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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기동행정
루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제론의 특별무급휴가를 처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문제로 제론의 도움이 필요하다나?
순간 제론 이놈이 휴가를 타고 싶어서 술수를 부리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무급휴가라니?
아직 파산 지경까지는 안 갔지만, 술값 때문에 생활비가 아슬아슬한 제론 녀석이 무급휴가를 원할 리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루이도 현재 휴가 중.
거기에 제론까지 특별무급휴가라니. 정말로 루이는 제론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뭐, 루이의 부탁이니 들어줘야지.”
제론의 부탁이었다면 한 백 번쯤 다시 생각해봤겠지만.
나는 에바를 시켜서 제론의 이름으로 된 특별무급휴가신청서를 꾸미게 했다. 에바는 제론의 필체까지 그대로 흉내 내며 신청서류를 작성해냈다.
“헤헤, 저 잘했죠?”
“응. 근데 얘야, 넌 커서 뭐가 되려고 법망을 피해가는 교묘한 테크닉에 정통한 거니?”
“헤헤헤.”
“넌 위험한 녀석이니 앞으로도 쭉 내 곁에 있도록 해. 알겠어?”
그러자 에바는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는 얼굴을 붉히는 게 아닌가.
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프러포즈 아니다.”
“치.”
시무룩한 에바. 역시 푼수였다.
한동안 루이와 제론 두 사람이 없으니 왕궁이 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부재중이라 그런지 에릭 국왕도 측근들을 사적으로 모으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재정부는 루이가 없어도 동요하지 않고 자기 역할을 잘 해냈다. 물론 업무처리속도는 절반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원래 루이가 군림하는 재정부가 지나치게 빠른 거지 다른 부서와 비교하면 지금도 여전히 빨랐다.
집에 돌아가자 줄리아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루이 콘체른 남작 말이에요. 인간이 아닐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뭐?”
“콘체른 가의 조상 중에 엘프가 있을지도 모른대요.”
“그게 뭔 헛소리래?”
“제가 재정부 소속 고위관리들의 부인들과 알고 지내거든요.”
레던 왕성에서 네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이 마당발아.
“보고를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콘체른 남작이 대뜸 ‘계산 잘못했잖아.’라고 지적하더래요. 돌아가서 다시 계산해보니까 정말로 오차가 있었더라는 얘기죠. 남이 끙끙대며 할 계산을 듣는 즉석에서 암산하니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더래요.”
“뭐, 루이가 달리 재정부의 대마왕이겠어.”
“여보가 소환한 악마가 아닐까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는데. 히히히.”
“내가 소환한 악마는 한 명으로 충분하거든?”
그래도 요즘은 지스의 체온에 깃들어 있어서 조금 얌전해졌지, 샐러맨더 녀석.
“오늘 파티에서는 콘체른 남작의 명언이 화제가 됐어요.”
“하아, 잠은 안 자?”
“아잉, 들어줘요! 여보 없는 동안 혼자서 심심했단 말이에요.”
“방금 네 입에서 오늘 파티에 갔다는 말이 나온 듯한데.”
최근 들어 줄리아와의 잠자리가 잦아졌다.
시스는 요즘 아들 지스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말문도 트였고 슬슬 인격이 형성될 시기이니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 잠자리까지 아이와 함께 잔다. 아무래도 지스의 첫 ‘엄마’ 소리를 운디네가 들은 게 충격이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시스가 아이와 함께 자는 관계로, 나는 매일 밤 줄리아의 수다를 들어줘야 하는 신세였다.
“아무튼 들어봐요. 재미있어요.”
그러면서 줄리아는 루이의 명언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국가 발전은 관리들의 업무속도에 비례한다.”
“나태한 관리와 역적의 차이를 모르겠군.”
“두뇌를 편하게 놔두지 마.”
“숨을 쉴 수 있으면 아직 아픈 게 아냐.”
“그 계산 잘못됐어.”
결국 난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죠, 그죠?”
“진짜 루이답다.”
루이라면 능히 그런 말을 할 법 하기 때문에 나는 웃음을 그치지를 못했다.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줄리아가 말했다.
“그런데 콘체른 남작은 결혼할 생각이 없데요?”
“생각이 전혀 없나본데.”
딱히 루이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전생 때도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으니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따로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재정부상서로 취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낸 휴가를 제론과 합작하여 모종의 일을 하는 데에 쓰고 있다.
그야말로 워커홀릭.
맡은 일에 몰두하고 자신의 성취에 삶의 보람을 찾는 타입이다. 그런 유형의 인간은 가족에 대해 일절 신경 쓰는 법이 없다.
“몇몇 여자들이 콘체른 남작에게 관심이 있나 보던데, 주선해줄 생각은 없어요?”
“나도 루이가 결혼했으면 싶지. 결혼해서 루이를 쏙 닮은 아들을 많이 낳아줘야 이 나라 장래가 밝아지거든. 근데 루이에게 관심 있는 여자들 중에, 전혀 관심 받지 못해도 상관없는 여자가 있겠니?”
“……관심 받고 싶어 하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어요.”
“게다가 검소해. 야망은 큰데 그 야망에 물욕은 눈곱만큼도 포함되어 있지 않거든.”
참고로 전생 때 루이는 죽으면서 전 재산을 기부해버렸다. 그리 많은 돈을 벌지 않았음에도, 원채 쓴 돈이 없어서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훌륭한 인물이지만 여자에게 좋은 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줄리아는 루이의 혼담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루이가 출근했다. 함께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한 제론은 몹시 얼굴이 초췌했는데, ‘나 혹사당했음’이라고 써 붙여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휴가까지 내서 매달린 일이니 필시 대단한 결과물을 가져왔으리라 기대되었다.
업무시간이 끝나자 에릭 국왕의 호출을 받았다.
나와 루이, 제론, 헤이젤 듀론 자작 등 핵심 측근들이 에릭 국왕의 집무실에 모였다.
뒤늦게 도착한 에릭 국왕은 루이와 제론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준비한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예, 폐하.”
루이는 준비한 서류를 우리에게 배분했다. 겉표지에는 ‘기동행정’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기동행정?”
내 물음에 루이가 답했다.
“혼트 제국의 침략에 대응하는 전시행정체계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집무실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치밀하고 탁월하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장대한 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을까! 평소에도 루이를 높게 평가해온 나였지만, 그 평가를 다시 상향조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혼트 제국군 침공 시 벌어질 전략적 흐름을 유추하고, 이에 맞춰서 왕실행정체계를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게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서 즉각적으로 수도인 레던 왕성을 포기하는 전략적 과단성도 보였다.
레던 왕성의 거주민 피난 계획까지도 전략적으로 짜여 있었다.
소름이 끼친다.
이건 그야말로 명작이다.
전생 시절, 루이가 카르스 황제에게 바쳤다는 ‘총독체제에 의한 레던 왕국 통치의 초안’에 버금하는 역작이었다.
아니, 그것을 능가한다고 나는 확신했다.
이 기동행정은 혼트 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항하여 희망을 찾는다는 점에서 더 높게 쳐주고 싶다. 거기에 면밀하게 분석된 전쟁의 전략적 흐름은 제론의 솜씨가 분명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끝났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에릭 국왕이 입을 열었다.
“왕비에게 들으니 콘체른 남작이 엘프의 후손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던데 사실이냐.”
“아닙니다.”
시에나 왕비도 어제 파티에 갔었구나.
“그런데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단시일에 이걸 완성했단 말이냐.”
“과찬이십니다, 폐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하는 루이에게 에릭 국왕은 호탕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