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70화 (370/529)

<-- 370 회: 15권 - 6장. 과거의 모습 -->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만약에 더 이상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이 없다면 이 빛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그라질 것이다.

수백 가닥으로 갈라진 빛 무리가 실타래처럼 엉켜 덩어리를 이루었다.

꾸물꾸물.

빛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정령이 소환되는 것이었다.

“성공이다!”

나는 환호했다. 성공이었다. 또 다른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과연 어떤 정령이 나타날지 몹시 궁금해졌다. 제발 샐러맨더 같은 골치 아픈 놈은 안 나타나기를…….

그 순간, 한 줄기의 미풍이 내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고 지나갔다. 나는 소환된 것이 바람의 정령 실프임을 직감했다. 오리엔 왕국에서 세렌스 공주가 실프와 계약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휘이잉―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어왔다.

사방에서 불어와 한 곳에 집중된 바람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반투명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 형태가 굉장히 컸다. 다 큰 성인의 체형에 준할 정도였다. 처음 소환되는 하급 정령이 저만한 크기가 될 수도 있나? 난 놀라워하며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꿈틀꿈틀.

팔다리가 생겨나고 얼굴이 솟았다. 이목구비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갖춰진 그 모습은…….

“에엑?!”

난 기겁했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실프가 날 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도, 키도, 체형도 영락없는 나였다. 아니, 체형은 나보다 약간 더 날씬해 보인다. 아주 약간.

얼굴은 조금 앳되어 보이는 게, 딱 막 성인이 되었던 열여덟 살 시절의 모습이었다.

“뭐야 이게?”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딱히 어떤 정령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한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로 상상도 못했다.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실프.

아니, 외모는 영판 열여덟 살 시절의 나였지만, 어딘지 다른 기색이 느껴졌다.

얼굴 표정에서 보이는 인상이 나와는 달라보였다. 어딘지 살짝 얼빠지고 여유는 보이지 않는 면이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진 않단 말이야. 저 표정, 저 분위기…….

-나랑 계약해줄 거야?

실프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독백을 한다.

-하아, 난 아마 안 될 거야…….

“…….”

아, 이제 알겠다.

저 자신감 없는 모습. 자신에 대한 비관적인 마인드!

그렇다.

실프의 모습은 딱 전생의 나였다.

***

어쨌거나 계약은 했다. 이로서 나는 땅, 물, 불에 이어 바람의 정령까지 거느린 정령사가 되었다.

아직 맥델 백작 일행은 도착하지 않아서 나는 정령들과 함께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전생의 내 청년 시절의 모습을 한 실프는 어딘지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 저 꼴을 보고 있으니, 섣불리 아내로 맞이한 레이라(지금은 형수)에게 처음 바가지 긁혔을 때가 떠오른다.

노움과 운디네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실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샐러맨더는 아예 실프의 면전에서 기웃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누굴 닮아 얼빠져 보인다, 크헤헤! 불만 있냐?

실프는 샐러맨더를 빤히 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쉴 뿐이었다. 아, 진짜 볼수록 짜증이 치미네.

-이젠 다 틀렸어…….

뜬금없이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실프.

어. 동감이다, 이 자식아.

저런 놈이 튀어나오다니, 대체 대자연의 의지가 나에게 무슨 앙심이라도 품은 건가? 그런 거야?

정령술에 처음 입문했을 때가 생각난다.

노움과 처음 만났을 때 난 뛸 듯이 기뻤다. 이 얼마나 귀엽단 말인가!

운디네?

역시나 더없이 사랑스럽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정령술이 인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

샐러맨더…….

악마 새끼가 튀어나왔다. 생긴 건 내 망나니 아들을 빼닮았고, 성격은 그보다 1만 배는 더 사악했다. 혹시 계약할 때 실수로 마법진이 마계와 연결됐나 의심스럽다.

그리고 실프…….

이젠 정말 모르겠다.

샐러맨더까지는 이해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전생의 망나니 아들에 대한 나의 미련이 형상화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전생의 내 청년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난 실프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가 전생의 내 모습을 그리워한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전생의 내 젊은 시절은 내 오점에 가깝다. 뼛속 깊이 열등감에 빠져 지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실패를 겪었던 그 시절이 그리울 리가 있나. 도리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실프는 내가 가장 보기 싫어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란 듯이 나를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 대면시켰다.

정령이 정령사에게 어떤 악의가 있을 리가 만무할 터.

정령은 정령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소환될 텐데, 실프는 왜 저런 모습이 된 거야?

“아, 모르겠다.”

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더 생각해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은 또 있거든.

“저 녀석은 대체 왜 저렇게 큰 거야?”

청년 시절의 나와 체격까지 똑같은 실프. 열네 살 남짓한 외모를 가진 노움, 운디네는 물론이고 샐러맨더보다도 크다. 저거 하급 정령 맞아?

한 번 시험해봐야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실프에게 명령을 보냈다.

어이, 얌마.

이쪽 봐봐.

그러자 놀랍게도 실프는 스윽 의욕 없는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마음이 연결되어서 말로 하지 않아도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급 정령부터였다. 지금 막 계약한 실프는 적어도 중급 정령 이상이란 뜻이었다.

처음 소환에 응한 정령이 처음부터 중급 이상일 수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상급 정령사에다가 워낙 많은 정령친화력을 보유한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상급 정령인지도 한 번 테스트해봐야겠군.

크기로 봐서는 이미 다른 정령들보다도 큰 실프였다. 상급 정령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난 실프와 감각 공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다. 상급 정령은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히 놀라운 결과였다.

처음부터 중급 정령이 소환되어 계약에 응하다니.

상급 정령사가 정령 계약을 시도할 경우 중급 정령이 소환에 응하는 모양이었다.

카르스 황제의 함정에 대비하여 비장의 카드를 만들기 위해 시도한 일이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큰 전력 상승이었다. 하급 정령의 공격력은 오러 엑스퍼트나 고위급 마도사에게는 큰 효과가 없지만, 중급 정령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아빠랑 똑같은데 너무 우울해보여.

-기운 내…….

-크헤헤, 무기력증!

세 정령은 실프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실프의 얼굴에 귀찮음이 짙게 어렸지만 의외로 정령들을 기피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샐러맨더와 실프가 나란히 있는 걸 보며 심란함을 느꼈다. 전생의 나와 망나니 아들이라니……. 설마 내가 저 꼴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해질녘이 되었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무렵에 맥델 백작 일행이 도착했다.

난 즉시 실프를 소환해제 시켰다. 내 비장의 카드인 실프를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맥델 백작이 마차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물어왔다.

“마차에 갇혀 있던 것보다 훨씬 나은 시간을 보냈소.”

“그렇군요. 후작님께서 지루해하시니 내일부터는 조금 더 속력을 내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알겠소.”

맥델 백작 일행은 야영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책을 읽는 맥델 백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바빠 보였다. 그럼 인심 써서 저녁식사는 내가 준비해줄까?

“얘들아, 사냥 좀 해오렴.”

-응!

-응.

-통구이!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가 각자 대답하며 어디론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정령친화력이 약간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정령들이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노움은 지름 1미터가량의 거대한 흙 접시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거기에 암사슴 통구이가 놓여 있었다.

노움이 흙으로 접시를 만들고, 운디네가 사냥한 사슴을 깨끗이 씻고, 샐러맨더가 구운 듯했다.

어휴, 뉘 집 자식들이기에 저렇게 사냥을 잘 할까.

내가 가만히 앉아서 사슴을 사냥하자 다들 경외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슴 통구이를 모두에게 나눠주자 다들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이제 혼트 제국의 수도인 황도 티베리우스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