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 회: 14권 - 1장. 개교 -->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기 때문에 카르스 황제와는 무관해도 혼트 황실과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정령술 연구를 담당한 황실 인물이 연구 성과가 미진하자 흑마법사 무리와 손잡은 게 아닐까 의심됩니다.”
“단순히 흑마법사들이 독단으로 출몰하여서 인질을 혼트 제국에 팔아넘기려 했을 수도 있겠군. 가능성은 여러 가지니 함부로 확정지을 수 없다.”
에릭 국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시기적으로 조금 공교롭기는 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시기였기에 흑마법사들이 한 몫 잡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다 죽이지 말고 한 명쯤은 사로잡을 걸 그랬나.
루이가 말했다.
“만약에 이 사건의 배후가 정말로 혼트 황실이라면, 이는 우리로서는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정령술 대책 연구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수단을 썼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으니까요.”
이에 에릭 국왕은 내게 물었다.
“리간드 백작. 흑마법사들의 대 정령 마법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소?”
“별로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정령을 직접 속박하는 마법이었는데, 보다 강한 정령친화력으로 깨뜨릴 수 있고, 아예 정령을 보이지 않게 해도 되니까요.”
지금 생각난 건데, 속박에 걸렸을 때 정령을 소환해제 했다가 다시 소환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 정령속박마법이란 것은 내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레이몬드 후작쯤 되는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별로 무섭지가 않다.
“아무튼 정확한 첩보가 보고될 때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는 사안이군. 그런데 그보다 리간드 백작, 왕립학교는 어찌 되었느냐?”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올해 겨울에 개교하여 신입생을 모집하고 내년 봄부터 학기를 시작하려면, 이제 슬슬 홍보를 해야 할 듯합니다.”
내 말에 루이가 말했다.
“왕립학교는 이미 귀족사회에서 충분히 알려져 있습니다. 재상 각하께서 주도하시고 왕실이 대대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이니 모를 리가 없겠지요. 다들 관심은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럼 왕립학교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고, 교육방침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자리를 만들어야겠군. 리간드 백작, 짐의 이름으로 각지의 귀족들을 모두 초청하여 설명회를 열도록 해라. 홍보는 그것으로 충분할 터이다.”
“알겠습니다.”
각 가문에 설명회 초청장을 보내는 일은 에바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이 나라의 거의 모든 가문에 초청장을 보내는 일이지만, 에바라면 빠뜨리지 않고 잘 처리하겠지.
***
초청에 응하는 귀족은 초청장을 받는 가문의 3분의 1도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국왕의 이름을 건 초청이라고는 하나, 의무적인 소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러 레던 왕성까지 발걸음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레던 왕성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족들의 숫자는 내 예상을 한참 초월하였다.
레던 왕성 내에 지체 높은 귀족들이 묵을 만한 숙소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나는 즉시 초청장을 가진 귀족을 왕립학교로 안내하게 조치했다. 왕립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온 거야?
아무리 내가 그간 명성을 꽤 얻었다고 해도 이토록 많은 인원이 멀리서 찾아오게 만들 정도의 동원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내 의문에는 줄리아가 답해주었다.
“자식교육을 우습게보지 마세요.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부모가 얼마나 열성을 다하는지 아세요? 내로라하는 학식 높은 인사들이 교사진으로 대거 포진된 교육기관이니 당연히 자식 가진 부모라면 관심이 클 수밖에요.”
“그런가?”
줄리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명망 높으신 재상님께서 직접 추진한 일이잖아요? 얼마나 대단한 교육기관이 될지 다들 알고 싶은 거라고요. 참고로 설명회에는 저도 참석할 테니 그리 아세요.”
“아아, 어떡하지?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설명을 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위장이 쿡쿡 쑤셔지는 기분이야.”
“재상씩이나 돼서는 뭘 새삼스럽게 겁먹고 그러세요? 카르스 황제 같은 무서운 사람도 상대해봤으면서.”
“숫자가 다르잖아, 숫자가.”
지금은 제법 잘나가는 인간이 되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범한 상인이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 나라의 재상씩이나 된 게 참 신기할 정도다.
줄리아는 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힘내세요. 잘 하실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에요.”
“잘 할 수 있을까?”
“두 여자한테 동시에 프러포즈를 했을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 이제 와서 겁을 먹고 그래요?”
“아하하, 그런가?”
“그렇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살짝 화나네. 먼저 결혼하자고 말 꺼낸 건 난데, 아들도 시스가 먼저 낳아버리고. 에이 씨, 분해 죽겠어.”
“그럼 우리는 딸을 낳으면 되겠네. 사실 난 아들보다 딸이 더 좋거든.”
나는 뒤돌아 줄리아를 마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아요. 여보가 정령들이랑 노는 모습을 보면 징그러울 정도라고요.”
“하하하.”
나는 줄리아에게 입맞춤을 했다.
밤이 깊어서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3층 테라스로 나가 바람을 쐤다.
밤하늘의 달빛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고운 빛을 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나는 감상에 젖었다.
“노움.”
-응, 아빠.
노움이 뿅 하고 나타나 껑충 내 머리 위에 앉았다.
“아빠는 얼마나 변했을까?”
의미 없는 넋두리에 가까운 질문이었지만,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노움은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아빠는 많이 변했어.
“그러니?”
-응.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성장했어.
귀염둥이 노움에게서 성장했다고 칭찬을 받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을 하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어.
이건 노움 자신의 의견이 아니었다.
정령으로서 계약자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고는 보이는 그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장소를 가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하면서 아빠의 마음이 아주 커졌어.
“마음이 커져?”
-응. 넓고 깊게 생각하고 보다 멀리 보는 시야가 생겼어. 경험이 쌓여서 보다 많은 요소를 염두에 둘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아빠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장했어. 그러니까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노움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내가 아빠 곁에 있으니까.
노움의 말에 나는 가슴이 찡해졌다.
“어휴, 우리 귀염둥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하니! 믿음직해!”
-헤헤, 나 믿음직해.
난 노움을 끌어안고 얼굴을 마구 부볐다. 노움은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 노움 덕분에 설명회에서 모두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왕립학교는 초청 받은 귀족들로 바글거렸다. 그들은 내가 적극적으로 건설에 참여하여서 세운 왕립학교의 건물을 둘러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정원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고, 중앙에 우뚝 선 3인의 석상은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해 학교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설명회 시간이 다 되자 강당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교장인 듀론 후작이 인사를 건네고 학교를 세운 의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어서 교사진 중 한 사람이 왕립학교의 교육 커리큘럼을 소개했다.
학습과 실습을 병행하는 교육방식에 적잖은 사람들이 흥미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수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교육환경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경쟁 속에서 강하게 커야 한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경쟁에서 아들이 낙오될 것을 걱정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