀족들과 왕실 고위관리들의 일가족들도 피난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인과 달리 지정된 피난지가 없었으므로 각자 연고지로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레던 왕성이 곧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리간드 가문 또한 깊은 수심에 잠겼다.
“하아, 이를 어쩌지?”
줄리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스를 품에 안은 시스는 빤히 줄리아를 보며 물었다.
“뭐가?”
“우리도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잖니.”
리간드 가문의 저택은 레던 왕성 밖에 있기 때문에 혼트 제국군의 공격을 받으면 위태로워진다.
물론 카록이 재주를 부린 덕에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로 방어되고 있기는 하지만, 까마득하게 밀려올 혼트 제국군에게 맞설 만한 병력은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
시스의 물음에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게 고민이야.”
갈 곳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남쪽으로 쿤트 영지로 피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레던 왕성의 가장 깊은 곳에 보호받고 있는 왕궁에 머물러도 된다.
쿤트 영지로 달아날지, 아니면 왕궁에 들어가 왕실과 운명을 함께 할지, 카록이 없는 지금 줄리아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쿤트 영지로 피난가면 격전지가 될 레던 왕성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 나라 재상 가문의 일가족으로서 왕실과 함께하지 않고 달아난다는 것은 면목이 살지 않았다. 물론 의무사항은 아니었으나, 시에나 왕비와의 친분도 두터운데 그녀와의 우정을 생각하면 이럴 때일수록 함께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줄리아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기꺼이 왕궁에 남아 재상의 부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것이었다.
하지만 시스는 물론 소중한 아들 지스의 안위도 걸린 문제였다. 만일 레던 왕성이 혼트 제국군의 손에 점령당하면 큰일이었다. 가족 전체가 인질로 잡혀서 남편 카록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고민하던 줄리아는 시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스, 너 지스 데리고 쿤트 영지로 내려가 있지 않을래?”
“줄리아는?”
“난 이곳에 남고.”
“싫어.”
시스는 고민하지도 않고 거부했다. 그런 시스를 줄리아가 타일렀다.
“시스, 네 마음은 알지만 지스의 안전도 생각해야지.”
“그럼 줄리아가 가.”
“얘는, 지스는 네가 데려가야지.”
“난 싸울 수 있어. 줄리아가 가.”
그랬다.
시스는 4서클의 마법사였고, 짧지만 용병생활도 했었다. 싸움에 있어서는 줄리아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해낼 터였다.
“어휴, 어떻게 너만 남겨놓고 갈 수 있겠니?”
마법사라고는 하나 시스는 시스. 귀여운 시스를 혼자 남겨놓고 떠난다는 것은 줄리아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시스가 말했다.
“그럼 다 같이 남아.”
“지스는?”
“……그럼 줄리아가 데리고 가.”
“……내가 미친다, 미쳐.”
줄리아는 머리를 싸쥐고 괴로워했다.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이럴 때 남편 카록이 있었으면 명쾌한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위급한 때에 여자와 아이밖에 없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때마침 그때 저택에 한 남자가 돌아왔다.
바로 리간드 가문의 첩보조직을 맡고 있는 에반 테일러 남작이었다.
“아직도 이곳에 계셨군요.”
에반은 줄리아와 시스, 지스를 둘러보며 인사를 했다.
에반의 등장에 줄리아는 화색이 되었다.
“마침 잘 왔어요, 테일러 남작. 어찌 해야 할지 의논하고 있었어요.”
“쿤트 영지로 갈지 왕실에 의탁할지 고민 중이시겠군요?”
에반은 곧바로 핵심을 찔러왔다. 역시 남편의 심복다웠다.
“맞아요!”
“왕실로 가십시오.”
에반은 명쾌하게 결정을 내려주었다.
“왕실로요? 괜찮을까요?”
“레던 왕성이 혼트 제국군에 점령당할까봐 걱정되시는 모양이군요.”
“맞아요. 우리가 붙잡혀 인질이 되어버리면 남편까지도 위험해지잖아요.”
“어차피 이 시점에서 레던 왕성이 점령당하고 국왕 폐하께서 사로잡히면 전쟁은 끝납니다. 전쟁이 패배로 확정되는 마당에 새삼 인질이 된다고 해서 해를 입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혼트 제국군은 야만인들로 악명이 높잖아요.”
“그럼 주군께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주군의 보복을 걱정해서라도 그들은 예우를 갖출 겁니다. 그리고…….”
에반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꾸 패배를 염두에 두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건대, 저는 이번 쥬르덴 후작과의 싸움이 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에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카르스 황제가 꾸민 계획이 무엇인지 저는 대충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레던 왕성이 혼트 제국의 수중에 떨어지도록 놔둘 생각은 없으니, 큰일은 제게 맡기시고 왕궁으로 대피해 계십시오. 이 저택은 매우 위험합니다.”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에반이 아니었다. 그가 혼트 제국군을 막아내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정말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 있는 에반의 태도를 보고 줄리아는 가슴 속에 있던 불안감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래서 우리 여보가 이 남자를 곁에 둔 거구나.’
한때 고(故)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휘하에서 온갖 음흉한 짓을 꾸몄던 ‘란즈헬의 청소부’ 에반 테일러 남작. 뛰어난 인재인 건 인정하지만 영 꺼림칙스러웠었는데, 이제야 그 진가를 확실히 알게 된 줄리아였다. 이토록 든든한 남자가 아닌가.
“좋아요,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더는 불안하지가 않네요. 그렇다면 저 역시 안심하고 리간드 후작부인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할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대피하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반은 짧게 인사를 하고는 떠나버렸다. 에반이 사라지자 줄리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정이 났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니벨 영감!”
줄리아는 큰 목소리로 집사 니벨 영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짐은 다 쌌나요?”
“말씀하신 대로 필요한 짐은 다 쌌습니다. 그런데 식량창고에 있는 식량들은 그대로 두어도 되겠습니까? 저 식량들이 혼트 제국 놈들 손에 들어가면 안 될 텐데요.”
“다 생각이 있으니 염려 마세요. 짐 다 쌌으면 하인 열 명만 남겨두고 왕궁으로 가세요.”
“왕궁으로 말입니까?”
“네.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왕궁에 머물게 될 거예요. 왕실에는 내가 서신을 보낼게요.”
그리 말하고 줄리아는 시스를 바라보았다.
“시스, 니벨 영감님과 함께 먼저 왕궁에 가 있어.”
“줄리아는?”
“난 잠시 가볼 데가 있어.”
그 말에 시스는 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오늘 내로 따라갈 테니 걱정 마.”
“위험한 일은 안 돼.”
“어휴, 알았다니까. 내가 뭐 창 들고 싸우기라고 하겠니?”
줄리아는 남편을 대신하여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리간드 후작가를 총지휘했다.
시스와 지스, 그리고 니벨 집사 및 하인과 하녀들은 여러 대의 마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왕궁으로 떠났다.
그렇게 우르르 떠나고 나자 리간드 후작가 저택은 갑자기 한산해졌다.
저택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저택 경비대 2백여 명과 하인 10명, 그리고 줄리아뿐이었다.
저택에 남겨진 하인 10명은 어리둥절하여서 줄리아에게 물었다.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따라와.”
줄리아는 하인 10명을 이끌고 저택 지하로 내려갔다. 비밀통로가 있는 와인저장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