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 회: 14권 - 8장. 겨울 -->
8장. 겨울
나는 아버지, 릭 형님, 그리고 아서 형님과 레이라 형수 내외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을 임신한 레이라 형수는 9개월째라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기다렸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기대가 매우 컸다.
조카딸 엘레네는 오랜만에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와 놀게 해주자 무척 좋아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애교를 떨며 ‘삼촌 집에 가면 안 돼, 알았지?’하며 말하는 게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서 무럭무럭 자라렴. 적당한 나이가 되면 삼촌이 정령술 가르쳐줄게.
가족들과 만나고 나니 가슴이 따듯해졌다.
다들 앞날을 대비해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내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기로 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롬펠 대공이라도 아버지와 릭 형님이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나는 다소 안심하고 레던 왕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니 어느 새 날씨는 겨울에 진입하고 있었다.
***
올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북부지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레던 왕성을 얼려버릴 듯했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쌓이니 거리를 다니는 인구도 대폭 줄어들고, 생활수준이 형편없는 빈민들은 동상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어디 그뿐인가.
눈이 쌓이고 빙판이 만들어진 북부대로를 지나지 못해 상인들의 유동도 줄면서 왕실의 세입도 덩달아 줄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 한 점은 혼트 제국 쪽도 혹한에 의한 피해가 크다는 점이었다. 피해가 수습될 때까지 전쟁이 좀 더 미뤄질 수도 있다는 예상이었다.
“원래 예상대로라면 봄이 되자마자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만, 여름 정도로 늦춰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혼트 제국 방면의 첩보를 담당한 에반이 보고했다.
“여름이라. 누가 겨울에 입을 피해를 빨리 회복하느냐가 중요하겠네.”
“그렇겠지요. 레던 왕성도 올 겨울에 피해가 심각할 것입니다. 북부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폭설 피해를 연례행사처럼 당해왔으니 올해도 그러할 겁니다.”
“하여간 왜 이런 데다 수도를 세워갖고는.”
나는 혀를 차며 불평했다.
나 같으면 바덴 강 유역을 수도로 삼았겠다.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에반이 말했다.
“세간에서는 주군께서 겨울을 물리쳐주실 거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엥? 내가 겨울을? 무슨 제주로?”
“옛날 전설의 대정령사인 라울 리간드는 정령술로 폭우를 몰아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주군께서도 피닉스를 소환해서 겨울을 물러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낭설입니다.”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정령사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
라울 리간드는 최상급 정령사였다고. 상급 정령사인 내가 비교나 될까보냐?
거기다가 폭우를 몰아내는 거야, 아마 바람의 정령으로 먹구름을 날려 보낸 것이겠지.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겨울은 대체 어떻게 몰아내야 하는 거야? 내가 신도 아니고 계절을 무슨 수로 바꿔?
황당해하는 내게 에반이 덧붙였다.
“그만큼 주군에 대한 민중의 기대치가 높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치적도 훌륭하지만, 민중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라 잘하면 잘할수록 더 잘하라고 요구하지요.”
“겨울을 몰아내지 못하면 욕할 기세군.”
“그만큼 올해 겨울은 혹독합니다.”
“으음.”
나는 창밖에 보이는 새하얀 풍경을 보며 나직이 신음했다.
확실히 올해는 눈이 너무 많이 왔다. 작년보다 두 배쯤 더 강설량이 높아 보인다.
허름한 판잣집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이 걱정되는군. 예전의 흑혈병 때도 가장 먼저 희생된 빈민들은 이런 폭설에도 많이 죽어나갈 터였다.
내 아들 지스야 샐러맨더가 몸속에 깃들어 있어서 나가 놀려고 환장해 하지만, 다들 우리처럼 평화로운 건 아니라는 뜻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겨울을 몰아내는 것은 무리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볼까?”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눈이라도 치우게.”
