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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373화 (37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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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대면(2)

이사벨라 궁전의 대전에는 수십 명의 신하들이 좌우로 도열했고, 옥좌에는 마르고 창백한 안색의 카르스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의 등 뒤에는 늘 그랬듯 할슈타인 후작이 그림자처럼 버텼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카르스 황제의 얼굴이었다.

할슈타인 후작이 말했다.

“긴장하지 마라.”

“예, 옛.”

카르스 황제, 아니 황제의 대역을 맡은 청년은 애써 평상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간신히 훈련했던 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도 사실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마법병단 소속의 마법사들과 엠페러 나이츠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대전 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카록 리간드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결코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스르륵―

바닥에서 황금색의 무언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돌발 사태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차 있었던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움찔했다.

할슈타인 후작도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카르스 황제의 대역은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황금색의 물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안전모와 자기 덩치만한 삽을 들고 있는 열네 살 남짓한 소녀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할슈타인 후작의 얼굴표정이 일그러졌다.

-안녕.

노움이 순진한 눈망울을 말똥말똥 뜨며 말했다.

“뭐냐.”

할슈타인 후작이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아빠가 여기에 황제가 있나 확인해보래.

“보면 모르겠나. 폐하의 어전에서 무례를 끼치지 말고 어서 대령하라 하여라.”

노움은 물끄러미 카르스 황제의 대역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담긴 어린아이 같은 그 눈초리에 할슈타인 후작은 내심 불안해졌다.

겉모습은 완벽하다.

마법병단에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게 변형시켰다.

진짜 카르스 황제는 카록 리간드가 이사벨라 궁전에 도착한 날부터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할슈타인 후작은 거의 24시간을 황제의 대역을 쫓아다녔다.

만약 외형으로 판별한다면 눈치 채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 정령은 보통 정령이 아니었다. 중급 정령이었을 때도 할슈타인 후작이 오러 마스터였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차렸었다.

‘속아라. 속아 넘어가라.’

할슈타인 후작은 속으로 염원했다.

황제의 대역을 살펴보던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 맞나?

‘속았다!’

할슈타인 후작은 물론 신하로 변장한 마법사와 기사들도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노움이 말했다.

-그럼 하나만 시험해볼게.

‘뭐?’

그때였다.

커다란 불꽃이 허공에서 일어났다.

-크헤헤헤! 마른 장작!

난데없는 사악한 음성!

“큭!”

할슈타인 후작조차도 놀라 검을 반쯤 뽑았다.

“아, 악마?”

“공격이냐!”

마법사와 기사들도 놀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헉!”

황제의 대역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정령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크헤헤! 가짜! 가짜! 가짜!

샐러맨더는 기분 나쁘게 떠들며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걸 깨닫고 난색을 한 황제의 대역을 바라보며 노움은 방긋 웃었다.

-황제 아니네.

‘빌어먹을.’

할슈타인 후작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대역으로 속이려던 계획이 헛수고로 돌아간 것이다.

-근데 아빠는 사실 이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뭐?”

눈살을 찌푸리는 할슈타인 후작에게 노움이 말했다.

-황제는 북쪽에 있는 별궁에 있잖아. 하도 정성들여 준비했기에 그냥 모른 척 해준 거래. 헤헤헤.

다들 그만 허탈해져버렸다.

아예 처음부터 헛수고였다니.

특히 마법사들은 마치 인생의 덧없음을 모두 맛본 듯한 얼굴들이었다.

황제의 대역을 준비하는 데 쏟은 마법병단의 노력은 상당했다. 별달리 뾰족한 대 정령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쏟았다. 근육상태와 눈동자 색깔은 물론이고, 손발톱과 머리숱, 눈썹모양까지. 정령의 정밀한 감각을 속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고난이도의 작업들이 처음부터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카록 리간드의 정령술을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할슈타인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카르스 황제가 있는 별궁은 이곳에서 족히 3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 위치했다.

그런데 거기까지 정령의 감각이 미친다는 것은, 아예 이사벨라 궁전 전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속이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아무튼 이제 알현하러 갈게. 안녕.

노움은 손을 흔들어주고는 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알현하러 간다고?!’

순간 할슈타인 후작은 기겁을 하여 대전을 뛰쳐나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마법사들과 기사들도 뒤따랐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의 대역만 덩그러니 남았다.

***

이사벨라 궁전의 북쪽에 외롭게 자리 잡은 별궁이 하나 있었다. 이 별궁에 어떤 이름이 붙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카르스 황제는 이곳에 있었다.

나는 하늘을 날아 별궁의 상공에 도달했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 카르스 황제는 있었다.

혼자서 어떤 생각에 잠긴 채 거닐었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기사들은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잠복해 있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산책을 하고 있는 카르스 황제.

그러나 어쩐지 그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면서 산책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마치 인형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인간인 이상 감정이 없을 리는 없는데…….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경험들로 인하여 감정이 억눌러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 억눌림에 익숙해져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도 그런 정신적인 문제를 악화시켜가는 요인이다.

혼트 제국의 황제!

동등한 자가 있을 수 없는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으니 필연적으로 정서적인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카르스 황제는 그런 태생과 과거에 겪었던 충격적인 불행과 주변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일 터였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불쌍히 여기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개인적인 수준의 마음의 병이 아니다. 아주 대륙의 안위가 위태로운 레벨로 미쳐버렸다.

