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회: 15권 - 4장. 후작부인 줄리아 -->
“혼트 제국군이 이곳에 당도해서 가장 먼저 하는 건 레던 왕성 봉쇄야. 국왕 폐하 및 왕실의 요인들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도 이곳에 묶어두는 거지. 왕실과 다른 영주들의 연계가 끊어지면 레던 왕국이 혼트 제국군에 대항하기 어려워지니까.”
“그건 이해했어.”
“혼트 제국군은 즉각 레던 왕성의 모든 성문을 차단할 거야.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하나 생겨. 리간드 후작가 저택의 위치를 봐봐.”
그 말에 미첼은 리간드 후작가 저택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레던 왕성을 슥 본 미첼은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챘다.
“레던 왕성의 남쪽 정문에 가깝군.”
“그래. 만약 리간드 후작가 저택에 병사들을 배치해서 활과 마법을 쏘게 하면 어떨 것 같아? 레던 왕성 남문을 차단하려고 다가온 혼트 제국군이 큰 피해를 입을 거야.”
즉, 리간드 후작가 저택을 사수하면 레던 왕성은 봉쇄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우연히 레던 왕성 싸움의 핵심 포인트가 될 위치에 세워진 리간드 후작가.
더욱 공교롭게도 이 저택은 리간드 후작이 철옹성 같은 요새로 만들어버렸다. 단순히 가족의 안위를 염려한 과보호였는지, 아니면 이 점을 염두에 둔 선견지명인지는 본인만 알 터였다.
“만약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곳에 저택을 세운 것이라면, 재상 각하께서는 실로 위대한 분인 거야.”
존의 얼굴에 무한한 존경이 어렸다.
미첼은 ‘그냥 우연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리간드 후작이 존경할 만한 사람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리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 여섯 마리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를 보니 필시 높은 인물이 타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누구지?”
“리간드 후작가로 향하는 저 화려한 마차를 탄 사람이라면 한 명뿐이지.”
리간드 후작은 날아다니기로 유명하다.
시스 리간드 후작부인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 소문에 따르면 인형처럼 아름답다고 하던데, 본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그 미모가 더욱 신비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러니 저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줄리아 리간드 백작부인.
온갖 파티를 쏘다니는 레던 왕성의 소문난 마당발!
이곳 레던 왕성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그녀가 모르는 사람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사업수완과 안목도 뛰어나서 그녀와 친해져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 사교계의 평가였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 실세의 부인 아닌가.
존도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구나. 하긴, 2년 전이었나? 그때 파티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말도 굉장히 잘하고.”
그때, 저택으로 향하던 마차가 점점 속력을 줄이더니, 존과 미첼 앞에서 정지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예상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입김이 강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간드 후작부인 줄리아였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미모의 여인이 내리자 두 소년은 흠칫 놀랐다.
줄리아는 몹시 반가운 듯이 말했다.
“너희 혹시 존 스페이하고 미첼 로도크 아니니?”
“……?!”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한 눈에 자신들을 알아본 것이다. 아직 미성년자이고 면식도 그다지 없는 두 사람을 알아본 건 이상한 일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니?”
“아, 저, 저희를 알아보시기에 놀랐습니다.”
존이 더듬더듬 말했다.
줄리아가 활기찬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존, 너는 2년 전에 파티에서 한 번 만났었잖니. 난 한 번 만난 사람은 절대 안 잊어버려.”
존은 황당했다.
2년 전,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만났을 뿐이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와 그냥 인사와 소개만 한 게 끝이다.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하다니 경이로운 기억력이었다.
미첼이 나서서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줄리아 리간드 후작부인. 이번이 초면인 저를 알아보셔서 놀랐습니다.”
“둘이 되게 친하다며. 존이랑 같이 붙어 있기에 혹시 학생회장인 미첼 로도크인가 싶었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과연 현명하십니다.”
줄리아는 깔깔 웃었다.
“에이, 현명은 무슨. 잘 모르나본데 너희 두 사람 되게 유명하다? 왕립학교 최고의 수재들이잖니. 우리 여자들이 얼마나 자식교육에 관심이 많은 줄 아니? 우리 지스도 커서 딱 너희들만큼 됐으면 좋겠네.”
그 뒤로 존과 미첼은 20분이나 그 자리에 서서 줄리아의 잡담공세에 시달렸다. 신이 난 줄리아는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신없이 줄리아에게 휘둘렸던 두 사람은 뒤늦게야 해가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 빠른 줄리아가 잡담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들 몇 시까지 학교에 돌아가야 하니?”
미첼이 답했다.
“기숙사는 저녁 8시까지 돌아가면 되지만, 교문이 저녁 6시에 닫힙니다. 지각하거나 허가 없이 외박하면 크게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 되게 엄격하네.”
“학교 앞에 학생들을 유혹하는 질 나쁜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밤이 되기 전에 학교에 돌아오게 조치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줄리아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먹고 가지 않을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저녁 6시까지 학교로 돌아가야…….”
줄리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8시까지 기숙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니. 내가 데려다줄 테니 다 나한테 맡기렴.”
그 제안에 존과 미첼은 서로를 보며 나지막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쩌지?”
“받아들이자. 저 분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사실상 혈혈단신으로 자립해야 하는 미첼로서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교칙이…….”
“후작부인께서 괜찮다고 하시잖아. 그리고 잘못돼도 까짓 거 처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다 너 학생회장직을 재명 당한다?”
“안 당해.”
미첼은 단언했다.
“줄리아 리간드 후작부인과 교장님은 친한 사이다. 후작부인의 초대로 저녁식사를 하다가 지각했다는 이유로 교장님이 날 제명시킬 리가 없지.”
“아, 그런가.”
“나만 믿어라.”
존은 미첼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런 쪽은 미첼이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리간드 후작가에 초대되었다.
***
저택에 들어서자 마차에서 내려서 야트막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저택 본관 앞의 정원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자그마한 아이였다.
이제 겨우 한 살 정도 되었을까. 아이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아장아장 걸어왔다. 해맑게 웃으며 줄리아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크어마! 크어마!”
아마도 큰엄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머머, 우리 지스 왕자님 잘 있었어?”
줄리아는 냉큼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고 번쩍 들었다. 아이는 기쁜 모양인지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꺄하하 웃었다. 바로 리간드 후작의 하나뿐인 아들 지스였다.
“지스야,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어마? 어마!”
지스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도무지 나이를 측정할 수 없는 푸른 머리칼의 인형 같은 여인이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를 본 두 소년은 또다시 놀랐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재상의 또 다른 부인, 시스 리간드 후작부인을 보게 된 것이었다.
지스를 안고 있는 줄리아가 시스에게 말했다.
“시스, 밥 먹었어?”
시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먹을래?”
그녀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미첼과 존은 보기보다 먹성이 좋은 여자구나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