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49화 (349/529)

<-- 349 회: 14권 - 8장. 겨울 -->

***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나는 재정부를 방문했다. 내 등장에 재정부의 관리들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휘휘 손을 저었다.

“됐어, 됐어. 상관 말고 일해.”

그제야 관리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하던 업무를 계속 보았다.

나는 재정부의 가장 안쪽에 있는 루이의 개인집무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섬뜩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헉!”

무시무시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했다.

온갖 종류의 서류들이 집무실의 모든 벽면에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온통 글과 숫자뿐이었다. 전에 읽어보았던 기동행정 계획서도 사방에 붙어 있었다.

“여, 여긴 지옥인가?”

영원히 근무해야 하는 지옥일 거야!

“제 집무실입니다.”

루이가 가볍게 대꾸했다.

서류가 산처럼 쌓인 책상에서 루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레던 왕성 시내의 눈을 전부 녹여버리신 위업은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만백성이 기뻐서 칭송했으니, 실로 존경스러운 활약이셨습니다.”

과연 루이. 또 이런 듣기 달콤한 칭찬을!

“에이, 별 것 아니었어. 그냥 제설작업 좀 한 것뿐인데 뭘.”

“확실히, 무한한 역량을 가지신 재상 각하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아하하, 그런가?”

아아. 계속 칭찬을 들으니 정말 내게 대단한 사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아참.”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빈민들 문제 때문에 찾아왔는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재상 각하의 어진 마음이 한파에 떨고 있는 빈민들의 참상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군요.”

“아, 아니, 그렇게 거창한 발상은 아니지만…….”

“겸양하실 것 없습니다. 측은지심을 느끼셔서 빈민을 구제하고자 나서신 게 아닙니까.”

“응, 그야 그렇지.”

“과연 쌓인 눈조차 녹여버리는 따스한 마음이십니다.”

“그, 그만해줘. 더 이상 칭찬을 들으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제야 아부를 중단한 루이는 내게 의자를 내밀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자리에 앉아 루이와 마주보았다.

“어제 눈 치우다가 빈민들의 실태를 보니까 내 어진 마음…… 쿨럭!”

말실수를 해버렸다. 이게 다 루이의 칭찬 공세 때문이잖아!

나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말했다.

“내 마음이 편치 않더란 말이지. 이대로라면 올 겨울 내에 적어도 수만 명이 죽어나갈 거야. 어떤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에 루이가 말했다.

“사실 빈민가는 세금을 거둘 수가 없어서 그쪽 인구는 왕실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야 그렇지.”

“게다가 현재의 빈민가는 수십여 개에 달하는 지하범죄조직의 근거지입니다. 빈민구제를 섣불리 행하면 선량한 빈민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범죄조직에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량한 빈민’ 자체가 그리 많지 않지요.”

“무슨 방법 없을까?”

내 물음에 루이가 대답했다.

“기동행정에 레던 왕성 백성들을 전략적 가치가 없는 6개 지역에 나눠서 피신시킨다는 계획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아직 전시는 되지 않았지만, 빈민들부터 미리 피신시켜놓으면 어떻습니까?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는 모조리 징집해 왕실군의 각 군단에 분산 배치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범죄조직도 해체되고 빈민들도 폭설로부터 피난시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로 보입니다만.”

“그렇게 많이 징집하면 왕실군에 드는 비용이 더 커질 텐데 괜찮겠어?”

“어림잡아도 5천 가량은 징집될 테니 재정 부담이 커질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병력 보강은 필요한 일이었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미리 징집해서 빨리 훈련시키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몇몇 대형 상단이나 귀족가문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빈민구휼에 돈을 쓸 생각이었으니, 내가 왕실에 자금을 융통해줄게.”

“얼마나 융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일단 3만 레디나. 더 필요하면 얘기해. 아, 그리고 피신시킨 빈민들의 주거지는 내가 만들어줄게. 정령술을 이용하면 단숨에 뚝딱이니까.”

오랜만에 흙집을 실컷 만들어야겠군.

“그렇게 해주신다면 왕실의 재정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역시 재상 각하께서는 만고의 충신이십니다.”

“하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레던 왕국이 혼트 제국의 침략을 이겨낸다면, 모두 재상 각하의 공로일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나타난 한 줄기의 희망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나, 나 그만 일어날게.”

더 이상 루이의 칭찬을 들었다가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서 나는 잽싸게 일어났다.

그날 오후에 2급 이상의 고위관리들이 소집되어서 긴급 궁정회의가 열렸다.

루이는 나와 상의한 안건을 공식적으로 에릭 국왕에게 진언했다.

내가 3만 레디나를 왕실에 융통해주고 피난처까지 만들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릭 국왕이 듣기에도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야기로군. 왕성의 치안을 저해하는 빈민가 인구를 미리 처리해버리면 전시가 닥쳐도 혼란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거기에 가장 처치 곤란한 문제였던 피난처의 설치를 재상이 해결해준다니 갸륵할 따름이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나는 가볍게 겸양을 떨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론이 손을 들어서 발언을 요청했다. 에릭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론이 말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재상 각하께서 계셔서 천만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재상 각하의 정령술은 북부대로나 왕립학교 건축 등에서 이미 많은 기적을 이루어냈으니, 그 능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뭐야.