“당분간은 폭설이 계속 될 것 같습니다만, 한 번 힘을 발휘하신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습니다.”
“매일 치우면 돼.”
“매일 말입니까?”
에반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치우면 돼. 다른 이를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죄 받을 일이야.”
“……그렇군요.”
에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천민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에반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천재는 아니란다.
나는 샐러맨더를 불러들였다.
-뭐 태울 거 있냐?
“그래. 우리 한 번 멋지게 눈을 불태워보자꾸나.”
-싫다! 눈은 안 탄다!
샐러맨더가 짜증을 부렸다.
“시끄러, 이러는 동안에도 가여운 빈민들은 얼어 죽고 있다고.”
-그럼 빈민을 태우자!
“미친 소리 그만 하고 따라와, 이 사이코패스 정령아.”
-쳇!
샐러맨더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내 몸속에 깃들었다. 몸속에서 후끈거리는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어스 핸드를 타고 날아다니며 레던 왕성 제설 작업을 시작했다.
간단했다.
커다란 불덩어리 여러 개를 만들어서 왕성 내의 도로부터 정리했다. 불덩어리가 굴러갈 때마다 눈이 삽시간에 녹아 물이 되었다. 물론 눈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불태우지 않도록 샐러맨더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좋아, 좀 더 속력을 내보자!”
나는 불덩어리 열 개를 더 투입했다.
레던 왕성 시내의 눈을 깡그리 녹이는 데에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정령친화력은 꽤 소모했지만 이 정도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 해도 문제없을 듯했다.
“재상님 만세!”
“리간드 만세!”
“눈이 몽땅 사라졌어!”
“대정령사!”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눈이 가득 덮여 새하ㅤㅇㅒㅆ던 거리가 다시 원래의 풍경을 되찾았으니 다들 놀라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다.
이런 환호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니고, 에반이 언급했던 나에 대한 기대와 의존도가 더 높아진 것뿐이 아닌가.
제설작업을 마친 나는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들이 겨울을 잘 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내려가지는 않고 하늘에서 정령들과 공유된 감각으로 살피기만 했다.
끄응. 예상대로 참혹했다.
잔뜩 깡마른 빈민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앙상한 체구를 한 아이들이 기운이 없어 뛰어놀지도 못하고 천을 두른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은 내 양심을 괴롭힌다.
내 가족은 풍족하게 잘 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무슨 죄로 이러고 살까,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짐작은 했지만 보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현실이었다.
폭설과 한파로 북부대로 통행이 대폭 줄면서 일거리도 덩달아 줄었기 때문에 빈민들은 식량을 얻을 길 없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이런 빈민들은 살 길이 막막해질 터였다.
카르스 황제 녀석.
정말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건지 모르는 건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워질지는 아예 관심도 없는 거냐.
아니, 바로 그 점이다.
카르스 황제의 무감정이 내가 파고들어야 할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유년기에 겪었던 악몽 같은 일들이 현재의 카르스 황제를 만들었다.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이성은 타인의 괴로움으로부터 무감각해지게 했다.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시는 괴로움을 겪지 않기 위해 카르스 황제는 사상최악의 가해자가 되기로 무의식중에 결심한 게 아닐까?
즉, 잔혹한 결단력을 구사하기 위하여 철가면을 쓰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적을 불태워 죽여 한 명의 포로도 남기지 않았던 베잘리우스 대공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이라는 뚜렷한 명분이 있었지만, 결국 그런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카르스 황제의 철가면을 벗겨야 하는 게 아닐까.
카르스 황제는 정신적인 결함을 떠나서, 똑똑한 인간이다.
철가면을 벗어서 내려놓기만 한다면,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크로센트 베잘리우스의 환생이 되려 하는 그 집착만 사라진다면, 어느 쪽이 양자(兩者)에 합당한 선택인지 잘 알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그놈의 가면을 벗기느냔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빈민들의 처우 문제는 내일 출근해서 상의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