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회: 15권 - 5장. 후작부인 줄리아(2) -->
“그러고 보니 왕립학교에서 재미있는 일을 벌이던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재미있는 일?”
줄리아는 왕립학교의 축제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미첼 로도크와 존 스페이의 주도로 학생회가 축제로 얻은 수익금을 왕실에 군자금으로 기증하려 한다는 취지도 들려주었다.
“어머, 정말 기특한 일이에요!”
시에나 왕비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줄리아는 존과 미첼에 대한 칭찬을 하며 시에나 왕비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어린 나이에도 훌륭한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네요.”
시에나 왕비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다들 이렇게 올바른 생각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걱정스러운 줄리아의 물음에 시에나 왕비가 답했다.
“실은 최근 들어 폐하께 상소문이 자주 올라가고 있어요. 왕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볼모로 삼을 생각이 아니냐는 취지의 공격적인 내용으로요.”
“왕실이 학생들을 인질로 삼는단 소린가요?”
“왕립학교가 전쟁이 났을 때 영주들의 적극적인 참전을 촉구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냐는 것이죠.”
전쟁 위기가 고조된 시점에서 개교된 왕립학교였기에 그런 의심을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줄리아는 기가 차서 말했다.
“왕립학교는 인재를 키우는 목적 이외에도 이 나라 전 귀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취지로 설립된 것이에요. 그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니, 어지간히도 삐뚤어진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네요.”
물론 자식을 학교에 보낸 영주들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부터 따질 국면이 아니지 않은가.
혼트 제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는 건 당연했다.
자식을 볼모로 삼는 거냐고 나라의 국왕에게 따지는 시점에서 이미 여차 하면 나라를 외면하고 발 뺄 태세라고 증명하는 꼴이었다.
줄리아가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훌륭한 귀족의 모범을 보인 두 사람을 치하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네요.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 작은 일이나마 시도한 그 아이들에게 상을 주어야겠어요.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시겠어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요?”
의아해하는 시에나 왕비에게 줄리아가 말했다.
“실은 저희 리간드 가문도 미첼 로도크와 존 스페이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요.”
“보답이요?”
“네. 아시다시피 왕립학교는 남편의 강력한 주장으로 설립되었으니까요. 왕립학교의 필요성은 다들 알지만, 굳이 전쟁의 조짐이 보이는 이런 시기에 설립해야 했냐는 의문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죠. 그런데 그 두 소년이 남편의 기대에 부응해주었어요. 육제후 출신의 미첼과 왕실파 출신의 존 두 사람이 합심해서 나라를 위해 움직여준 것이죠.”
“그렇군요.”
어쩌면 레던의 현자라 불리는 카록의 명성에 한 점의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왕립학교였다. 그런데 미첼과 존으로 인하여 왕립학교를 설립한 성과를 가시적으로 거둘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두 사람에게 하사할 상을 저희가 준비할 테니, 폐하께옵서 친히 치하해주시면 안 될까 싶어요.”
시에나 왕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볼게요. 아마 폐하께서도 승낙하실 거예요.”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불렀다.
미첼이 그녀의 기대에 부응했듯, 줄리아도 두 사람을 제대로 밀어줄 요량이었다.
분명 장차 두 소년은 이 나라의 동량이 되리라.
***
하지만 줄리아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미첼 로도크와 존 스페이, 두 사람이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날이 그리 머지않은 미래라는 것을 말이다.
***
왕립학교의 축제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학생회는 수익금을 왕실 재정부에 기증하며 군자금으로 써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재정부상서 루이 콘체른 자작은 국정회의에서 이 일을 보고했고, 에릭 국왕은 공개적으로 왕립학교 학생회를 칭찬했다. 미첼 로도크와 존 스페이의 이름이 고위 관리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거론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미첼과 존을 위시한 학생회는 크게 고무되었는데, 그들을 더욱 환호하게 만드는 소식이 곧바로 전해졌다.
에릭 국왕이 치하하기 위하여 친히 왕립학교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에릭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교장 듀론 후작이 직접 전한 사항이니 틀림없는 사실일 터였다.
“성공이야!”
존이 환호했다.
“그냥 성공도 아니야. 이건 대성공이다.”
