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 회: 15권 - 5장. 후작부인 줄리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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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학교에 대한 소식은 금방 줄리아의 귀에 들어왔다. 왕립학교의 학생회가 상권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장 미첼은 아예 일을 크게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매춘, 도박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법률로 정해달라고 왕실에 상소문까지 올렸다.
레던 왕실은 개혁 이후로 일처리가 매우 빨랐다.
상소문을 받은 에릭 국왕은 즉시 법으로 규정해 왕립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춘과 도박을 금지시켰다. 이를 어길 시 처벌과 함께 모든 재산을 몰수하기로 했다.
덕분에 미첼은 학생회가 왕립학교 인근의 상권 통제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까지 얻었으며, 에릭 국왕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할 수도 있었다.
줄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제법인데.”
많이 고민해보고 스스로 알아내라고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건만, 이렇게 빨리 답을 찾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즉시 움직이는 추진력이 놀라웠다. 유능함과 신속함을 중시하는 최근 레던 왕실의 풍조에 어울리는 인재였다.
밀어줄 가치가 있었다.
‘마음을 먹었으면 나도 슬슬 움직여볼까?’
줄리아는 니벨 영감을 불렀다.
“리간드 후작가에 상주하는 경비 병력의 규모를 2백 명까지 증원하겠어.”
“지나치게 많지 않습니까?”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 믿을 만한 사람으로 뽑아. 아, 마법사도 두 명 정도 있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니벨 영감에게 지시를 내린 후, 줄리아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옷을 입은 줄리아는 지스와 놀아주고 있는 시스에게 말했다.
“시스, 너도 왕궁에 가지 않을래?”
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스였다.
“왕비 저하가 너 보고 싶어 하던데.”
시스는 3초쯤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스도 많이 보고 싶어 하던데. 볼 기회가 없었잖아.”
“…….”
“지스가 지렌 왕자 저하랑 친해지면 좋을 텐데.”
“…….”
“지렌 왕자랑 형제 같은 사이가 되면 우리 지스 장래에도 좋을 텐데.”
“…….”
안절부절 못하던 시스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준비를 하려는지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아는 지스를 품에 안아 들고는 배시시 웃었다.
잠시 후,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호화로운 마차가 리간드 후작가 저택을 나섰다.
마차는 레던 왕성에 입성하여서 대로를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마차 전용 도로로 나아갔지만, 워낙 통행하는 마차들이 많아서 속도가 시원찮았다. 간신히 걷는 속도보다 빠를 정도였다.
줄리아는 옛날의 레던 왕성을 회상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어린 시절에는 레던 왕성 거리가 이 정도로 북적대지는 않았다.
레던 왕성의 거리가 그때보다 훨씬 활발해진 셈이었다.
‘레던 왕성의 상권이 그만큼 커진 셈이야.’
대흉년, 흑혈병, 전쟁 위기 고조…….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발달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남자가 바로 자신의 남편이었다.
게으름부리고 뺀질거리는데다가 애들처럼 유치할 때도 있었지만, 줄리아는 때때로 남편 카록에게서 이상할 정도로 깊은 연륜을 느끼곤 했다.
마치 세상사의 이치를 통달한 것 같은 현자처럼 말이다.
줄리아는 남편의 그런 모습에 반한 것이었다. 대단해보이기는커녕 대단찮고 허술해 보이는데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동요 없이 노련하게 난관을 넘길 수 있을 듯한 믿음직한 모습 말이다.
시스 또한 그런 카록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감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탕탕탕!
줄리아와 시스는 깜짝 놀랐다. 밖에서 누군가가 마차 문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탕탕! 탕!
“리간드 후작부인! 문 좀 열어주십쇼!”
익숙한 목소리.
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들어본 목소리였던 탓이었다.
탕탕!
“같이 좀 타고 가죠?!”
“어휴, 시끄러! 누구 마찬 줄 알고 탕탕 쳐대는 거야?!”
줄리아는 마차 문을 덜컥 열었다.
“휴우!”
한 젊은 남자가 훌쩍 마차로 뛰어 들어와 뻔뻔스럽게 줄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줄리아는 눈살을 찌푸리곤 시스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휴우, 지각 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왕궁 근처까지만 부탁하겠습니다.”
