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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요구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혼트 제국이 움직인 것은 4월에 이르러서였다.
혼트 제국과의 접경지대를 관장하는 국경검문소로부터 보고가 전해졌다. 혼트 황실의 사자가 국경을 막 통과하여 입국, 레던 왕성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가 에릭 국왕에게 전달된 시각은 저녁 6시 경.
에릭 국왕의 비상소집에 나, 루이, 제론, 헤이젤 듀론 자작이 입궁했을 때는 저녁 7시였다.
“찰스 맥델 백작이 혼트 황실의 사자로서 이곳에 오고 있다고 한다. 이르면 내일 오후, 늦으면 이틀 후 아침에 당도할 것 같다더군.”
“폐하, 이미 혼트 제국은 대군을 소집하고 제국군의 재편을 완료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보낸 사자라면 용건은 전쟁의 명분을 만드는 것일 겁니다.”
제론의 말에 나와 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최후통첩. 국운이 걸린 전쟁이 시작되려는 전조였다.
루이가 말했다.
“필시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을 내걸 겁니다. 아마 바덴 강의 통행금지령이 빌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왕실을 배반하고 혼트 황실 편으로 돌아선 린델 백작가, 안타레스 백작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혼트 제국 방면으로의 바덴 강 통행을 금지시킨 바 있었다.
덕분에 혼트 제국은 바덴 강을 통해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혼트 제국과의 교역 자체를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북부대로를 정비했고, 북부대로와 바덴 강 유역을 잇는 남부확장도로를 설치해서 육로로는 교역이 활발하게 되었다.
물론 바덴 강을 이용할 때보다는 물류의 유통이 훨씬 부족할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육제후의 두 가문이 왕실에게 등 돌린 마당에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안건을 혼트 제국 측이 먼저 문제 삼으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지만, 어차피 원하는 것은 전쟁인 그들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서 거절하면 이를 트집 잡아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폐하께서 병을 핑계로 사신을 만나지 않는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외교부상서인 헤이젤 듀론 자작이 제안을 했다.
아, 그 수법.
나도 오리엔 왕국에서 당해봤지.
그런데 문득 의아한 점이 들었다. 의문이라기보다는 기분이 찜찜했다.
내가 말했다.
“카르스 황제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짓을 하며 시간 낭비 할 위인인가?”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무슨 뜻인지 말해보아라, 재상.”
에릭 국왕이 재촉했다.
내가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이미 전쟁 준비를 다 끝마쳤습니다. 대군의 재편을 완료하고, 린델 백작가와 안타레스 백작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쟁물자도 어느 정도 확보했지요. 게다가 혼트 제국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대륙 정복을 해야 한다고 고양되어 있습니다.”
내 말에 에릭 국왕은 혀를 차며 동의했다.
“혼트 제국이 가난한 것이 우리 때문이니 응징해야 한다, 정복해서 재산을 갈취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실컷 하고 있겠지. 도적들의 나라인 혼트 제국다운 민심이다.”
약탈의 대가들인 유목민족들은 물론이고, 혼트 제국은 일반 마을 주민들도 눈 깜짝 할 사이에 강도 집단으로 돌변하는 나라였다. 랜달 스페이 백작과 함께 혼트 제국에 처음 갔을 때 그런 습격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척박한 삶이 민심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굳이 사신까지 보내면서 명분 쌓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혼트 제국의 민심은 이미 내전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카르스 황제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해져 있으니까요.”
“음, 재상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다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릭 국왕의 물음에 루이가 즉각 대답했다.
“듣고 보니 재상 각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전쟁과 폭력에 익숙한 혼트 제국의 사정상 명분 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잠시 간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의도를 품고 사신을 보낸 것일 수 있다는 결론이로군. 그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재상?”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만 제기해놓고 답은 없으니 부끄럽군.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제론이 말했다.
“그렇다면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술책을 써오지는 않겠습니까?”
“국론 분열?”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자 제론이 계속 말했다.
“만약에 사신 자격으로 온 찰스 맥델 백작이 아슬아슬하게 아국(我國)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요구조건을 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전쟁을 무서워하는 귀족들이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겠군요.”
루이가 답했다.
“과연. 찬반론으로 국론이 갈리게 만들어서 혼란을 유도하는 술책을 부릴 수 있다는 뜻인가.”
에릭 국왕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카르스 황제의 또 다른 특기 중 하나가 분열책이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카르스 황제는 먼저 레던 왕국과 오리엔 왕국을 분열시켰다. 그 결과, 오리엔 왕국은 혼트 제국의 레던 왕국 침략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이어서 레던 왕실과 육제후를 분열시켰다.
카르스 황제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간 육제후는 레던 왕실이 멸망하도록 수수방관했다.
그렇게 고도의 술수로 적을 쪼개고 쪼갠 뒤에야 레던 왕실, 육제후, 오리엔 왕국을 차례로 공략한 것이다.
가만……?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폐하, 육제후입니다.”
“무엇이 말이냐?”
“만약 분열책을 써온다면 그 대상은 육제후입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바덴 강 봉쇄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고액의 배상금과 함께 바덴 강 봉쇄 해제를 요구하면 어떻겠습니까?”
배상금은 왕실은 물론 레던 왕국의 귀족가문이 분담해서 떠맡아야 한다.
하지만 돈이 많은 육제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깟 배상금쯤은 여유롭게 분담할 수 있다. 게다가 바덴 강 봉쇄가 해제되고 다시 교역이 시작된다면, 바덴 강의 통행세로 인한 수입이 올라가니 꼭 손해도 아니다.
육제후는 전쟁을 싫어한다.
돈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고, 거기다가 바덴 강을 통한 교역까지 활발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뻔한 일이었다.
“육제후의 네 가문은 찬성하겠군.”
“예. 이 나라는 다시 왕실파와 육제후파로 대립할 겁니다.”
린델 백작가와 안타레스 백작가의 배반 이후, 왕실파와 육제후파 양측은 대립을 중단하고 서로 협조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둘 중 누구도 제3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분열되면 관계 회복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아무튼 간에 요구를 받아들이면 전쟁을 할 명분은 사라집니다. 그리 되면 혼트 제국도 더는 침략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헤이젤 듀론 자작이 의견을 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구를 받아들이면 이듬해든 언제든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침공해옵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놀란 헤이젤 듀론 자작의 물음에 내가 설명했다.
“혼트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도 이미 우리는 한 차례 굴복한 것이 됩니다. 게다가 육제후파와 또다시 관계가 틀어졌고요. 전쟁을 대비해 맞서 싸울 태세를 충분히 갖춘 지금과는 군대의 사기가 전혀 딴 판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요구조건을 받아들였음에도 침략을 단행한다는 것은…….”
“잊으셨습니까? 카르스 황제에게 명분 따위는 처음부터 중요한 게 아닌 겁니다. 약해진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게 혼트 제국의 정서입니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백 번을 싸워도 필패지.”
이미 한 번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있는 에릭 국왕은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