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32화 (332/529)

<-- 332 회: 14권 - 2장. 진정한 힘 -->

“너 왜 사냐?”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제 삶의 방침입니다.”

“그래. 알았고, 나중에 한 번 봐줄게.”

“지금 보십시오.”

“업무시간도 아닌 데 이런 걸 왜 봐? 제목만 봐도 골치 아프게 생긴 것을. 내일 업무 시간 되면 확인한다고.”

“업무 시간에는 업무를 하셔야지요.”

“좀 살려주라. 나 술 진탕 먹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힐링포션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아무튼 내일 얘기 해.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냐.”

“하는 수 없군요.”

루이는 탁자에 종이와 펜을 꺼내 뭐라고 휘갈겨 썼다. 그리고는 어린 하인을 불러서 지시했다.

“이 편지를 재상 각하께 전해드려라. 지금쯤 댁에 계실 거다.”

“예.”

어린 하인이 급히 쓴 편지를 건네받고 쪼르르 달려 나가는 것을 제론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편지를 보내는 거야?”

“데커드 자작님의 특별무급휴가를 처리해달라는 부탁이 담긴 편지입니다.”

“오, 휴가? 그거 좋지. ……어라? 그런데 너 방금 ‘무급’이라고 했어?”

“예. 현재 시점에서 데커드 자작님께서 합법적으로 받으실 수 있는 휴가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무급은 안 돼! 내 월급이 삭감되잖아. 가뜩이나 술집에 외상 달린 것 갚으려면 아슬아슬한데!”

“술을 줄이시면 되겠군요. 그리고 휴가 기간 동안 제가 돌봐드릴 테니 생활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 이 삭막한 집에 감금시킬 셈이냐? 작위는 내가 더 높다고. 날 이런 식으로 대우하면 곤란해! 경호원! 내 경호원들은 어디 갔어?”

“모두 휴가 보냈습니다.”

“……내 경호원들을 네가 휴가 보냈다고?”

“예. 순순히 말을 듣더군요. 자, 이제 시작하지요. 일단 원고 초안부터 검토 부탁드립니다.”

“어, 어이!”

루이는 제론을 질질 끌고 서재로 데려갔다.

온갖 자료들로 빼곡히 도배된 서재의 숨 막히는 풍경을 보며 제론은 절규했다.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감금시키는 걸 좋아하는 거야!”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당했던 제론 데커드.

그게 본인의 불량한 근무 태도 때문이라고는 끝까지 생각지 않았다.

결국 루이의 집에 붙잡혀 협업을 하게 된 제론.

‘전시 임시행정체계 구축 및 민간 피해 최소화 방안’ 초안 원고의 서문을 한 번 슥 본 제론은 즉각 태도가 진지하게 돌변했다. 루이가 혼신의 힘을 쏟은,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는 역작이라는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제론은 원고를 완독해버렸다.

“어떻습니까?”

커피를 가져온 루이가 물었다.

제론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나더러 뭘 도와달라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완전무결해 보이는데.”

“과찬이십니다.”

“정말인지, 재상 양반한테 이걸 보여주고 싶다. 보고 좀 배우라고. 그런데 이 원고에 내가 손댈 부분이 있겠어?”

“전시에 있을 아군과 적군의 전략적 움직임에 따른 변수를 최대한 고려하고 싶습니다.”

“네가 해도 충분해 보이는데.”

“저도 자신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데커드 자작님께서 도와주시면 더욱 완벽해질 수 있는데 혼자 하겠다고 고집할 이유가 없지요.”

“한 번 훑어봤는데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밀하게 구상된 계획이었어. 행정체계를 전략 레벨로 승화시켰더군. 지금 이대로 올려도 채택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네 공적으로 기록되지. 그걸 나랑 나누겠다고?”

“예.”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그래? 원래 넌 이런 녀석이 아니었잖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 엄청난 구상을 나와 함께 공을 나누겠다니, 아깝지 않아?”

