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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봄
겨울과 봄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지만, 보통은 3월부터가 봄이라고들 말한다.
레던 왕성은 본래 3월 말은 되어야 비로소 땅에 새싹이 트는데, 올해는 약간 다르게 초순부터 새싹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매일 아침마다 눈을 치운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3월이 되자 레던 왕성도 슬슬 활기가 띠기 시작했다.
겨울이 지나 3월이 별달리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있다면 딱 하나.
3월 1일에 비로소 왕립학교가 정상운영 되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시험에서 합격한 학생들이 일제히 왕립학교에 모여들어 각자 배정 받은 기숙사에 들어갔다. 수업도 시작되었는데 첫날 수업의 결과, 학생들의 반응이 괜찮았다고 한다.
아무튼 역사적인 왕립학교의 첫 해이다 보니 교사진도 학생들도 고무된 모양이었다.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교장인 듀론 후작을 위시로 알아서 잘들 하겠구나 싶었다.
……라고 생각했더니, 개교한 지 2주 만에 나에게 연락이 왔다.
상의할 게 있으니 시간을 내서 학교에 들러달라는 듀론 후작의 메시지였다.
아직도 학교에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나 싶어서 의아스러웠지만, 부르니까 가야지 별 수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듀론 후작님이 부르는데 말이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업무를 후다닥 마치고는 두통이 난다는 핑계로 3시에 퇴근했다.
곧장 어스 핸드를 타고 학교로 날아갔다. 왕립학교의 멋진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웅장한 6층짜리 건물과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세 개의 석상.
오른쪽부터 나, 에릭 국왕, 듀론 후작의 모습을 새긴 석상을 훑어보다가 내 석상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날씬해지고 코는 높아지는 등 실물보다 잘생기게 보정한 석상. 후세 사람은 나를 미남자로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뿌듯해졌다. 물론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일기에 ‘실물은 그보다 더 못생겼다’라는 기록만 남기지 않는다면 말이지.
6층 꼭대기에 위치한 교장실까지 날아가 창문에 노크를 했다.
집무를 보던 듀론 후작은 창밖에 둥실 떠 있는 날 보고는 놀라 창문을 열어주었다.
“대체 언제 철 들 겐가?”
“이게 더 빠르잖습니까. 편하게 살자고요.”
“쯧쯧, 후작씩이나 된 사람이 행실 하고는.”
“이미 미치광이 정령사라고 소문이 날 대로 났는데 이제 와서 뭘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앉게.”
“넵!”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듀론 후작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만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게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이는데, 어느새 후작이 되었구먼. 명재상이 된 자네를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아들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네.”
“후작 각하, 아니 후작님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이제 동급의 작위였기 때문에 나는 각하라는 경칭을 생략했다.
“아무튼 축하하네. 그건 그렇고,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어서일세.”
“학교 운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문제는 문제라고 해야겠지. 이 문제로 교사진들의 의견도 분분하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학생회장 선출 문제일세.”
학생회장?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립학교는 학생들의 리더십과 능력을 함양시키기 위한 취지로, 학생회장 및 학생회의 멤버를 선출하여서 학교의 행정을 제한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기로 했다. 나라의 행정을 주관하는 왕실처럼 말이다.
“학생회장과 부회장은 입학시험에서 최고 성적을 낸 학생을 뽑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네.”
“그럼 1, 2등을 회장, 부회장으로 임명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죠?”
“문과(文科) 부문에서 1등을 학생과 무과(武科) 부문에서 1등을 한 학생 둘 중 누가 종합 1등인지 가려내기가 애매하네.”
왕립학교의 교육 커리큘럼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문과는 정치, 외교, 경제, 학문 등 주로 왕실 관리의 업무분야에 속하는 분야를 뜻했다.
그리고 무과는 전술, 용병, 기마, 검술, 오러 컨트롤 등 기사의 역할에 속하는 분야를 총칭했다.
“문과든 무과든 상관없이 총점으로 따지기로 했잖습니까.”