빨래를 안 해 후줄근한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이 남자.
바로 군사부상서인 제론 데커드 자작이었다. 일 하길 싫어하기로 따지면 카록보다 더 한 인간이었다.
제론은 시스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시스 후작부인께서도 계셨군요. 실례합니다.”
시스도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 시간에 거리에서 뭐 하는 거예요? 아직도 출근 안 했어요?”
줄리아가 핀잔하듯이 물었다.
“간밤에 너무 과음을 해서 말이죠. 깨어나 보니 아직도 그 술집이더군요.”
“기가 막혀. 왕실의 높은 관리인데 품행이 그래도 되는 거예요?”
“뭐, 해고밖에 더 당하겠습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곤 히죽 썩은 미소를 짓는 제론. 줄리아는 부르르 떨었다. 남편과 달리 잔소리도 안 먹히는 얄미운 작자였다.
제론은 문득 지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스는 방긋 웃었다. 엄마와 달리 낯을 별로 안 가리는 지스였다.
“여어, 지스 도련님.”
제론은 지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꺄하하!”
지스도 제론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였다. 시스가 제론을 제지하며 나직이 말했다.
“안 돼, 지지야.”
“지지?”
“응. 지지.”
지스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론을 가리켰다.
“지지! 지지!”
제론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고, 줄리아는 깔깔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면전에 대고 지지라니…….”
“그러게 좀 씻고 옷차림도 깔끔하게 하고 다니지 그래요?”
“귀찮은 걸 어떡합니까?”
“…….”
당당한 제론의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줄리아였다.
제론 데커드.
어찌 보면 줄리아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줄리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왕궁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왔네요. 왕궁 근처예요.”
“그렇군요. 이야, 덕분에 편하게 출근하는군요. 다음에도 또 부탁하지요.”
넉살 좋게 말하며 제론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두 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줄리아는 히죽 미소 지었다.
“왕궁이요.”
“……네?”
“왕궁 근처에서 내려달라면서요?”
탕!
줄리아는 냉큼 마차 문을 닫고, 마부에게 속력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마차는 빠르게 왕궁으로 달렸다. 줄리아는 깔깔거리며 유쾌해했다.
***
“어머, 어서 와요!”
시에나 왕비는 줄리아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에릭 국왕의 반려인 그녀는 지렌 왕자를 낳은 뒤에도 여전히 왕국 제일의 미녀로 불리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스 후작부인도 오셨네요, 아이 반가워라!”
시에나 왕비는 스스럼없이 시스를 끌어안았다. 시스 품에 안겨 있던 지스가 둘 사이에 껴서 꺄하하 웃었다.
“어머, 지스도 안녕!”
“꺄하!”
시에나 왕비는 시스로부터 지스를 받아 안고 좋아했다. 낯 안 가리는 지스도 해맑게 웃었다.
시에나 왕비는 상당히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줄리아는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친구사이였다. 때문에 줄리아가 시스, 지스를 데리고 놀러오자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에나는 종을 울려서 시녀를 불렀다.
“다과를 내오도록 해.”
“네, 저하.”
“지렌 왕자는 뭐 하고 있어?”
“놀다가 지치셨는지 낮잠을 주무십니다.”
“지스와 놀게 하려고 했는데……. 알았어.”
시녀가 다과를 내오는 동안, 시에나 왕비는 품에 안은 지스를 쓰다듬기도 하고 뺨에 입맞춤도 하며 귀여워했다.
“호호, 우리 지스가 마음에 드시나요, 저하?”
“그럼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우리 지렌 왕자 아기 때를 보는 것 같아요.”
일국의 왕비인 그녀가 지스를 귀여워하는 걸 보며, 시스의 표정도 밝아졌다.
세 사람은 지스를 사이에 놓고 육아문제 등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지렌 왕자 아기 때와 지스 중 누가 더 귀여운지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지스가 애교를 부려서 세 여자를 더욱 즐겁게 했다.
그러다가 화제가 자연스럽게 교육문제로 넘어가자, 줄리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에나 왕비를 찾아온 목적을 슬슬 꺼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