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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 14권
1장. 개교
싸움의 뒤처리는 뒤늦게 달려온 로열나이츠와 왕성방위대가 맡았다.
주변이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 저택만은 멀쩡했다. 사실 다행이랄 것도 없고, 싸울 때 내가 잘 컨트롤했거든.
흑마법사들의 시체도 잘 수거해가고 상황이 수습됐지만, 나에 대한 소문은 레던 왕성 전체에 퍼져서 온 사방팔방에서 내 얘기만 하게 되었다.
그 노인네가 소환한 지옥의 뱀은 그렇다 치더라도, 샐러맨더가 변신했던 피닉스는 화려하게 하늘을 날아다닌 바람에 레던 왕성에 사는 모두가 목격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그 자리에서 목격했다니까? 재상님께서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수백 개의 창으로 찔러 죽이셨는데, 흑마법사 한 명이 대가리가 다섯 개인지 여섯 개인지 달린 엄청난 뱀을 소환했어! 여러 개의 아가리에서 독을 풀풀 뿜던 무지막지한 놈이었지.”
“히익, 그런 괴물을 어떻게 물리치셨대?”
“그게 또 압권이지. 재상님이 하늘에 대고 명령을 내리니까, 하늘에서 거대한 피닉스가 날아와 뱀 괴물 자식을 불태웠어. 그 직후에 우주의 진리를 밝히는 신성한 빛이 쏟아졌어. 신도 재상님의 업적을 치하하신 거야!”
“대단해! 역시 재상님이셔!”
주민들의 대화를 정령과 공유된 감각으로 들으면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하루 만에 신도 인정한 전설의 용사가 되어버렸다. 혹시 대정령사 라울 리간드의 전설도 이런 식으로 부풀려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음날 아침, 왕궁에 출근하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재상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낮부터 왕궁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에게 경례를 해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그래, 좋겠네. 어차피 매일 보는 얼굴이니 매일 매일이 영광이겠어.”
“어제의 활약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알았어, 많이 존경해.”
“옛!”
입궁하자 궁내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시녀들이 날 보며 수군거렸다. 서로 모여서 신나게 소설 한 편 쓰겠군.
재상부의 내 집무실에 들어가자 에바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돌아오셨네요, 재상 각하. 그동안 푹 쉬셨나요?”
“어허, 이 몸은 왕립학교 설립을 마무리하려고 바빴다고.”
“마지막 한 달간은 달리 재상 각하께서 할 일이 없으셔서 한가하셨을 텐데요.”
“너, 에바 주제에 날카롭다?”
“헤헤헤.”
에바는 푼수처럼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피닉스를 불러서 못된 뱀을 처치하셨어요? 싸움에서 이기고 난 후에 신을 보셨다고 하던데 그것도 정말이에요?”
“얘야, 넌 내 측근이 되어가지고 그런 초현실적인 소문을 믿으면 안 되지 않니? 피닉스는 내 샐러맨더가 변한 모습이었고, 신을 봤다느니 하는 건 샐러맨더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하면서 빛을 낸 걸 보고 헛소문이 돈 거야.”
“그럼 피닉스는 없는 거예요?”
“없어.”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동물이 실존하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없다고 치자.
에바는 몹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튼 나 복귀했으니까 다시 루이한테서 업무 인계받아와.”
“네.”
내가 왕립학교에 전념하는 동안 재상으로서의 업무는 루이가 대리로 수행해주었다.
어차피 차기 재상인 루이였기 때문에 한 번 맛이나 보라고 맡긴 건데, 들은 바에 의하면 나보다 훨씬 재상다웠다고 한다. 아하하. 덕분에 나를 대신하여 재상 노릇을 한 한 달간 루이는 순식간에 나를 대체할 만한 재목으로 정계에 떠올랐다.