“총점으로 따질 경우 무과에 응시한 학생들이 불리하다는 교사진들 사이에서 결론이 내려졌네. 문과와 무과의 성적을 비교할 시 그 우열이 공통과목의 성적에서 차이가 나네. 그런데 공통과목은 기본적으로 무과 학생들보다는 공부를 더 잘 하는 문과 학생들이 유리하다는 걸세.”
공통과목이란 작문, 예법, 역사 등과 같이 문과 학생이든 무과 학생이든 공통적으로 반드시 배워야 할 과목을 뜻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공부 못하는 바보 무인들이야 저도 많이 봐서 알지요. 아버지나, 릭 형님, 랜달 스페이 백작 등등. 그래도 공통과목은 귀족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기본 소양입니다. 무인이라고 소홀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런 것들에 등한시하고 무예만 갈고 닦고 싶다면, 학교에 입학할 필요도 없이 혼자 정진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네 말이 옳네. 그런데 입학시험의 문무 종합 성적을 보면 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네. 종합 1, 2, 4, 5등은 문과 학생들이 휩쓸었고 무과 학생의 최고 등수는 3등일세. 그런데 무과 학생들 중 두 번째로 우수한 학생이 몇 등인 줄 아나?”
“몇 등인데요?”
“20등일세.”
“무과 1등이 종합 3등인데, 무과 2등은 종합 20등이라고요? 왜 그렇게 격차가 큽니까?”
“무과 부문에서 1등을 거둔 학생이 너무나 우수했던 탓일세.”
“얼마나 우수했습니까?”
“오러 엑스퍼트였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이는 15세로 입학생들 가운데에서는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오러 엑스퍼트 초급의 경지에 올라 있었네. 100점 만점으로도 부족해 특별 가산점 10점을 추가해주었네. 거기에 종합 성적도 3등일세.”
“뛰어난 것이 무예뿐만이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전략, 용병, 기마술 등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두루 뛰어나더군. 작문 점수가 좋지 못해서 종합 3등이 되긴 했지만 말일세.”
“대체 그 괴물이 뉘 집 자식입니까?”
내 물음에 듀론 후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조금 전에 언급하지 않았는가. 공부 못하는 바보 무인들 중 하나로 예를 들면서 말일세.”
분명 방금 전에 세 사람 정도 언급했었지.
아버지, 릭 형님, 랜달 스페이 백작…….
어라?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랜달 스페이 백작의 아들입니까?”
“존 스페이라고 하네. 스페이 백작이 아끼는 맏아들이지.”
“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감하네만, 스페이 백작 그 친구는 평소에도 늘 자기 자식 자랑을 하곤 했다네. 죄다 허풍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일세.”
믿을 수가 없었다.
랜달 스페이 백작.
로열나이츠의 부단장으로 오러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 와인을 무척 좋아한다. 예전에 카르스 황제를 보러 혼트 제국에 갔을 때 동행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소 무식하고 교양이 떨어지는 그 양반한테서 문무를 겸비한 괴물 아들이 태어나다니?
“혹시 양자를 입양한 게 아닙니까?”
“스페이 가문의 혈통이 맞네.”
존 스페이.
내가 모르는 천재가 있었다니 의외였다.
15세에 오러 엑스퍼트가 된 것도 모자라 다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내니, 그야말로 완벽남 브리튼 공작의 축소판 아닌가.
이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명성을 떨쳤을 테고, 내가 전생 때 90년간 살면서 한 번도 못 들어봤을 턱이 없다.
어릴 때 반짝 하고 끝난 재능이라 명성을 얻지 못한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로열나이츠 부단장인 랜달 스페이 백작의 맏아들인데, 그만한 거물의 아들이라면 어느 정도 싹수만 보여도 성인이 되어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 인지도를 얻는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전쟁!
전쟁에 참가했다가 어린 나이에 아깝게 목숨을 잃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
모든 천재들이 다 재능에 걸맞은 명성을 떨친 것은 아니리라.
자기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져간 천재들도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존 스페이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