미첼도 희열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에릭 국왕에게 치하 받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리간드 후작부인 줄리아가 지지해준다면 그 정도 결과쯤은 나오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왕궁에 불려가서 치하 받는 것과 에릭 국왕이 직접 왕립학교에 왕림하여서 치하해주는 것은 전혀 달랐다. 단연 후자 쪽이 훨씬 파급효과가 컸다.
‘이 정도일 줄이야!’
이로서 장래를 위한 완벽한 첫발을 내딛었다.
미첼은 존의 어깨를 툭 쳤다.
“네 덕이다.”
“응? 내가 뭘?”
“네 고집이 아니었으면 그날 리간드 후작가 앞에서 후작부인 줄리아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잉? 그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존.
미첼은 황당해졌다. 천재 소릴 듣는 녀석이 왜 이런 면에서는 이토록 둔하단 말인가.
“……넌 정말 군인이 되어야겠군.”
“응, 그럴 생각이야.”
눈치가 없으니 정치는 하지 말라는 뜻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존이었다.
며칠 후, 예고대로 에릭 국왕은 왕립학교를 방문했다.
“저, 정말로 폐하다!”
“폐하께서 오셨어.”
“학생회 녀석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했나봐.”
왕을 수호하는 로열나이츠들과 함께 나타난 위풍당당한 에릭 국왕의 모습에 학생들을 넋을 잃었다.
전교생이 집결된 강당.
단상에는 교장 듀론 후작 및 교사진들이 기립해 있었다.
로열나이츠들이 강당 외곽에 포진한 가운데, 에릭 국왕은 한 명의 로열나이츠만 데리고 당당히 단상에 올랐다. 그 한 명은 바로 로열나이츠의 부단장인 랜달 스페이 백작.
상을 받는 아들 존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라고 배려해준 셈이었다.
“위대한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듀론 후작이 교사진을 대표해서 인사했다. 교사진과 학생들도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에릭 국왕은 미소를 지으며 듀론 후작을 일으켜주었다.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힘써주어서 고맙소.”
“정정하진 않습니다, 폐하.”
“말이 많소. 짐이 정정하다면 정정한 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국왕과 국왕의 멘토 역할을 하는 왕립학교 교장. 그들의 신뢰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에릭 국왕은 짧은 연설로 학생들의 열정과 충심을 치하했다.
그리고…….
“학생회장 미첼 로도크와 부회장 존 스페이 앞으로.”
에릭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첼과 존이 단상에 올랐다. 두 소년의 얼굴에 긴장과 흥분의 기색이 가득했다.
“먼저 스페이 백작의 아들 존 스페이, 가까이 오라.”
“예, 폐하!”
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보여준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상을 하사하노라.”
그러면서 스페이 백작에게 손짓하는 에릭 국왕.
랜달 스페이 백작이 가지고 있던 보검을 건넸다. 그의 얼굴에 아들 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어렸다.
에릭 국왕은 존에게 보검을 건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뽑아보아라.”
에릭 국왕 또한 오러 엑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실력자. 보검을 얻은 무인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존은 국왕 앞에서 비례(非禮)가 되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서서 조심스럽게 검을 뽑았다.
광채가 번쩍이는 검신이 뽑혀 나오자 학생들 사이에서도 ‘우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천연미스릴과 은을 마법으로 정제한 인공 미스릴, 그리고 강철이 절묘한 배율로 합금되어 제작된 롱 소드. 바로 카록 병기점의 최고장인인 구스 영감의 역작이었다. 어찌나 품질이 훌륭하던지 에릭 국왕이 이를 보고 한 자루 더 주문했을 정도였다.
“와아아!”
“부럽다!”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존은 쑥스러워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미첼의 차례가 되었다.
“로도크 백작의 아들 미첼 로도크 앞으로.”
“옛, 폐하.”
존이 물러나고, 미첼이 걸어 나와 부복했다.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보여준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상을 하사하노라.”
미첼에게는 회중시계가 하사되었다.
그냥 회중시계가 아니었다. 겉은 미스릴로 제작되어 고급스러운 빛깔이 흘렀고, 마법이 새겨져 내구도가 강화된 최고급품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물속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으니 앞으로 지각할 일이 없을 거라더군.”
그 말에 미첼은 멍하니 빛나는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제 회중시계가 망가지기도 하고…….”
“아주 좋은 걸로 하나 사줄게.”
미첼의 입가에 유쾌한 웃음이 어렸다.
‘정말인지, 대단한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