좋아. 루이에게 떠넘기고 조기은퇴 하는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계속 루이의 업무능력과 카리스마를 어필시키면, 과도할 정도의 명성과 인지도를 가진 나를 대신한다 해도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잠시 후, 에바가 수북한 서류더미를 가져왔다.
살짝 질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리 많아?”
“콘체른 남작님께서 재상 대리를 수행하시는 동안 처리한 업무들입니다.”
“잘잘한 건 놔두고 굵직한 업무만 가져와.”
“굵직한 업무만 골라왔는데요?”
“엥?”
“콘체른 남작님께서 재상 대리를 수행하시는 동안 재상부의 업무처리속도가 3배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완전 초인이라고요, 콘체른 남작님은요.”
“나, 나도 일할 때는 근무 태만을 한 게 아닌데, 나의 3배라고?”
“네. 저더러 일 잘 한다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어요, 에헤헤.”
아아, 그렇군.
에바는 푼수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업무능력은 뛰어났다. 그런 에바와 일하기 위해 태어난 루이가 만나 시너지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아무튼 처리한 업무의 방향성이 재상 각하의 의중과 다를 지도 모르니 검토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어.”
서류를 하나씩 검토해보았다.
루이의 일처리는 훌륭했다. 이렇게 탁월할 수가 있구나 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렴, 전생 때는 이런 업무능력 하나로 카르스 황제의 눈에 들어 레던 왕국 총독까지 출세한 루이 아닌가. 혼트 제국에 떨어진 레던 왕국령을 다스릴 정도였으니 재상노릇쯤은 별것도 아니겠지.
루이의 솜씨를 보자 의욕이 솟는다. 나도 이렇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 일하자 일.
***
오랜만에 의욕을 갖고 일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퇴근할 때가 되자 나는 칼 같이 귀가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문득 대전(大殿)에서 일하는 하인이 찾아와 에릭 국왕의 전갈을 전해왔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쳇. 같이 밥 먹을 거면 점심 식사로 하지. 퇴근 시간 늦어지면 싫은데. 그치, 노움?”
-응. 얼른 집에 가서 지스를 보고 싶어.
“어휴, 우리 귀염둥이! 너도 이 아빠 맘을 이해하는구나.”
-헤헤헤.
노움과 노닥거리며 대전으로 향하였다.
이미 고급 식기류가 잘 차려진 식탁에는 루이와 제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릭 국왕은 아직 안 온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신하가 왕보다 늦게 오면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니까.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지?”
“그랬습니까?”
“그렇군요. 왕립학교를 무사히 완공시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과연 재상 각하이십니다.”
전자의 무심한 대꾸는 제론, 후자의 열성적인 반응은 루이였다.
난 제론을 무시하고 루이와 대화했다.
“보내준 서류들은 봤어. 일처리가 끝내주던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내 자리를 물려주고 싶을 정도야,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어제 삿된 무리들의 습격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가족 분들은 무사하시는지요?”
“물론. 그깟 흑마법사 나부랭이들, 내 상대가 아니야.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게 뭡니까?”
“정령을 속박하는 마법을 쓰더군, 그놈들.”
내 말에 루이는 물론 제론의 얼굴색도 변했다.
혼트 제국이 정령술 대책 연구를 한다는 첩보는 이미 왕실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나?”
마침 에릭 국왕이 나타났다.
나는 에릭 국왕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표정이 심각해진 에릭 국왕이 내게 물었다.
“흑마법사들의 배후에 혼트 황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카르스 황제가 종용한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폐하.”
내 말에 제론도 동조했다.
“동의합니다. 용의주도한 카르스 황제가 꾸몄다고 보기에는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재상 각하의 아드님을 납치하면 인질로서 효용이 크지만, 실패하면 정령술 대책 연구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에게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루이도 거들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기 때문에 카르스 황제와는 무관해도 혼트 황실과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정령술 연구를 담당한 황실 인물이 연구 성과가 미진하자 흑마법사 무리와 손잡은 게 아닐까 의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