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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354화 (354/529)

<-- 354 회: 14권 - 10장. 요구 -->

“게다가 다시 육제후와 관계가 틀어지게 되어버리면, 전쟁이 발생했을 때 남은 네 가문마저도 혼트 제국 진영으로 넘어가버릴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 재상은 어찌 해야 한다고 보느냐?”

“듀론 자작의 의견대로 일단은 사신의 알현을 최대한 피해보지요. 딴 짓을 할 수 없게 맥델 백작을 붙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번 사이에 육제후와 연락을 취해서 관계를 다져야합니다. 혼트 제국군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받아두는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에릭 국왕은 조용히 숙고에 들어갔다.

카르스 황제.

수십만의 대군.

육제후.

세상사라는 것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인연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에릭 국왕이 말했다.

“외교부상서.”

“예, 폐하.”

헤이젤 듀론 자작이 부복했다.

“그대는 육제후를 찾아가 왕실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라. 혼트 황실의 책략에 놀아나지 않도록 당부하여라.”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재상.”

“예, 폐하.”

“짐은 이제부터 병환을 핑계로 침거하겠다. 짐이 없는 동안 국정을 부탁하고, 특히 찰스 맥델 백작을 붙잡아두며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하라.”

“맡겨주십시오.”

***

혼트 황실의 사신, 찰스 맥델 백작은 그로부터 이틀 후 오후 경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맥델 백작은 75세의 고령이었다. 힘없이 마른 체격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노인인 터라 천천히 이동한 모양이었다.

“위대한 혼트 황실을 섬기는 맥델 백작입니다. 명성 높으신 레던 왕국의 현자 리간드 후작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노인은 매우 온화하고 정중한 태도로 내게 인사를 했다.

전쟁 발발 직전에 술책을 꾸미러 온 사람치고는 굉장히 신사적인 귀족이었다.

“반갑소, 맥델 백작.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몸이 늙었으나 아직은 다닐 만합니다.”

“식사는 하셨소? 이제 점심식사 때인데 함께 하시지 않겠소.”

“식사는 아직 안 했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뜻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일단은 레던 국왕 폐하부터 알현하여야겠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예의이고 순리 아니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이긴 한데, 공교롭게도 폐하께서는 병환으로 몸져누우신 터라 알현을 허락할 수가 없소.”

내 말에 늙은 맥델 백작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입니까?”

“그런 거요.”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상황을 짐작한 맥델 백작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럼 하는 수 없지요. 식사나 해야겠습니다.”

“좋소. 따라오시오. 왕실의 주방장 실력이 아주 뛰어나니 실망하지 않을 거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기대하시오. 내가 아직도 은퇴를 못하고 재상노릇 하고 있는 게 왕실 주방장 때문이오.”

내 농담에 맥델 백작은 가볍게 웃었다.

최고위 관리 전용 식당에서 우리는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보드라운 빵과 따스한 소고기 수프부터 시작해서 코스대로 정찬이 나왔다.

맛있게 먹던 중 맥델 백작이 문득 말했다.

“힐링포션으로도 낫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병환이라니 걱정이 되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힐링포션으로도 차도가 없는 심인성(心因性) 질환이라 다들 우려하고 있소.”

“그래서, 그 심인성 질환을 언제까지 앓으실 계획이라 하십니까?”

맥델 백작은 언제까지 꾀병을 부릴 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말이오. 한 1개월 정도 몸져누워계시지 않을까 싶소.”

능청맞은 내 대답에 맥델 백작이 날 노려보았다.

“그 참 걱정이군요. 일주일 안에 완쾌되길 기원하겠습니다.”

일주일?

그거 갖곤 안 되지.

헤이젤 듀론 자작이 육제후를 만나 관계를 다지려면 그거 갖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걱정해주는 그 마음에 감사하오. 폐하께서도 힘을 얻으셔서 보름 안에 쾌차하실 수 있을 거요.”

“아무리 무거운 병환이라도 젊고 건강하신 분이니 열흘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이렇게 걱정만 한다고 병환에 차도가 있겠소? 지켜봐야겠소.”

그러자 맥델 백작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렇군요. 저도 제 나름대로 귀국 국왕 폐하의 쾌유를 위하여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하오.”

그렇게 식사는 끝났다.

***

식사가 있고 나서 나는 정령들과 공유된 감각으로 맥델 백작 일행을 살폈다.

상급 정령의 감각은 레던 왕성 전역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에 왕성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집에서 놀고 있을 때도 감시가 가능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노움에게 맥델 백작이나 그가 데려온 일행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즉각 깨워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맥델 백작은 궁내에 정해진 귀빈관에서 머물며 딱히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정령술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맥델 백작은 레던 왕성을 방문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수행원 한 명을 혼트 제국으로 돌려보냈다. 웬 서신을 혼트 황실에 전하는 것 같았다.

“저도 제 나름대로 귀국 국왕 폐하의 쾌유를 위하여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맥델 백작이 한 말이 떠올라서 가슴이 섬뜩해졌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에반이 돌아왔다.

“주군. 명하신대로 찰스 맥델 백작에 대하여 조사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거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인데?”

“그는 카르스 황제의 외조부였습니다.”

“뭐, 뭣?!”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의외였다.

