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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전초전
“서둘러라!”
질풍처럼 달리는 할슈타인 후작의 독촉에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황급히 뒤따랐다.
할슈타인 후작은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이야.’
황제의 대역에게 속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물론 했었지만, 설마 카르스 황제가 있는 장소까지 알고 있을 줄을 몰랐다.
그 정도로 정령의 감각이 미치는 범위가 광대하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렇듯 카르스 황제와 카록 리간드가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이 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터였다.
할슈타인 후작이 이끄는 무리는 황제가 있는 북쪽의 별궁에 도착했다.
이사벨라 궁전의 북쪽에 있는 외로운 별궁.
한때 장미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아 이름 없는 별궁이 된 장소.
할슈타인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곳에 얽힌 그리 좋지 않은 추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
“산책 중이셨습니까?”
“그렇다.”
카르스 황제가 덤덤히 대꾸했다.
미묘한 상황이었다.
모습을 감춘 채 카르스 황제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내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방비상태인 황제를 나와 단 둘이 놓자니 불안하고, 그렇다고 나서서 떼어놓자니 내가 황제를 인질 삼아 해코지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묘한 긴장감은 할슈타인 후작 일행이 도착함으로서 더욱 팽팽해졌다.
오러 마스터 할슈타인 후작.
오러 엑스퍼트 급의 기사들이 13명.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12명.
전쟁도 치를 수 있을 만한 전력이 은밀하게 별궁에 잠입, 사방에 배치되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자코 매복해 있었지만, 나는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훤히 보였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신경전이었다.
할슈타인 후작이 나에게 쏘아 보내는 무형의 살기가 느껴졌다. 일반인이라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만한 살기였지만, 정령들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나는 그 압박감에서 자유로웠다.
할슈타인 후작의 살기는 마치 나에게 황제에게 허튼 수작을 부리면 죽이겠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나 역시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땅속에 있는 노움.
몸속에 깃들어 있는 운디네와 샐러맨더.
그리고 소환은 안 해놨지만 부르면 재깍 나타나는 실프까지.
자칫 고요한 정원이 혈투로 얼룩질 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카르스 황제 역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자약했다.
“오랜만이군.”
문득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감기에 걸린 어머니가 이 별궁에 요양했다.”
“…….”
“나와 동생도 어머니를 따라 이 별궁에 와서 지냈다.”
“그랬군요.”
“햇살이 따듯한 오후에는 셋이 함께 이 정원에 나와 산책을 했지.”
그래서 여길 산책하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나보군. 어쩐지 그답지 않다 싶었어.
“어머니도 동생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잘 웃곤 했어. 난 왜 웃는 건지 몰랐는데, 어머니가 웃으니까 그냥 따라 웃었어.”
카르스 황제가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나도 뒤따랐다.
할슈타인 후작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도록, 카르스 황제와의 거리를 매우 가깝게 유지했다.
할슈타인 후작 일행도 우리를 뒤따랐다. 소리를 죽인 채 포위망을 유지하며 쫓아오는 솜씨가 굉장히 능숙하고 정교했다.
“이곳이군.”
카르스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정원수와 꽃들과 잔디가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그런 장소였다.
“여기서 어머니와 동생이 살해됐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순히 추억 어린 장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카르스 황제의 인생 중 최악의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었다.
“이곳을 자주 찾으셨습니까?”
내 물음에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날 이후로 처음이다. 딱히 피할 이유도, 굳이 찾을 일도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지.”
그렇다면 나를 계기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뜻이로군.
좋아.
나쁘지 않은 신호다.
난 내가 카르스 황제를 설득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일의 원인이 된 곳.
슬픔을 느낄 수조차 없었으나, 분명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벌어진 그 장소를, 카르스 황제는 스스로 찾았다.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자신을 지배하는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맞설 의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암살자들이 뛰쳐나와 어머니와 동생을 죽였다. 그래, 또렷이 기억나는군. 할슈타인 후작은 저곳에 있었지.”
카르스 황제는 무성한 수풀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지금 역시 할슈타인 후작은 바로 그 지점에 은신해 있었다.
“뒤늦게 뛰어나온 할슈타인 후작 덕에 간신히 나는 목숨을 건졌지만 어머니와 동생은 즉사했어.”
카르스 황제가 떠올리는 그날의 사건.
할슈타인 후작의 입장에서도 그날의 사건은 인생을 바꿔놓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황제를 위해 목숨은 물론 무인으로서의 명예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지독한 충성심은 그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터다.
지금, 그날과 같은 위치에 은신한 할슈타인 후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폐하…….’
할슈타인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 잊을까. 그날의 일을.
사실은 카르스 황제보다 더 그날의 사건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할슈타인 후작이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카록이 카르스 황제에게 묻는다.
황제가 말했다.
“글쎄. 공포에 질려야 했을까, 슬픔에 젖어야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몰라 고민했다. 현실이 아닌 게 아닌지 의심했다. 내 삶에 있어 언제나 함께 했던 어머니와 동생인데, 암살자의 칼질에 너무나 쉽게 죽어 쓰러지더군. 소중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잃을 수 있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인가 싶었다.”
할슈타인 후작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기분이 어땠냐고?
‘어땠을 것 같으냐!’
할슈타인 후작은 카록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끔찍한 광경을 봐야 했던 그 심정!
간신히 구한 어린 황자는 모든 행복을 잃어버린 채 감정 없는 괴물이 되었다. 그걸 지켜보며 할슈타인 후작은 피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 소임을 완수하지 못한 스스로를 응징하듯 자신을 혹사시켰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숴서 무의 극의를 깨우쳤다.
그리고 현재.
그때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사방을 포위한 채 은신한 마법사와 기사들.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 뛰쳐나갈 태세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
눈앞에는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카르스 황제와 황제를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적국의 재상이 단 둘이 함께 있었다.
할슈타인 후작은 그날과 같은 장소에서 황제의 안위를 담보로 잡고 있는 카록 리간드가 미치도록 미웠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록이 황제와 가까이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카르스 황제의 태도였다.
“묻겠다. 그럴 땐 어떤 기분이 들었어야 했느냐? 난 어떤 표정을 지었어야 했느냐?”
이에 카록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놀라고 당황하고 멍하겠지요. 그뿐입니다.”
“난 슬프지 않았다. 날 사랑하던 유일한 사람들을 잃었는데도 말이지.”
“슬픔은 그렇게 간단하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보다 뒤늦게…… 함께 했던 지난 추억이 떠오르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서서히 밀려옵니다. 이별과 함께 자기 안에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슬픔은 찾아오지요.”
“그때 후로 긴 세월이 흘렀는데 나는 아직도 슬프지 않다. 슬프다는 게 뭔지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다.”
“아직 슬픔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분명 그날 후로 무언가를 잃었을 겁니다. 말씀해보십시오. 그날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군. 그대 말대로 아주 큰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할슈타인 후작은 마음이 심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