“아깝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양반 연설에 감화된 인간이 여기에도 있었군.”

“심금이 울렸지요.”

제론은 피식 웃었다.

“그 양반이 원래 말 하난 죽이게 잘해. 나도 그 말발에 홀랑 넘어가 이 고생이잖아.”

루이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런 점은 너도 배워야 해. 상대의 흥미를 끌어내는 요령을 익히란 말이야. 제목부터가 문제야. ‘전시 임시행정체계 구축 및 민간 피해 최소화 방안’이 뭐야? 재미없고 삭막하게. 좀 더 눈길을 확 잡아끄는 간단명료한 제목으로 바꿔보자고.”

“어떻게 말입니까?”

“보여주지.”

제론은 원고 첫 페이지의 ‘전시 임시행정체계 구축 및 민간 피해 최소화 방안’에 줄을 죽죽 그어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새로운 제목을 써넣었다.

제목은 이러했다.

「기동행정」

루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연.”

“훨씬 낫지? 제목이 심플할수록 후세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잖아.”

“후세의 명성에는 관심이 없지만, 아무튼 그 제목에는 찬성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그 커피 식기 전에 드시지요.”

제론은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갔다.

“오, 맛있네.”

“감사합니다.”

“응? 네가 왜 감사해?”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

“제가 일 외에 취미 하나 없을 정도로 삭막한 인간으로 보이셨습니까?”

그렇게 훗날 필독서로 손꼽히게 되는 전설의 명저에 두 천재가 몰두하기 시작했다.

***

설명회를 성공리에 마치고서 나는 에릭 국왕으로부터 사흘간의 휴가를 얻었다. 푹 쉬고서 다시 업무에 복귀하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휴가동안 집에서 뒹굴고 지스와 놀아주는 가정적인 아빠 놀이는 할 수 없었다. 줄리아와 함께 파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명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대거 모인 성대한 파티를 마당발에 파티광인 줄리아가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설명회로 화제를 모은 나를 데려가면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결국 난 줄리아와 실컷 어울려주었다.

이왕 파티에 간 김에 사람들과 어울려서 친분을 다졌다. 이렇게 쌓은 친분이 전시에 귀족들을 결집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파티를 실컷 즐긴 줄리아는 몹시 개운한 모습이었다.

“역시 울 남편이 최고야!”

“이제야 이 남편님의 위대함을 깨달았구나.”

“여보의 명연설에 감동받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돈만 많은 줄 알았더니 말도 잘하네요?”

“예야, 졸부 남편님한테 혼나볼래?”

“히히히.”

“그나저나 여자들 반응은 어땠어?”

“남자들에 비해서 보다 조심스러운 태도였어요. 아무래도 자식이 품에서 떠나 왕립학교로 가는 게 꺼려지는 모양인가 봐요.”

“여자들 쪽이 남자보다 더 자식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하니까. 자고로 아버지는 사회를, 어머니는 가정을 상징한다고 하잖니.”

어려서 어머니의 과보호를 받은 사람일수록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 집안은 정반대 같아요. 저는 여러 모임에 다니며 인맥 쌓는 걸 좋아하고, 여보는 집에서 뒹굴고 싶어 하고.”

“그거 우리 리간드 가문의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 같지 않니? 난 일찍 은퇴해서 집에서 놀고, 너는 밖에서 사업하고.”

“누구 좋으라고! 나만 밖에서 일하게 해놓고 시스랑 둘이서 오붓하게 놀 생각이죠?”

“또 질투하는구나. 요 귀여운 것.”

나는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뭐, 뭐예요. 내가 앤 줄 알아요?”

줄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뿌리쳤지만, 계속 쓰다듬어주니 이내 얌전해졌다. 귀여운 내 마누라 같으니.

우리는 손을 잡고 어스 핸드에 탄 채 하늘을 날았다. 환한 달빛과 별빛이 낭만적인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밤하늘의 분위기에 취한 줄리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안았다.  

아,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런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일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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