카르스 황제는 자신이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고 굳게 믿었고, 실제로 그의 활약과 업적을 흉내 낼 능력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설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정체성을 얻기 위해 대륙을 정복하려 한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알면서도 그를 만나러 왔다.

만약에 카르스 황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하강했다.

내 그림자를 본 카르스 황제가 날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만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재앙의 원인이 되는 남자, 모든 일의 근원인 인물을 보는 나의 감정은 심란하기만 했다.

그런 복잡한 심사가 담긴 나의 눈빛을, 카르스 황제는 텅 빈 눈동자로 받아들인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무저갱처럼.

무감정한 인형의 눈빛으로, 심연의 눈동자처럼 나를 응시한다.

하늘 높이에서 지면에 두 발이 닿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나는 카르스 황제와 맞닥뜨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방금은 어떤 생각을 한 것이냐? 표정을 읽을 수가 없군.”

“…….”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말해라.”

카르스 황제가 재촉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 말해라.”

나는 겨우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 원한과 복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서냐?”

“폐하께서는…….”

“말해라.”

또다시 재촉.

나는 말했다.

“폐하께서는 감정을 못 느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았다.”

“……?!”

“놀라움을 느끼게 하다니. 이 감정은 오랜만이다. 칭찬해주마. 한눈에 날 파악한 건 네가 처음이다.”

처음 만난 날의 저녁식사 때, 나는 카르스 황제의 마음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칭찬해주겠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크게 놀랐다. 어머니와 동생이 암살당한 이후로 이렇게 놀라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좋군.”

“어째서…… 놀라신 것입니까?”

“나를 이토록 완전히 꿰뚫어본 것은 네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레던 왕실에서도 등용하고 싶어서 안달할 정도의 인재라더니, 과연 대단한 통찰력이구나.”

그렇다. 그는 말했다. 자신을 완전히 꿰뚫어본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여길 걷곤 했다.”

측백나무 정원을 함께 산책하면서 그는 내게 말했었다.

“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듣기로는 먹은 음식에 맹독이 들어 있어 사경을 해매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는군. 그 전까지는 잘 웃고 울기도 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여길 걷다가 나에게 달콤한 사탕을 주곤 했다. 내가 그걸 먹으면 어머니는 날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나도 어머니를 따라 웃었지. 그렇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웠는데…… 이젠 기억이 안 나. 어떻게 웃는 건지 모르겠다.”

카르스 황제는 웃음을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기이하게 비틀리는 입술. 인형의 미소.

“배다른 형제에게 어머니와 친동생이 암살당했을 때는 당황했지. 소중한 어머니와 친동생을 잃었는데 슬픔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황위에 오르고서 모든 형제를 전부 죽여서 분풀이했다. 분노도, 통쾌함도 느낄 수 없어서 더욱 상실감은 커져갔고.”

“…….”

“왜 내게 이런 비극을 줬냐고 운명을 원망했지. 그리고 운명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카르스 황제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절망도 모두 필요 없다. 나는 오직 못 다한 위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나는 크로센트 베잘리우스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각성한 것이다.”

당시에는 카르스 황제와 만났다는 사실에 긴장하였고, 또한 그의 충격적인 됨됨이에 경악하여 간과하였다. 진즉에 떠올렸어야 했는데.

카르스 황제.

당신은 왜 그때 굳이 입에 담을 필요가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나.

그 의미를 나는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

“좋다. 그대에게는 내 특별히 면책특권을 주지.”

“면책특권이라니요?”

“첫 만남을 기억하는가?”

“평생 잊을 수 없지요.”

“그때와 마찬가지다. 앞으로 그대는 나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용서하겠다. 내게 반말을 해도 좋고 욕을 해도 용서한다. 영원히 말이다.”

“지나치게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상관없다. 이제 말해봐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 끝나고 카르스 황제와 독대를 했을 때, 난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할슈타인 후작이 날 씹어 먹을 듯한 눈빛을 했지. 그리고 카르스 황제는,

“큭큭큭큭…….”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일그러진 듯한 기괴한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인형 같은 이 카르스 황제가 말이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젠 안다.

카르스 황제는 날 특별히 여겼다.

무감정한 그가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나에게만은 감정을 보였다.

그래서 이상한 면책특권 같은 걸 내게 주었다. 내가 스스럼없이 다가와주기를 바랐다.

나에게만은 굳게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을 살짝, 아주 약간 열어두었던 것이다.

머나먼 저편에 숨어 있는 진짜 자신의 속마음을, 나만은 알아차려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카르스 혼트?

“오랜만이군.”

지면에 착지한 내게 카르스 황제가 덤덤히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가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그대를 마차에 태운 채 혼트 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

“원 농담도 참 무섭게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닌데.”

뜬금없이 떠오른 기억에 나는 웃었다. 아무렴, 좋아해야지. 혼트 제국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원했던 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

좋아.

원했던 대로 해주겠어.

스스럼없이 당신에게 다가가주겠어.

난 그러려고 이곳에 온 거야.

나는 웃으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카르스 황제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이상한 웃음이라고 질색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그는 ‘웃으려 했다’라는 걸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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