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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341화 (341/529)

<-- 341 회: 14권 - 5장. 두 사람의 세월 -->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일개 군인으로 살았는데도,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많은 것이 보이게 되더군. 그렇게 110년이나 살았으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일 법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는 롬펠 대공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그저 적당히 대꾸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요령이 생기지.”

“요령 말씀이십니까?”

“그래,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요령 말이다. 가르쳐줄까?”

“예, 듣고 싶군요.”

“그럼 한 병 더 가져와.”

롬펠 대공은 빈 술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는 수 없지. 얼마 전에 니벨 영감이 구해온 퀸즈 블러드를 꺼내야겠어.

“오, 우리나라의 명주로군!”

롬펠 대공은 퀸즈 블러드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이사벨라 여왕 때문에 유명해진 이 술은 대대로 혼트 황실에서 애용하고 직접 품질 관리까지 한다.

황실에 진상하는 포도주라서 혼트 제국 사람에게 이 퀸즈 블러드를 대접하는 게 최고의 손님접대하고 한다. 롬펠 대공의 반응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다.

“이건 유독 맛이 훌륭하군?”

놀란 롬펠 대공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정령술로 맛을 개량시켰습니다. 치유의 힘까지 불어넣었으니 맛이 더 좋죠.”

“이 한 잔에 물의 정령의 기운이 스며든 게로군.”

롬펠 대공은 운디네의 기운을 음미하려는 듯 눈을 감고 조금씩 마셨다.

눈을 감은 채 그가 말했다.

“상상이다.”

“예?”

“강하게 상상하고 실재한다고 믿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요령이다.”

“상상이 실현된다니 아리송한 말씀이로군요.”

“난 어렸을 적부터 내가 최강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러 컨트롤을 접하기도 힘든 천한 신분이었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난 믿었지. 봐라, 이렇게 현실로 되지 않았더냐.”

“대단하시군요.”

뭐, 마음가짐의 이야기인가.

“내 말을 안 믿는군?”

“아뇨, 안 믿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너는 어떠냐.”

롬펠 대공이 질문을 해왔다.

“여기 사람들은 너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레던의 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서 행하는 모든 일을 성공시킨다고 말이야.”

“누군지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이미 지금의 세상은 전생과 너무도 달라졌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기에 이렇게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냐.

“푸하하! 하지만 상상하고 믿었겠지. 자기가 행하는 일이 성공하는 미래를 말이야. 강한 믿음이 없이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

알 듯 말 듯 하군.

롬펠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술 들어간 늙은이의 주정쯤으로 여겨라. 너무 쓸데없이 떠들었군.”

“벌써 취하신 겁니까? 좋은 포도주를 더 준비했었는데 안타깝네요.”

“허어, 이 친구. 지금 누가 취했다고. 이 톰 롬펠은 대륙에서 가장 주량이 센 남자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굳게 믿어왔다.”

“아하, 강한 상상이 현실이 된 거군요?”

“바로 그거다! 크하하하!”

나는 니벨 영감을 시켜서 술을 계속 가져오게 했다. 우리는 밤새워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롬펠 대공이 놔주질 않았다.

그나저나 이 양반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건지도 모르겠군.

***

결국은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롬펠 대공과 어울렸다.

하인을 시켜서 왕실에 병가를 냈다. 롬펠 대공이 머무는 동안에는 출근하지 않고 상대해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걸 핑계로 일을 땡땡이 칠 생각은 아니다.

날 찾아온 손님을 놔두는 것도 실례일뿐더러, 무엇보다 이렇게 위험한 자를 가족들과 함께 집에 놔두는 게 영 불안하다.

내가 없는 동안 지스를 업고 튀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런 비열한 짓을 하겠냐마는, 롬펠 대공은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작자라 상식적인 선으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곳에 머물면서 보이는 롬펠 대공의 일과는 단순했다.

전투적인 식사를 하고 나와 술을 마신 뒤에 앞뜰에 앉아 명상에 잠긴다. 심지어 내가 잠을 자러 간 새벽에도 계속 명상을 한다.

“여보, 대체 저 사람은 언제까지 저런데요?”

함께 잠자리에 든 줄리아가 불쑥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적대국가의 재상을 대뜸 찾아와 마시고 먹다가 명상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어요. 당신 주변에는 저런 괴짜가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얘야,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이 세상에 이상한 놈들이 많은 걸 날더러 어쩌라고?”

“그 괴짜들을 당신이 끌어 모으고 있잖아요! 전 어젯밤에 지스가 저 무서운 영감한테 납치당하는 꿈까지 꿨어요!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어휴, 우리 착한 줄리아. 정말로 지스를 친자식처럼 아껴주는구나.”

