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 회: 15권 - 10장. 함정(1) -->
할슈타인이 기사 한 명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기사들이 들이닥쳐서 주방의 요리사들과 요리를 나르던 시녀들까지 전부 끌어냈다.
나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고 보니 카르스 황제는 다른 혼트 황족을 남김없이 죽이고 황위에 오른 인간이었다. 내전 땐 포로를 전부 불태워 학살했다.
저들을 전부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치밀었다. 맹독도 아니고 고작 수면제 아닌가.
그냥 넘어가도 될 걸 굳이 내가 언급한 탓에 벌어진 일이어서 나 또한 책임감을 느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카르스 황제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제가 했어요!”
시녀 한 명이 공포에 질려 소리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맙소사…….
날 아니꼽게 째려보던 그 금발의 귀여운 시녀였다. 그녀가 내 음식에 수면제를 넣은 것이다!
시녀는 주저앉아 펑펑 울면서 말했다.
“제가 했습니다, 폐하. 제가 약을 넣었어요!”
“단독범행이냐.”
할슈타인 후작이 추궁했다.
시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슈타인 후작은 카르스 황제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 아니군.”
카르스 황제는 시녀의 표정과 행동거지를 보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판결.
“죽여라.”
“옛!”
시녀를 붙잡고 있던 기사가 검을 뽑았다.
“폐하…….”
시녀는 충격 받은 얼굴로 울며 카르스 황제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리기로 했다. 그녀 딴에는 카르스 황제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독이 아닌 수면제를 쓴 건 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는 뜻이다. 황실에서 근무하는 시녀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저질렀지만, 용서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카르스 황제에 대해 두려움이 아닌 호의를 품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기사는 검을 들어올렸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무참히 베어버릴 듯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멈춰.”
무감정한 목소리가 기사를 제지했다. 모두의 시선이 카르스 황제에게 모여들었다.
카르스 황제는 시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던 시녀는 그 물음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새, 생각 말씀이신지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시녀는 당황했다.
“왜 날 보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왜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를 이해시켜봐라.”
하기야.
내가 보기에도 시녀의 행동은 이해불가였다.
아무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일개 시녀가 독단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니 타인의 감정을 몹시 알고 싶어 하는 카르스 황제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가만.
그녀는 이곳 별궁에서 일하는 시녀다.
이 별궁은 과거 카르스 황제의 어머니가 요양하던 곳. 그런 어머니와 함께 카르스 황제 또한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면…….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폐하. 혹여 폐하께서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모른다.”
“제가 보기에 그녀는 과거 폐하와 인연이 있었던 듯합니다.”
내 말에 카르스 황제는 다시 시녀를 빤히 바라봤다.
“사실이냐.”
“예, 폐하.”
시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이었다.
“수십 시녀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함께 장미궁에 전속된 친구들과 풀잎을 엮어 팔찌나 목걸이를 만들며 놀고 있을 때, 비슷한 나이였던 폐하께서 그걸 구경하시더니 다가오셔서…….”
“……왜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 것이냐.”
카르스 황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 물으셨습니다.”
“기억나는군. 그때 이후로 자주 너희들이 노는 걸 구경했어.”
“예, 맞습니다.”
“내게 꽃으로 만든 관을 선물한 적도 있지.”
“예, 맞습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네 이름은 제시다.”
“예…… 제시입니다……!”
시녀, 제시는 울먹거렸다.
“그걸 보시고서 2왕비 저하께서 폐하를 잘 부탁한다고 하시며……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봉변을…… 정말 자상하신 분이셨는데…… 많은 은혜를……!”
제시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에게 끌려나온 요리사, 시종, 시녀들도 두려움도 잊고 눈물을 훔쳤다. 다들 카르스 황제의 모친, 2왕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카르스 황제만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내게 물었다.
“리간드 후작.”
“예, 폐하.”
“본의 아니게 본 황실이 그대에게 무례를 끼친 바 사과를 표한다.”
