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 회: 15권 - 12장. 싸우는 사람들 -->
12장. 싸우는 사람들
쥬르덴 후작은 산길로 우회하여 레던 왕성으로 진격하는 동안, 뮤트 공작가의 요새 템플 오브 나이트는 륭겐 후작의 군단이 포위했다.
륭겐 후작 군단의 병력은 무려 8만.
거기다가 륭겐 후작이 자랑하는 혼트 제국 최강의 무력집단 흑십자 기사단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쥬르덴 후작의 군단보다도 한층 강력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템플 오브 나이트의 높고 굳건한 성벽 앞에 진을 친 륭겐 후작의 군단은 충차와 공성탑을 조립하는 등 공성준비에 들어갔다.
공성의 프로페셔널이라 불리는 혼트 제국군.
륭겐 후작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그들은 장교들의 통솔 하에 병사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병사 하나 하나가 가만히 놀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모습은 잘 훈련된 정예 군대의 그것이었다.
“평원에서 화끈하게 붙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륭겐 후작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수년 전, 륭겐 후작은 들끓는 투지를 이기지 못하고 뮤트 공작을 불쑥 찾아가 나도 한 판 붙자며 요구했었다. 그때 뮤트 공작은 단호히 거절했더랬다.
그때의 아쉬움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비록 치사한 정령사 리간드 후작에게도, 괴물딱지 같은 노인네 롬펠 대공에게도 연거푸 패하였지만 륭겐 후작은 결코 투지가 꺾이지 않았다. 제대로 목숨을 걸고 강자와 일전을 겨루고 싶었다.
레던 왕국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뮤트 공작은 아주 좋은 상대였다.
“에이, 안 되겠다!”
결국 끊는 피를 참지 못하고 륭겐 후작은 성큼성큼 템플 오브 나이트의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면 모두 맞아야 할 그런 가까운 거리였지만, 륭겐 후작은 겁이 없었다. 사실 화살 정도에 당할 륭겐 후작도 아니었다.
“여봐라―!!”
쩌렁쩌렁한 고함.
성벽이 울리는 듯한 엄청난 목소리였다.
“뮤트 공작―! 크라일 뮤트―!”
그의 행동에 성벽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뮤트 공작가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륭겐 후작이 소리쳤다.
“얼마 전의 활약상은 잘 들었다! 홀로 유유히 나아가 적병 하나를 부상 입히고 돌아갔다지? 캬,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 참 로망을 아는구나!’싶었다―! 그런데 이 륭겐도 무인의 로망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혼트 제국군 진영마저도 어리둥절하였다.
륭겐 후작이 계속 말했다.
“이리 나와라! 나랑 한 판 붙어보자! 일대일! 무릇 무인이라면 일기토가 정답 아니겠느냐! 안 그래―?!”
그러고 나서 잠시 후.
성벽 위로 뮤트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기토를 청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4배나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놓고서는 일기토를 주장하는 것을 보니 그대가 얼마나 로맨티스트인지는 알겠군.”
“푸하하! 그럼 이제 뮤트 공작 당신도 한 번 로맨티스트임을 증명해보이지 않겠는가? 크고 높은 성벽 뒤에 무인의 로망은 없는 법이다!”
륭겐 후작의 도발에 뮤트 공작은 동요하지 않고 대꾸했다.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그대의 병력을 5킬로미터 밖으로 물려라. 그러면 상대해주마.”
“병력을 물리면 정말 상대해줄 거냐?”
륭겐 후작의 물음에 뮤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군대를 끌고 나와 그대를 사로잡아주지.”
“크하하하―!”
륭겐 후작은 폭소를 터뜨렸다.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젖히던 륭겐 후작은 작별인사 하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다! 그냥 심심해서 한 번 말 걸어본 거다!”
륭겐 후작은 휘적휘적 자기 아군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템플 오브 나이트의 공방전은 그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쥬르덴 후작의 7만 군단이 첫발을 내딛은 데에 이어서 륭겐 후작의 8만 군세도 템플 오브 나이트를 공격했다.
