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 회: 14권 - 3장. 기동행정 -->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하는 루이에게 에릭 국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두 사람 다 아주 훌륭하다! 다들 어찌 생각하느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헤이젤 듀론 자작이 평했다.
나 역시 두말없이 찬성이었다.
“제 눈에도 흠잡을 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도 인정하는군. 실은 짐도 레던 왕성을 포기하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략상 포기하는 게 옳긴 한데, 국가통제 측면과 전후의 뒷수습, 레던 왕성의 백성들의 안전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그대들에게 대책을 논의하려 했는데 벌써 이렇게 해답을 가져왔군.”
에릭 국왕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하였다.
전시에 있어 행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명령하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 전체가 통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100%의 국력으로 침공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전시는커녕 평시에도 국력의 100%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통치시스템은 아직 인류사에 등장한 바가 없다.
소통의 부재로 어딘가 지도자의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지역이 항상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동행정의 요지는 혼트 제국군이 국내에 침투한 상황에서도 에릭 국왕의 국가통제력을 유지, 나라가 온힘을 기울여 침략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 계획의 명칭이 ‘기동’행정인 이유는 이 행정체계의 최종결정자인 에릭 국왕이 전시에는 총사령관이기 때문이다. 전군을 통솔하고 움직이는 상태에서도 행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루이가 설명에 나섰다.
“전쟁 발발 시, 왕실 행정을 지역별로 분산시킵니다. 그리고 전군의 총사령관이 되신 폐하께서 방침을 전달, 각 지역별 행정조직을 통제합니다.”
“봉건제와 마찬가지군.”
에릭 국왕이 중얼거렸다.
“예. 그리고 침략한 적군의 방해로 방침하달이 불가한 상태에서도, 미리 20가지의 상황별 방침을 미리 설정하여 정황에 맞춰서 자의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행정조직을 어떻게 지역별로 나눌지는 초안 원고에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효율적이고 치밀하게 분산된 조직도를 보면 전율을 금할 길이 없다.
게다가 각 분산된 행정조직들은 근접한 지열별로 서로 연계하며 거미줄 같은 체계를 형성한다. 지역마다 따로 놀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레던 왕성의 거주민은 총 6개 지역으로 나눠서 피난을 시킵니다. 이 6개 지역은 혼트 제국군의 예상 침공경로를 고려하여, 지리상 전략적 가치가 가장 낮은 곳으로 설정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한 혼트 제국군은 필시 민간약탈에 의한 현지보급을 노릴 터. 그 점을 노려서, 전략적 가치가 없는 지역에 민간인을 피난시킨다.
혼트 제국군이 약탈을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행군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불필요한 행군은 혼트 제국의 침략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혼트 제국의 주요 전력 중 하나인 유목민족군단은 약탈에 미친 족속들이다. 빠른 기동력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다면 더없이 위협적인 군대지만, 약탈에 눈이 멀어 진군 도중 군령을 어기고 민간인 피난지역으로 새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혼트 제국군의 군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효과가 생긴다.
우리로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며 오리엔 왕국의 원군을 기다려야 하니, 혼트 제국군의 행동이 지연될수록 유리했다.
백성들을 미끼로 쓴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차피 전쟁에서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백성들을 더욱 안전하게 하는 길이었다.
기동행정의 원고 초안을 살펴보던 에릭 국왕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전쟁 발발 시 이 계획을 실현할 때까지 혼트 제국군을 저지할 수 있느냐가 문제로군.”
레던 왕성에서 북부대로를 따라 혼트 제국 방면의 국경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뮤트 공작가가 있다. 템플 오브 나이트. 레던 왕국의 수호신이 혼트 제국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뮤트 공작이 뚫리면 곧바로 레던 왕성까지 스트레이트다.
루이의 지적대로 이 레던 왕성은 국경에서의 거리가 너무 짧아서 방어에 용이치 않은 것이다.
“뮤트 공작 전하께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혼트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오셨습니다. 혼트 제국군이 전력을 다해 공세를 펼쳐도 쉽사리 템플 오브 나이트를 떨어뜨리지는 못할 겁니다.”
헤이젤 듀론 자작의 의견이었다.
확실히 전생 때도 뮤트 공작은 3개월을 버텼지.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져서 어찌 될지 장담 못한다.
그때는 오리엔 왕국과 동맹을 맺지 못했다. 오리엔 왕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르스 황제는 무리하지 않고 공략했다. 심지어 육제후도 레던 왕실을 돕지 않았으니 급할 게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전쟁이 터지면 동맹국인 오리엔 왕국은 즉시 원군을 파병할 테고, 육제후 중 네 가문이 함께 싸울 것이다.
전생 때와 달리 카르스 황제는 신속하게 공격해올 것이란 뜻이다.
이에 제론이 반론을 했다.
“국경 방면의 정찰을 강화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전쟁이 시간 싸움임을 아는 이상, 카르스 황제는 전력을 기울인 총공세나 책략으로 단숨에 뮤트 공작가를 돌파하려 들 겁니다.”
결국 열띤 회의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을 확인한 에릭 국왕은 회의를 끝내고자 결론을 내렸다.
“군사부상서는 일단 왕실군의 기병대 전력을 차출하여 국경 방면의 정찰을 강화하라.”
“예.”
제론이 고개를 숙였다.
“재정부상서 콘체른 남작은 책임지고 이번 기동행정 작전을 준비하라. 이에 따른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
“옛!”
루이가 답했다.
그때 내가 말했다.
“폐하. 재정부상서의 작위가 낮아 기동행정 작전 준비를 총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그렇군. 리간드 백작의 말이 옳다. 기동행정 작전을 수립한 두 사람에게 각각 3천 레디나씩의 포상금을 내리고, 돌아오는 궁정회의에서 콘체른 남작을 자작으로 승작시키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의 성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루이와 제론은 한쪽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는 루이, 제론과 함께 퇴근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한 잔 어때?”
“재상 각하께서 사시는 겁니까?”
제론이 물었다.
“포상금으로 3천 레디나나 받게 되었으면서 치사하게.”
“레던 왕성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3천 레디나는 저의 소중한 조기은퇴자금으로 써야 하니까요.”
제론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일찌감치 은퇴를 못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돈 문제다.
그런데 3천 레디나를 포상으로 받게 되었으니 언제 은퇴해도 걱정 없게 되었다.
으음, 이래서는 안 되는데. 어서 저 3천 레디나를 다 탕진하게 만들어야겠어.
잠시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이 레던의 현자께서 책임지고 너희에게 최고의 술맛을 보여주마. 너희의 혀가 황송해할 정도일 거야.”
싸구려 술로 만족하는 입맛이라서 아직 파산지경에 안 간 제론.
너에게 고급 와인의 맛을 실컷 보여주마. 다시는 싸구려 술을 마실 생각이 안 나도록 말이야.
나는 두 사람을 레던 왕성에서 최고로 명성이 높은 술집에 데려갔다.
특별석에 예약하고 병당 5레디나가 넘는 일류 포도주만 집중적으로 주문했다.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다니!”
“그래그래, 많이 마셔. 내 주머니 사정은 너희의 간 기능보다 우월하니까.”
눈이 뒤집혀 포도주를 퍼마시는 제론을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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