“황공합니다.”
“그대는 그대를 해하려 했던 이 여자의 처벌을 원하느냐.”
“원치 않습니다.”
“좋다.”
카르스 황제는 명령을 내렸다.
“전부 원위치로 돌아가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죄인은 7일간의 근신형에 처한다.”
“옛!”
기사들은 끌어냈던 사람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제시는 카르스 황제의 발치에 엎드려 조아리며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치워라. 식사는 끝났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다시 중앙 홀은 카르스 황제와 나, 그리고 할슈타인 후작 세 사람만이 남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그대의 호의로 본 황실의 사람이 목숨을 건졌으니, 그 보답을 해야겠군.”
“어떤 보답이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묻겠다. 그대는 왜 이곳에 왔느냐?”
뜬금없는 질문.
내가 답했다.
“인정을 베푸셔서 온 백성이 유혈을 흘리는 재앙을 막아 달라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인정이라. 네가 제시의 목숨을 살렸듯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럼 하나 더 묻겠다. 나는 왜 그대를 이곳에 불러들였다고 생각하느냐?”
“외람되오나, 저를 붙잡아 부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맞다.”
카르스 황제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조금 부족한 대답이다.”
“예?”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했어야지.”
“…….”
의뭉스런 카르스 황제의 말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날 이곳에 붙잡아두고, 그 사이에 전쟁을 시작해서 이득을 본다. 그의 목적은 틀림없이 이것일 터였다.
그런데 부족하다고?
그럼 무언가 속셈이 더 있다는 뜻인가?
고민에 잠겨 있는 나에게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대가 레던 왕성을 비우는 것을 원하였다.”
“……레던 왕성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혼트 제국에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예상했습니다.”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쥬르덴 후작이 레던 왕성을 공략하고 있겠군.”
뭐, 뭐라고?
나는 당황했다.
그럴 리가 있나?
뮤트 공작이 막아내고 있을 터였다. 뮤트 공작가가 버티고 있는 한 레던 왕성은 안전하다. 북부대로를 가로 막고 있는 템플 오브 나이트를 점령하지 못하면 원활한 보급로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뮤트 공작이 시간을 벌고 있는 사이에 레던 왕실은 사전에 세워놓았던 ‘기동 행정’을 실시, 레던 왕성을 비우고 후퇴한다.
그걸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온 것이다.
뮤트 공작이 벌써 무너졌을 리가 없다.
“믿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물론 뮤트 공작가는 아직 건재하다.”
“……그럼?”
“그대들은 전쟁 초기에 레던 왕성을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겠지? 뮤트 공작이 시간을 버는 동안 모든 병력과 물자와 주민들을 철수시켜서 만전의 태세를 갖추려 했겠지.”
“맞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카르스 황제가 아니니까.
“타당성 있는 전략이라 생각된다. 다만 쥬르덴 후작은 뮤트 공작가를 그냥 지나치고 곧장 레던 왕성으로 진군했을 뿐이지. 너희의 국왕이 레던 왕성에서 철수하기 전에 말이야.”
그런 전략을?!
뮤트 공작가를 무시하고 곧장 레던 왕성으로 진격한다니?
터무니없는 전략이다. 그럼 보급은 어떻게 할 참이란 말인가? 군량이 바닥나기 전에 기습적으로 레던 왕성을 점령하고 물자를 약탈하겠다는 건가?
말도 안 돼.
아무리 병력차가 있다지만 한 나라의 수도가 그렇게 쉽게 함락될 까보냐? 점령하기 전에 혼트 제국군 쪽이 먼저 굶주리게 될 것이다.
템플 오브 나이트가 차단하고 있는 북부대로가 아닌 다른 보급루트라도 있단 말인가?
“의문이 많이 드는 모양이군?”
카르스 황제는 내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좀 더 창의성을 발휘해보도록.”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카르스 황제의 태도였다.
나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