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회: 13권 - 10장. 정령술 대책 -->
“이제는 인정하시겠습니까? 정령술은 대자연의 조화 그 자체. 오직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흑마법으로만이 대적이 가능하지요.”
“잘난 체 하는 꼴 보러 온 게 아니다.”
루오겔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분함을 표출했다.
노인은 웃었다.
“뭐, 아무튼 다시 찾아오실 줄을 알고 저희도 나름대로 열심히 정령술을 연구했습니다. 성과도 있었지요.”
“성과?”
루오겔 백작이 반색했다. 그 성과란 녀석만 있으면 공적과 출세는 확정이었다.
“하급 정령사 한 명에게 협조를 구해서 연구했지요.”
“협조하는 정령사가 있었단 말이냐?”
루오겔 백작은 놀랐다. 그동안 황실 공문과 함께 큰 포상금을 내걸어도 협조하겠노라고 찾아오는 정령사는 없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워낙 협조성이 없는 정령사라 고생 좀 했습니다만,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간신히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딱 네놈들다운 짓거리로군.”
흑마법의 탐구를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족속들. 이런 자들의 도움이 절실한 스스로의 처지에 루오겔 백작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 결과 얻은 성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문득 노인은 루오겔 백작에게 손을 뻗었다. 깡마른 노인의 손아귀에 검은 아지랑이처럼 흑마력이 맺혔다. 흠칫 놀란 루오겔 백작도 즉시 대응했다.
“실드!”
마나의 보호막이 그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노인의 손에서 흑마력이 발출되었다. 흑마력은 로프의 형태가 되어서 루오겔 백작의 실드를 몇 바퀴나 휘감았다.
루오겔 백작은 노하여 외쳤다.
“무슨 짓거리냐!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냐, 이 발칙한 것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작 각하께는 아무런 영향도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시험해보시지요.”
“……좋다.”
루오겔 백작은 실드를 유지한 채 다시 주문을 외었다. 이윽고 허공에 세 개의 불덩어리가 생성되었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은 노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허튼 수작 부리거든 숯덩이로 만들어주마.”
노인은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오겔 백작은 실드를 해제했다. 만약 이 요상한 흑마력 로프가 자신을 속박한다면, 지체 없이 노인을 불태울 생각이었다.
실드가 사라지자 로프는 루오겔 백작을 휘감았다.
잠시 움찔한 루오겔 백작이었지만, 로프가 온몸을 꽁꽁 휘감았음에도 아무런 속박감이 없자 긴장감이 풀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몸이 로프를 그대로 통과했다. 노인의 말대로 루오겔 백작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가 빠져나오자 흑마력 로프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둘둘 휘감기며 뭉치더니, 이내 검은 빛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놀라게 해드린 모양이군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한 번만 더 이따위 짓을 하면 죽여 버리겠다.”
“명심하지요.”
루오겔 백작은 코웃음을 치고는 공중에 띄워놓은 불덩어리들을 없애버렸다.
노인은 여전히 음흉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방금 보여드린 것은 정령속박마법입니다. 흑마력으로 정령을 묶어두는 흑마법이지요. 방금 확인하셨듯이 정령 외의 대상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
그 말에 루오겔 백작은 눈을 부릅떴다.
“정령을 속박한다고? 그게 정말이냐!”
“예.”
“그 술식을 말해보아라! 이전과 마찬가지로 너희 흑마법을 마법으로 해석하면 새로운 주문을 만들 수가……!”
“자자, 진정하시지요. 이걸로는 황제 폐하를 만족시켜드리지 못합니다.”
“뭐라고?”
“저희가 만든 이 정령속박마법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제야 루오겔 백작은 흥분에서 벗어나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떤 문제냐?”
“정령을 묶어두는 것은 가능합니다. 다만, 속박되었다 해도 소환이 해제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지요.”
“……소환해제 후에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겠군.”
“예. 웬만큼 능숙한 정령사라면 정령을 소환해제 후에 다시 소환하기까지 3초면 충분합니다. 하물며 카록 리간드 같은 가공할 정령사라면 1초도 안 걸리겠지요.”
그 설명에 루오겔 백작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 약점을 보완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결국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도록 정령친화력 자체를 봉인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2, 3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너무 늦다!”
“자자, 진정하시지요.”
노인은 루오겔 백작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서 저희는 정령사의 약점을 알아냈으니까요.”
“약점?”
노인은 히죽 웃었다.
“정령사의 가족이지요.”
그 말에 루오겔 백작은 흠칫했다.
“지, 지금 카록 리간드의 가족을 인질로 잡겠다는 것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카록 리간드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지요.”
“멍청한 놈들.”
루오겔 백작은 냉소했다.
“그 점을 우리 황실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리간드 백작가 저택에 카록 리간드가 부리는 물의 정령 운디네가 상주하고 있다. 아들을 돌보기 위해서지. 만약에 아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면 운디네가 즉각 대응을 할 것이고, 카록 리간드가 이를 눈치 채고 60초 안에 날아올 것이다. 그런데도 카록 리간드의 아들을 납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무슨 수로 말이냐?”
“방금 보여드린 속박마법으로 운디네를 봉쇄하고 아들을 납치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손에 넣고 인질로 삼는다면 설령 60초 안에 카록 리간드가 돌아온다 해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가 있지요.”
노인의 설명에 루오겔 백작은 멍해졌다.
……확실히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다.
정령속박마법의 약점은 소환해제 후 재소환하면 그만이라는 점.
하지만 카록 리간드가 왕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안 저택에 침입하면 그 약점이 사라진다.
그렇게 어린 아들을 손에 넣어 인질로 삼는다면…….
‘가능하다!’
정령술 대책이라고 해도 어차피 본질은 상급 정령술이 아니라 카록 리간드를 막는 것.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놈이니 아들을 인질로 잡으면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다소 비열하긴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대륙 정복을 위한 일이니 황제 폐하께서도 용서하실 것이다.’
어디 용서뿐이겠는가?
잘만 되면 누구보다도 큰 공적을 세우는 것이 된다. 카르스 황제가 누구보다도 경계하는 인물이 바로 카록 리간드 아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노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백작 각하께서는 승작은 물론 영지까지 하사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럴 테지. 카록 리간드를 제압하는 것만큼 큰 공은 없으니까.”
“그 영지의 일부를 양도하여주십시오.”
“뭣이?”
“저희가 원하는 것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땅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카록 리간드와 맞서는 위험한 일도 기꺼이 할 수 있지요.”
한결 같은 저자세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의 눈빛에서 강한 열망과 집착이 엿보였다.
루오겔 백작은 잠시 갈등했다.
‘만에 하나라도 흑마법사와 손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탄을 면치 못할 텐데.’
그 걱정을 아는지 노인이 덧붙였다.
“실패하더라도 혼트 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희의 단독범행으로 주장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실 만한 조건일 텐데요.”
고민 끝에 루오겔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성공하면 너희를 내 가신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하는 방식으로 영지의 일부를 떼어주마.”
“좋습니다. 다만 약속이 지켜질 때까지, 인질로 잡은 카록 리간드의 아들은 저희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쳇. 철저한 놈들.’
루오겔 백작은 내심 혀를 찼으나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좋을 대로 해라.”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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