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회: 14권 - 6장. 저택 공사 -->
6장. 저택 공사
병가를 낸 김에 집에서 더 쉬기로 했다.
롬펠 대공으로 인한 충격으로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혼트 제국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을까?
루이와 제론 등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희망이 싹트고 있는 이때에 정작 나 자신은 암담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심하게도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혼트 제국의 수십만 대군이 국경을 넘어 밀려들어온다. 그냥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이 아닌, 제대로 훈련된 혼트 제국의 정예들이다.
그리고 그 대군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바로 전생 당시 야전에서 한 번도 패배해본 일이 없었던 귀재 카르스 황제.
그런 황제를 카이슨 후작과 쥬르덴 후작, 할슈타인 후작 등 내전 때 능력을 입증한 지휘관들이 탄탄히 보좌한다.
강맹한 유목민족군단도 무참히 이 나라 영토를 짓밟고 다니며 악명을 떨치리라.
거기에 롬펠 대공?
앞이 캄캄했다.
혼트 황실이 재정을 쏟아 부었어도 해내지 못했던,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도 불가능했던 것을 롬펠 대공은 해냈다.
사흘 만에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 법을 터득했다. 과연 110년 묵은 괴물이라 칭할 만했다.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나 또한 내 정령술이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그러한 일을 해낼 정도로 대단한 롬펠 대공의 저력에 압도된 것이다.
“아버지와 릭 형님이 그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롬펠 대공이 내게 남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째, 롬펠 대공은 바덴 강 유역 방면의 침공군 사령관으로 내정될 거란 점. 바덴 강 유역에서 북부로 진격하면 필연적으로 내 영지를 거점으로 방어에 나설 아버지와 릭 형님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둘째, 아버지와 릭 형님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직접 전장에 나와 자신과 싸워야 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롬펠 대공은 아버지, 릭 형님은 물론 나와도 싸우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아버지와 릭 형님 역시 오러 마스터다. 무의 정점에 이르러 많은 무인의 존경을 받는 강자다. 그런 둘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롬펠 대공은 실제로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면서 상상할 수 없는 오러량과 경험을 축적했다.
정령의 기운을 감지해낸 것만으로도 그가 다른 오러 마스터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뒹굴고 있을 거예요?”
줄리아가 침대에서 배게는 안고 뒹구는 내게 핀잔을 주었다.
“넌 또 어디 파티 가니?”
“루셀 자작 부인의 생일이에요.”
“누구야 그게.”
“왕실파의 영주잖아요. 북부대로 보수공사 때 공사자금도 기부한 적 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응, 안 나.”
“으이그 정말. 같이 가자고 안 할 테니 기운 차리고 일어나세요. 식사는 하셔야죠?”
“먹고 싶지 않아. 그냥 잘래.”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에 둘둘 말았다. 그냥 번데기가 될래. 이 험한 세상 풍파가 끝날 때까지 번데기 속에서 나오지 않을래.
줄리아는 그런 날 보며 한숨을 푹 쉬더니, 이불을 들추고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다녀올게요.”
“일찍 와. 나랑 놀자.”
“호호, 알았어요.”
웬일로 출근하라고 잔소리 하지는 않는군. 줄리아는 잔소리 하나 없이 날 내버려두고 떠났다.
홀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나는 문득 심심해져서 집안을 살폈다.
마침 시스가 감각에 포착되었다.
시스는 지스를 운디네에게 맡겨두고 오랜만에 마법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시스의 마법 실력이 어느새 4서클이었다. 지스를 낳은 뒤, 줄리아와 달리 어딜 싸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시스는 여가시간이 많이 남아서 틈틈이 마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시스랑 놀아야겠다.
“노움, 시스 좀 데려와.”
-응!
힘차게 대답하며 노움은 바닥을 향해 다이빙했다. 바닥에 쏘옥 스며들어 사라진 노움.
노움은 어스핸드 여섯 개를 만들어서 시스가 앉아 있는 카펫을 통째로 들어올렸다.
갑자기 하늘로 띄워진 시스는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신경 끄고 마법서를 계속 읽는다. 아아, 하늘을 날든 말든 무신경한 시스도 귀여워.
카펫 째로 내 침실까지 옮겨진 시스는 어스 핸드에 의해서 내 옆에 앉혀진 후에도 마법서를 손에 놓지 않고 계속 읽었다.
아, ‘집중모드’구나.
뭔가에 강하게 집중할 때의 시스는 옆에서 누가 뭘 해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법길드에 있었던 어린 시절, 배고픔을 잊기 위해 마법에 몰두했던 버릇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거라고 한다.
나는 시스를 내 옆에 눕혀놓고 배게 대신 끌어안았다. 내게 안긴 채 시스는 마법서를 손에 놓지 않았다. 이러니까 내가 어리광부리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군. 여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성숙해도 남자는 여전히 어린애라고 했던가? 뭐, 나쁘지 않다, 이런 기분도.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법서를 접어놓은 시스가 휙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가까이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나는 조건반사로 시스에게 키스를 했다.
입술을 떼자 시스가 말했다.
“시험할래.”
“무슨 시험?”
“새로 익힌 마법.”
“공격마법이니?”
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격계열.”
“오케이.”
나는 창문을 열고 노움의 힘으로 커다란 흙 인형을 만들었다. 하늘 높이에 둥실 뜬 흙 인형은 꿈틀거리며 변하더니 2미터짜리 거구의 노인으로 변했다. 음, 롬펠 대공과 똑같군.
“자, 저기다 쏴보렴. 아주 박살을 내버려.”
“응.”
시스는 창밖으로 보이는 롬펠 대공 흙 인형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뻗었다.
“라이트닝 미사일(Lightning missile).”
파치치칫!
전격이 시스의 검지 끝에 뭉치더니, 이윽고 전격으로 이루어진 외뿔 모양의 마력체가 발사되었다.
콰지지지직!
라이트닝 미사일에 탄내를 풀풀 풍기며 산산조각이 나버린 롬펠 대공의 흙 인형을 보니 속이 한결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위력을 보니 확실하게 4서클 마스터라 불릴 만한 수준이었다. 나와 결혼한 뒤 마법은 거의 손을 놓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이정도의 실력을 갖다니.
그러고 보니 시스의 특기는 전격계열의 마법이었지. 처음 만났을 때도 오우거를 전격마법으로 상대했었으니까.
“이야 훌륭하네. 시스 천재 같아!”
칭찬공세를 퍼붓자 시스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오랜만에 시스칭찬놀이나 해야겠다.
“우리 시스 이렇게 예쁜데 마법까지 잘하니 어쩜 좋아. 완전 천재야 천재. 사람이 아니라 천사일 거야.”
시스는 쑥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배배 꼬았다. 하하, 귀여워라.
나는 시스를 품안에 끌어안으며 물었다.
“최근 들어서 마법을 열심히 익히네. 다시 마법이 하고 싶어진 거야?”
“집 지킬 거야.”
시스는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찡해졌다.
나라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시스라고 모를 리 없었다. 전쟁이 나면 집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다시 연마하는 것이다.
“마음만으로도 참 든든해진다. 하지만 시스, 전쟁이 나면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줘. 난 줄리아와 네가 전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
“같이 피신할 거야?”
시스가 내게 물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싸워야지. 이 나라의 재상이잖아.”
“그럼 나도 싸워.”
“시스.”
“이곳 좋아. 지킬 거야.”
시스는 이 저택을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왕실은 레던 왕성을 포기할 것이다. 레던 왕성 외곽에 있는 우리의 이 보금자리도 포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