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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정령술 대책
그 해 여름부터 레던 왕실은 왕립학교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레던 왕성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부지에 성(城)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학교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 자금과 인력이 투입됐다.
너무 규모가 큰 공사라 일각에서는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공사 현장의 총책임을 재상 카록이 맡기로 하자 전부 해결되었다. 레던의 현자라 불리는 명재상인 그는 하루아침에 동산과 저택을 만들어버릴 정도로 위대한 정령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재상 카록이 왕궁 대신 공사 현장으로 매일 출근해 정령술을 발휘하자 공사는 눈부신 스피드로 진행되었다. 지반을 다지는 데에 1분도 안 걸렸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이 속도라면 한 달 안에 완공도 가능하다며 관계자들은 고무되었다.
그렇듯 재상 카록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 선보여질 때마다 레던 왕국 사람들은 안심을 느꼈다. 그처럼 위대한 정령사가 있는 한 이 나라는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카르스 황제도 동의하는 바였다.
***
혼트 황실은 카르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정령술 대책 연구에 몰두 중이었다.
혼트 제국군의 내로라하는 전략가들은 정령사 카록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의 전술 대응을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어떠한 무기와 무술을 사용하더라도 정령술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책은 될 수가 없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땅속에 숨어든다. 지진을 일으켜 성을 단숨에 무너뜨리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허허벌판에 건축물을 만들기까지 한다. 상식이 안 통하는 이런 적을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는가?
“평원에서 대치한 상태에서 유목민족 기마대가 돌격했을 때, 전방에 성벽이 솟아날 수 있소.”
“아예 아군의 후방지역까지 날아가서 보급기지를 타격할 수도 있겠구려.”
“땅속에 숨어 있는 채 매복 공격을 하면 아군은 반격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오.”
“매복을 탐지하는 마법은 있소. 하지만 매복한 사람 중에 정령사가 있는지를 구분할 방법은 없으니…….”
“맙소사, 차라리 뮤트 공작 두 명을 상대하는 게 낫겠군.”
마법과 검술에 비하여 정령술은 활용도가 너무 자유로웠다. 전략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낸 카르스 황제가 숙적으로 삼을 만했다.
전술 차원에서 대응책을 찾지 못했으니, 이제는 마법사들에게 연구하게 하는 수단밖에 없었다.
이미 2년 전부터 혼트 제국이 자랑하는 마법병단이 카르스 황제의 지시로 정령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병단의 연구를 지원하는 정도가 달라졌다. 대륙정복을 위한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엄청난 연구비는 물론, 정령석과 각종 값비싼 재료를 무한정으로 투입했다. 그 정도로 카르스 황제는 카록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듯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마법병단은 좋아했을까?
오히려 반대였다.
지원의 규모가 커질수록 마법병단은 실적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카르스 황제가 얼마나 기대하는지 피부로 체감되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단장님.”
“어떻게 됐나?”
마법병단의 단장 루오겔 백작이 물었다. 젊은 부하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루오겔 백작은 신음했다.
리프 루오겔 백작.
올해로 64세로 마법의 경지가 6서클에 오른 지 오래인 마도사였다. 오리엔 왕국의 레이몬드 후작처럼 7서클에 이른 대마법사는 아니었으나, 혼트 제국에서는 마법의 1인자였다.
‘내 평생에 다시는 이만한 공훈을 세울 기회가 없는데!’
루오겔 백작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이미 40대 초반에 6서클의 경지에 올라 전 대륙을 놀라게 했다. 마법사들의 정점에 선 레이몬드 후작을 따라잡을 유일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으며 혼트 제국 내에서 많은 기대를 모았다.
루오겔 백작도 자신의 장밋빛 미래에 고무되었다. 언젠간 대마법사가 되어 이 나라의 권력 중추에 다가서리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60대 중반이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그의 마법 수준은 조급도 발전하지 못했다. 한계에 종착해버린 것이었다.
이제 아무도 그가 대마법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도 좌절했다.
하지만 권력자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젊디젊은 황제의 원대한 야망을 알게 된 루오겔 백작은 다시금 야망에 불타올랐다.
전란은 곧 기회. 큰 공을 세우면 단숨에 최상위 권력자가 될 수 있다. 대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마법병단에게 떨어진 어명, 정령술 대책 연구. 이것이야말로 루오겔 백작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회였다.
카르스 황제는 레던의 재상 카록 리간드를 가장 경계했다. 정령술 대책을 발견해내면 대륙 정복에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 장치는 알아냈는데, 봉쇄할 방법이 없으니!”
연구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필사적인 연구 끝에 간신히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 마법을 개발했다. 다만 이 ‘정령감지마법’은 펼칠 때마다 정령석을 하나씩 소모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마법을 만든 것만으로도 진일보였다.
하지만 실용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 값비싼 정령석을 소모해서 정령감지마법을 펼치면 고작 한 시간 정도 유지된다. 하루 24시간만 마법을 유지해도 정령석 24개가 소모되는 것이다. 카록 리간드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줄 알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는 수 없구나. 되도록 그놈들과는 더 엮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루오겔 백작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날 밤, 은밀히 궁전에서 빠져나온 루오겔 백작은 인적이 없는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루오겔 백작은 허름한 폐가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한때는 제법 잘 살던 부호의 저택이었으리라 추측되는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주인이 사라진 지 수십 년은 된 듯 여기저기 낡고 부서졌고 거미줄이 잔뜩 쳐졌다. 불빛 하나 없어 음산함이 더했다.
눈살을 찌푸린 루오겔 백작은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폐가 안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딱 네놈들에게 어울리는 곳이구나. 어두컴컴한 것이 딱 너희들 속내 같지 않으냐.”
루오겔 백작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어둠 속의 인영 한 명이 대답했다.
“실례했군요. 저희는 어둠이 더 편해서 말입니다.”
이윽고 램프 불이 환하게 폐가 안을 비추었다.
낡은 소파에 빙 둘러 앉은 흑색 로브를 걸친 6인이 나타났다.
그중 중앙에 앉은 노인이 루오겔 백작을 보며 히죽 웃었다.
“결국 또 뵙게 되었군요. 다시 저희를 찾아오신 것은 성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루오겔 백작은 별반 대꾸를 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흑마법사들.
어둠에 깊이 빠져버린 이 족속들은 전 대륙 어딜 가도 공적으로 취급 받는 기생충들. 혼트 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오겔 백작은 되도록 이 쓰레기들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령술 대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예산을 소모했으면서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마음이 급해진 루오겔 백작은 이들에게 손을 뻗고 말았다. 흑마법이라면 뭔가 힌트가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흑마법사들은 적어도 일반 마법사들보다 정령술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거액의 돈과 안전을 대가로 흑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은 루오겔 백작은 간신히 카르스 황제에게 미약한 성과나마 내밀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정령감지마법이었다.
실마리를 얻었으니 이제는 마법병단의 역량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성과를 얻지 못했고, 다시 한 번 흑마법사들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