그렇게 북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에서도 군사행동이 이어졌다.
카이슨 후작의 군단과 롬펠 대공의 군단 또한 국경을 넘어 바덴 강의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 진격한 것이다.
그들의 첫 목표는 지리상 린델 백작령과 가장 인접한 란즈헬 백작령.
란즈헬 백작, 로도크 백작, 앵거스 백작, 두첸 백작 등 육제후의 남은 4인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대응하기로 했다. 자금이 넘치는 네 가문의 연합군은 평소에 길러온 군대말고도 돈을 뿌려서 용병들까지 긁어모으니 병력규모가 15만을 헤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바덴 강 유역 가까이에 주둔해 있던 왕실특별군의 사령관 릭 페르난도 백작 역시 군대를 움직여 리간드 영지로 향했다. 여차하면 남하하여 란즈헬 백작령을 도울 수도 있는 그런 위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쿤트 백작가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녀오마. 더 늦장부리면 먼저 도착한 릭 녀석이 또 트집을 잡겠구나.”
바스크 쿤트 전 백작.
이젠 모든 것을 맏아들 아서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그였지만, 검까지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전쟁이 터지자 바스크는 사전에 계획했던 전략대로 군대를 끌고 리간드 영지로 내려가기로 했다.
쿤트 가문이 보유한 거의 전 병력을 이끌고 출정 준비를 마친 바스크.
이제 그는 출발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아버님, 무운을 빌겠습니다.”
맏아들 아서의 말에 바스크는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염려 말아라. 롬펠인지 뭔지 하는 110년 묵은 늙은이 목은 나의 것이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녀석, 걱정 마라. 영지를 부탁한다.”
이어서 며느리 레이라도 배웅인사를 했다. 그녀는 최근에 낳은 아들 루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버님, 모쪼록 조심하셔야 해요.”
“하핫, 한두 번 치러본 전쟁이 아니다. 내 걱정은 마라.”
“할아버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하, 오냐 그래.”
손녀딸 엘레네도 넙죽 인사를 하니 바스크는 그만 흐뭇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그의 재혼 상대, 그동안 애정이 한층 깊어진 아내 미란다였다.
활력증강목걸이(일명 정력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여보…….”
“울지 마시오. 아무도 날 당해낼 수 없다오.”
“무사하셔야 해요. 제 오빠도 잘 부탁드려요…….”
“물론이오. 놈들을 쳐부수고 란즈헬 백작가도 도울 테니 울지 말고, 아무 염려 놓고 계시오.”
“네…….”
작별이 끝나자 바스크는 말에 올랐다.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스윽 손을 흔들어주고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랴!”
박차를 가하여 말을 달린다. 그 뒤를 따라 쿤트 백작가의 군대가 일제히 진군을 개시했다.
바스크의 군대가 멀찍이 떠나자, 아서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만 들어가자. 어머님도 들어가 쉬시지요.”
“네.”
저택으로 돌아온 아서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재개했다. 전쟁이 벌어지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오늘의 업무 중 가장 힘든 스케줄은 바로 오후에 있는 징집병 훈련.
가문의 거의 모든 군사전력을 바스크가 끌고 나간 상태. 빈집이나 다름없는 쿤트 영지를 만에 하나 있을 적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영지민을 징집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면 해체할 임시 징집병들이지만, 당연히 훈련은 시켜야 했다. 그것을 아서가 직접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의 위기 상황이 되면 지휘관은 영주인 아서였기 때문이다.
“휴우, 쉴 틈이 없구나.”
그나마도 카록이 선물해줬던 활력증강목걸이가 아니었으면 진즉에 과로로 쓰러졌을 터였다.
“그래도 힘내야지. 아버님도 동생들도 적진에서 분발하고 있는데.”
이제 쿤트 가문의 수장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아서는 전보다 더욱 책임감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