카르스 황제의 혈족이 아직 있었다니.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어머니가 있으니 외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카르스 황제는 굉장히 고독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외가의 존재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전대 황제의 제 2 황비가 바로 찰스 맥델 백작의 여식인데, 제 2 황비와 카르스 황제의 동생이 암살로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황실에 출입한 적이 없었고, 카르스 황제와 만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황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한 사람이 갑자기 황실의 사자가 되어서 온 거라고?”

“예. 시일이 촉박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만 추려온 것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조사해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딱히 어떤 내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맥델 백작이 그동안 황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한 것은 정황상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황비가 된 딸은 암살당하고, 그 슬하의 외손자 둘 중 한 명 역시 죽었다. 다른 한 명은 미쳤다. 황실에서 멀어지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제 와서 카르스 황제는 그날의 악몽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외조부를 불러다가 사자로 보냈다.

그냥 직감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카르스 황제의 변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변덕은 무엇일까.

무서운 지혜를 가진 카르스 황제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에릭 국왕은 꾀병으로 알현을 거부하고, 내가 대신 국정을 돌보면서 맥델 백작을 만나 상대할 것이라고.

그럼 혹시 카르스 황제는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닐까?

카르스 혼트.

무감정한 가면 뒤에 숨겨진 무의식이 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카르스 황제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진다.

***

맥델 백작이 방문한 지 딱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혼트 제국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레던 왕실 군사부의 첩자들이 일제히 급보를 보내왔다.

「혼트 제국군 일제히 진군 개시. 롬펠 대공, 륭겐 후작, 카이슨 후작, 쥬르덴 후작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 병력은 물경 50만여 명으로 추산됨.」

「혼트 제국군, 두 무리로 나뉘어 진격.」

당연히 왕실은 난리가 났다. 드디어 전쟁이 터졌다고 관리들이 잔뜩 긴장했다.

동요하는 왕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나는 3급 이상의 고위 관리들을 전부 모아놓고 주의시켰다.

“전쟁은 아직이다. 동요하지 말고 각자 해야 할 업무에 집중하도록 해라!”

그제야 동요가 진정되었다.

레던의 현자인 내가 한 말이니 다들 믿고 안심한다는 눈치였다. 하여간 쓸데없어 보였던 내 명성도 의외로 쓸모가 많았다.

당연히 전쟁은 아직이었다.

카르스 황제와 할슈타인 후작이 아직 이사벨라 궁전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혼트 제국군의 이번 대규모 군사행동은 침략을 대비한 병력배치였다.

더불어 꾀병 부리고 있는 에릭 국왕에게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협박의 메시지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일단 에릭 국왕을 찾아갔다.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에릭 국왕은 그다지 동요하고 있지는 않았다.

“폐하, 병환은 많이 차도가 있는지요?”

내 물음에 침상에 누워 있던 에릭 국왕은 하하 웃었다.

“50만 대군 소식을 들으니 너무 놀라 병이 달아나더군.”

“카르스 황제가 나서지 않는 이상 전쟁은 아직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안다. 하지만 정말로 무섭군. 50만 대군이라니.”

“예. 무섭지요. 그래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그것 역시 안다.”

그리 말하며 에릭 국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밝은 미소였다.

“그런데 저쪽에서 이리도 강하게 나오는데 아직도 짐이 꾀병을 부려야 하느냐?”

“헤이젤 듀론 자작이 돌아올 때까지는 맥델 백작을 상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알겠다. 일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예, 폐하.”

에릭 국왕은 문제없군.

그렇다면 이제 맥델 백작을 다시 한 번 만나야겠군.

맥델 백작은 객실에서 느긋한 티타임과 함께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찾아오자 그는 책장을 덮고,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리간드 후작님. 국왕 폐하의 용태는 어떠신지요?”

“많이 좋아졌소. 며칠 지나면 완쾌되실 것 같더군.”

“그것 참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개인적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소?”

“말씀해보십시오.”

“외손자를 오랜만에 본 소감은 어땠소?”

나는 대놓고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만약에 카르스 황제가 맥델 백작을 통해 내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픈 부분을 건드린 질문.

맥델 백작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가 노려보았고, 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맥델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땠냐고 물었습니까? 어땠을 것 같습니까?”

“…….”

맥델 백작은 지팡이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무섭더이다. 변한 그 모습이. 그렇게 변하게 만든 세월이.”

***

뿌연 수증기가 커다란 욕실을 가득 매웠다.

정성껏 목욕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 손길이 카르스 황제의 왜소한 몸을 매만졌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르스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 욕실에서 나오니, 시녀들이 서둘러 천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가운을 걸쳐주었다.

그러는 동안 카르스 황제는 눈앞의 전신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 속의 그도 마주본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도 허무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가 종종 달콤한 사탕을 주곤 했다. 그걸 먹으면 어머니는 날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나도 웃었다.

그렇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웠다.

분명 배웠었는데…….

“폐하, 침소에 드시옵소서.”

시녀장이 거울을 앞두고 상념에 잠긴 카르스 황제에게 말해왔다.

생각을 방해받았으나 카르스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물러가.”

“예, 폐하.”

시녀들이 썰물처럼 사라지고서, 카르스 황제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돌아섰다.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웃는 건지 모르겠다.

그땐 분명히 웃었었는데.

문득, 수년 전에 카록 리간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절망도 모두 필요 없다.”

카르스 황제는 거울에게서 돌아섰다.

“나는 오직 못 다한 위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나는 크로센트 베잘리우스다.

-15권(완결)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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