난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당연하죠!”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내가 함께 있는 한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거야. 그런 악의를 품고 날 찾아온 것도 아닌 듯하고.”

“그럼 왜 왔대요?”

“몰라.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아.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저러는 건데…….”

혹시 밤낮으로 하는 저 명상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 저건 그냥 오러 마스터라면 누구나 하는 평소 수련일 뿐이다.

정말로 그저 호기심으로 날 보러 왔을지도 모른다. 예민한 시기라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걸까?

***

“불쑥 찾아와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쳤군.”

롬펠 대공이 떠나겠다고 한 건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이런, 이제야 가십니까?”

내 농담에 롬펠 대공은 푸하하 세상이 떠나가라 웃었다.

“이렇게 안심하는 걸 보니 내가 무지 껄끄러웠나보군. 아직 적이 아니라고 말은 잘 하더니만 역시 불안하긴 했나보지?”

“아직 적은 아니지만 적이 될 때를 대비해야죠.”

“이 녀석아! 아무렴 내가 네 아들이라도 업고 튈까봐? 이 톰 롬펠, 아무리 막나간다고 소문은 났어도 군인이지 비열한이 아니다.”

“역시 소문이 났었군요?”

“크하하! 이런 재미있는 친구 같으니!”

롬펠 대공은 내 어깨를 쾅쾅 치며 폭소했다.

누가 댁 친구야? 그보다 어깨 부러질 것 같거든?

롬펠 대공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동안 마음 졸여야 했던 나로서는 그가 떠난다니까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내 이 사람의 진짜 목적은 알아내지 못했군.

“참, 말 한 필만 빌려다오.”

“말이요?”

“타고 온 녀석은 지쳐서 헐떡거리기에 도중에 버리고 달려왔거든.”

어쩐지 달랑 몸 하나만 갖고 왔다 싶었다.

나는 하인에게 지시해서 말 한 필과 길 가다 먹을 음식, 힐링포션을 가져오게 했다. 힐링포션은 또 가여운 말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의미에서 선물하는 것이다.

튼실한 갈색 말을 확인한 롬펠 대공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녀석이군. 빚은 꼭 갚겠다.”

“괜찮습니다.”

“음, 역시 그렇지? 까짓 말 한 필쯤이야.”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롬펠 대공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아직도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쳐주지. 자네는 대지의 정령을 늘 발밑에 숨겨두고 다니는군. 그리고 물과 불의 기운이 자네의 아들에게서 느껴져서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정령을 몸속에 숨겨둘 수도 있는 모양이야. 내 말이 맞겠지?”

“……?!”

나는 깜짝 놀랐다.

롬펠 대공은 마치 정령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힌트를 충분히 줬을 텐데?”

그 말에 비로소 나는 롬펠 대공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많은 것이 보이게 되더군. 그렇게 110년이나 살았으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일 법 하지 않겠느냐?”

“강하게 상상하고 실재한다고 믿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요령이다.”

맙소사.

그는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이었다.

운디네가 솜씨를 발휘한 퀸즈 블러드를 열심히 음미한 것도, 매일 밤새워 명상에 잠겨 있던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였다.

“궁금하더군. 황실의 내로라하는 젊은 친구들이 하나 같이 자네를 두려워하기에 정말로 정령술에는 대책이 없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륭겐 후작조차도 정령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육안으로 식별해야 했다. 그랬기에 나와 싸울 때 방어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110년 묵은 오러 마스터는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고작 사흘 만에!

이마에 절로 식은땀이 맺혔다.

“대체 얼마나 괴물이신 겁니까?”

“110살이나 먹고 오러 마스터가 된 지도 70년이나 됐으니 이 정도 재주는 부려도 이상할 것 없지 않느냐. 자네의 후한 대접을 악용한 것 같아 미안해지는군. 그래서 내 나름대로 보답을 하겠다.”

“…….,”

“자네 가족들의 안전은 이 톰 롬펠이 보장하겠다. 물론 자네의 부친과 둘째 형의 목숨은 장담 못하지만 말이다.”

내 귀에는 협박으로 들린다.

아버지와 릭 형님을 죽일 건데 막을 테면 막아보라고 말이다.

“그럼 또 보자! 이랴!”

롬펠 대공은 말에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아찔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카르스 황제의 곁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는데, 거기에 저 괴물까지 합세한 건 반칙이다.

아버지와 릭 형님이 과연 저 괴물 대공을 당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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