제론이 날 칭찬해대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기동행정에 계획된 레던 왕성 주민 피난처 여섯 군데의 주거지를 전부 재상 각하께서 나서서 만들어주신다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커헉.

내가 피토하는 심정으로 노려보니, 제론은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저, 저 놈이!

“짐이 듣기에는 아주 좋은 생각 같은데, 재상은 어떻게 생각하나?”

에릭 국왕이 그렇게 물으니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론의 의견에 매우 동의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에이, 전 싫은데요?’ 라고 말하겠냐!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나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궁정회의가 끝나고 제론에게 뭐라고 하려던 찰나, 에릭 국왕이 따로 보자며 손짓했다.

결국 제론은 쏜살같이 군사부로 내빼버렸고, 나는 에릭 국왕을 따로 독대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렇다. 북부대로나 왕립학교나 심지어 어제는 눈까지 치우고, 여러 가지로 그대의 정령술에 많이 의존을 하였군.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여 세운 업적은 짐의 치적이 되지 못하는 법, 많이 반성하였다.”

“제가 행한 모든 일은 폐하의 어명으로 실행되는 것, 제 정령술은 그저 잘 드는 도구 정도로 여기시면 됩니다.”

내 말에 에릭 국왕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물론 짐도 염치는 있지. 그대의 능력을 공짜로 써먹을 생각은 없다. 여섯 군데의 피난처 설치를 끝마치는 대로 그대를 승작(陞爵)시켜주겠다.”

“예? 승작 말씀이십니까?”

내가 여기서 더 승작하면 후작!

왕실파의 가장 큰 어른인 듀론 후작과 동급의 작위가 된다.

왕족이거나 국가공신이 아닌 이상 사실상 받기가 불가능한 공작을 제외하고 귀족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것이다.

“신은 그다지 작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지금으로 충분히, 아니 과분합니다, 폐하.”

“북부대로 보수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왕립학교도 그대가 설립했다. 그 공적에 이번 일까지 더하면 승작시켜주고도 남지. 거기에 후작이 되면 육제후보다도 작위가 높아지니 활동하기도 편해질 터.”

“하지만…….”

“그리고 혼트 제국의 침략만 막아낸다면 공작이다, 재상.”

공작이란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만큼 짐은 그대에게 감사하고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서서 앞으로도 쭈욱 짐을 보필해주기를 바란다.”

“…….”

에릭 국왕은 지금 나에게 앞으로도 쭈욱 재상으로서 왕실에 남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그만두고 물러나고 싶어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날 붙잡고 싶어 하는 에릭 국왕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이 정리되자 나는 입을 열었다.

“폐하. 저는 폐하의 눈에 들어 등용되었을 때부터 일찍이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혼트 제국의 군사적 위협이 끝날 때까지만 이 과분한 성은(聖恩)을 누리자고 말입니다. 이는 제 역량의 한계를 제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으며, 루이 콘체른과 같이 이 자리에 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음을 역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 같은 뛰어난 인물을 알아내고 데려온 것 또한 그대가 아니냐.”

“예. 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제 자리를 맡기고 물러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이루었고, 그래서 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에 물러날 수 있는 은총이 제게 주어진다면, 왕실에 있으면서 늘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마땅히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탐나나 이미 모두 충분히 누렸고, 또한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감으면 어느새 끝나고 마는 이 짧은 인생에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저는 압니다. 태어나서 받은 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이제는 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의 두 번째 인생.

고맙다.

나의 정령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신에게도 감사한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재상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물론 물러난 후에도 저는 변함없이 레던 왕실을 섬기는 귀족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실 때면 언제든 날아와 폐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에릭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그대를 붙잡을 방법은 없나보군. 아무튼 지금 당장 그만두는 것도 아니니 이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예, 폐하.”

***

그렇게 해서 레던 왕성의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대대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루이는 빈민들의 이주를 총지휘했는데, 빈민들은 대체로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이대로는 겨울을 나지 못할 게 뻔했던 차였다. 왕실에서 의식주를 제공해준다고 하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는 왕실군으로 징집했다. 강제사항으로 신체적인 결함이 없는 한 예외는 없었다.

그들 중 범죄조직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 반항 및 도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의 엄명에 의하여 그런 자들은 남김없이 치안대에게 체포되어서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레던 왕성의 범죄조직을 소탕할 이 기회를 놓칠 루이가 아니었다.

결국 빈민가의 사내들이 징집되어 왕실군의 각 군단에 신병으로 배치되니, 그 숫자가 4천여 명에 달했다.

루이가 애쓰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기동행정에 예정된 여섯 군데의 피난처에 피난민들이 거주할 흙집을 지었다. 한 지역마다 수천 개씩 넉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와 루이를 도와 빈민들의 이주 문제를 처리했다.

빈민들의 이주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후작으로 승작했다.

때는 아직 겨울.

그러나 계속되었던 폭설이 멎고 가혹한 추위도 조금씩 주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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